소설리스트

환생무적-104화 (105/301)

104. 너구리를 끌어내는 법

흑천사왕 중 한 사람이자 혈지침(血指針)이라는 별호를 가진 교패.

새하얀 피부에 서생처럼 보이는 외모를 가진 그가 죽립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확인한 장내의 무인들이 술렁거리며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을 막 넘어가려던 종권악은 마치 구원자를 본 것 같은 눈으로 교패를 보았다.

“교 선생…….”

적비연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교패를 보았다.

-흐음. 저놈이 교패라는 녀석인가?

극마의 물음에 적비연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교패다.’

-흥! 생각보다 약한 놈이었군.

‘네 눈에 약해 보이지 않는 인간이 있긴 하냐?’

-후후후. 하긴 본좌의 수준은 천산처럼 까마득해서 어지간한 인간들은 한참 모자라 보이긴 하지.

정말이지 깨알 같은 잘난 척이다.

그나마 ‘주인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안 한 게 어딘가?

적비연은 반응해 주는 대신 교패를 물끄러미 보며 입을 열었다.

“책임을 진다 하셨소?”

“그렇네. 내가 직접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바람이나 쐴 목적이 아닐세.”

“그야 그렇겠지.”

“하면 이제 삼 공자를 놔드리게.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면 그저 피맛을 한 번 보고 싶었던 건가?”

적비연이 교패와 종권악을 번갈아 보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대신 빠르게 종권악의 혈도를 점했다.

탁탁탁!

몸이 그 자리에서 통나무처럼 굳어 버린 종권악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자 주변의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졌다.

“저, 때려죽일 놈을 봤나! 교 선생께서 직접 책임을 지신다는데도!”

“노옴! 삼 공자를 놓아드리지 못할까!”

한편 종권악은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젠장! 진짜 죽을 뻔했어!’

아직도 목 언저리가 얼얼한 기분이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정파의 후기지수 따위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자괴감과 점혈당한 수치심이 치밀어 올라왔다.

마음 같아서는 교패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적비연에게 지금이라도 달려들어서 목을 따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마혈을 당했으니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나마 교패가 제때 나타나 주니 다행이었다.

요당이 교패를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교 선생 오셨습니까?”

교패가 요당을 보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다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적비연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극마가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별 시답잖은 놈 하나 때문에 사파 놈들 전체가 술렁이는군.

적비연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단언컨대 흑천사왕 중 한 사람인 교패를 보고 ‘별 시답잖은 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자는 극마가 유일하리라.

뭐, 마선의 경지까지 올랐던 극마의 입장에서는 그리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교패는 무시할 수 없는 자야. 무공도 무공이지만 머리가 굉장히 좋은 자거든.’

-내가 제일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군.

적비연이 내심 피식 웃으면서 부정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교패는 무림맹에서도 무척 까다롭게 여기는 존재다.

교패를 부르는 단어 중에는 흑천사왕을 제외하고도 또 하나가 있다.

-그게 뭔데?

‘천하사대지자(天下四代智者).’

-그 말은…… 당대 무림에서 가장 똑똑한 네 명 중 하나라는 거냐?

그렇다.

교패는 천하사대지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럼 무림맹의 가후가 그중 하나겠고 저기 요당, 그리고 교패. 또 하나는 누구지?

‘만통지(萬通知)’

-만통지? 별호냐? 이름은?

‘이름은 나도 몰라. 정사지간의 은거기인이라고 봐야 해. 그 사람이 어찌 생겼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심지어 실존하는지도 정확히 모르지.’

다만 언제부턴가 강호에는 만통지라는 지자가 존재한다는 게 기정사실처럼 떠돌았다.

그렇게 네 사람을 천하사대지자라고 불렀다.

‘특히 교패는 의술이 뛰어나다. 무림맹에 아상 어르신이 있었다면, 흑천련에는 교패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점점 더 재수 없군.

‘다만 교패는 아상 어르신처럼 사람을 살리는 의술보다 대법이나 사술에 가까운 의술에 능통하지.

-과연. 그래서 장문탁이라는 그 사파 놈이 파천혈기공을 쓴 것이군. 저놈이 바늘을 날린 것도 그런 이유겠고.

그렇다.

교패의 주무기는 바늘이다.

혈지침이라는 별호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장문탁에게 파천혈기공을 알려준 사람 역시 교패다.

체내의 공력을 일시에 폭발시켜 자폭하게 만드는 영약 또한 교패가 만들었다.

-어쨌든 싸움도 잘하면서 머리까지 똑똑하단 거네. 제일 짜증 나는 부류다.

‘공감이야.’

-뭐, 주인도 덜떨어진 건 아니다. 꼼수를 잘 쓰는 걸 보면 말이지.

흐음. 확실히 극마는 칭찬 같은 말도 듣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어쨌거나 교패를 끌어내는 건 성공했어.’

적비연이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교패를 보았다.

적비연과 교패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혔다.

한편 임송화는 그런 적비연을 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로 교패를 끌어내다니. 볼수록 매력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어. 당신, 볼수록 흥분돼.’

임송화는 정말로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이곳으로 떠나기 전 무림맹에서 가후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교패는 책임감이 강한 자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을 때가 아니라면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겁니다. 사절단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교패에게 책임을 묻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징성에 있어서도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흑천사왕씩이나 되는 자가 고분고분 책임지려고 할까요?”

임송화가 따지듯 묻자 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겠지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달린 겁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겁니다. 하나는 회유를 통해서 협상하는 것일 테고, 다른 하나는 궁지로 몰아서 교패를 끌어내는 것입니다.”

“아니, 군사님. 우리는 적진으로 가는 거예요. 호랑이 굴로 들어가면 궁지에 몰릴 사람은 우리가 되겠죠. 저쪽이 뭐가 아쉬워서 궁지에 몰리겠어요?”

임송화의 말에 가후가 빙그레 웃었다.

“어려운 임무를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도 그 상황에 닥치지 않는 이상 뭐라고 단언을 해드리기가 어렵군요. 그때의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처하셔야겠지요.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임송화가 다시 따지려고 할 때, 적비연이 말했다.

“일단 해보겠습니다.”

그때만 해도 적비연이 가후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한데 정말로 적비연은 흑천련을 궁지로 내몰았고, 교패를 끌어낸 것이다.

이러니 안 반할 수가 있나!

음? 근데 어디선가 살기가…….

임송화가 흠칫거리고 돌아보니 바로 옆에서 예홍이 귀신같은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 이 부정의 화신을 잠시 잊고 있었어.’

임송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하하…… 존경의 시선이야. 존경…….”

“흥. 주제를 모르면 일찍 죽는 법이지.”

‘아니, 이 계집애가……!’

임송화가 내심 발끈했지만 이어진 적비연의 말에 집중하느라 분을 삭였다.

“책임을 진다라. 어찌 책임을 지겠소?”

“내가 무림맹으로 가지.”

교패의 대답에 장내가 다시 술렁거렸다.

지금 내뱉은 말뜻은 하나다.

자신의 신병을 무림맹에 넘기겠다는 것.

적비연도 교패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진심이오?”

“물론. 이후의 일정이 어찌 되는가?”

사절단의 일정을 묻는 것이다.

“당신의 말대로 그렇게 순순히 책임을 지겠다면 우리는 오래 머물 이유가 없소. 오늘 하루 정도만 머물고 곧장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광주로 돌아갈 생각이오.”

항주와 광주는 바다로 이어진다.

바다를 통해 광주로 간다면 교패가 만든 신풍문에 대해서도 조사하기 편하다.

뿐만 아니라 교패라는 거물을 데리고 사파의 영역을 관통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피할 수 있다.

교패가 그 의도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하면 지금쯤 무림맹에서 보낸 밀선이 항구에 머물고 있겠군.”

역시 똑똑한 자다.

정확한 예측에 적비연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소. 당신은 우리와 함께 그 배에 승선하게 될 거요.”

“알겠네. 내일 이른 아침에 자네가 머무는 숙소로 찾아가도록 하지.”

“좋소. 그럼 우리도 삼 공자를 풀어드리겠소. 단.”

쉭쉭쉭!

적비연이 종권악의 요혈에 침을 날렸다.

사활침이었다.

“우리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하니까.”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종권악이 얼굴이 시뻘개져서 소리쳤다.

적비연은 사활침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아상 어르신이 개발한 침술이오. 교 선생께서 아무리 의술에 해박하다 해도 그 해법을 찾는 게 쉽진 않을 거요. 약조를 지킨다면 해독침을 놔드리겠소.”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광분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히 삼 공자께 그런 비열한 짓을 하다니!”

“내 언젠간 네놈의 뼈와 살을 분리해주겠다!”

“네 이놈!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인 줄 알아라!”

이윽고 교패가 슬쩍 손을 들어 올리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교패의 입에서 침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조는 지킨다. 내일 묘시정(卯時正)까지 숙소로 찾아가지.”

“좋소.”

대답을 마친 적비연이 그제야 종권악의 마혈을 풀어주었다.

* * *

사절단은 반철룡과 여추백의 안내를 받으며 흑천련 인근의 호화객잔에서 머물게 됐다.

“장원에서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겠소. 현재 본 련이 진급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분위기가 어수선하오. 해서 어쩔 수 없이 장외 객점에 모시게 됐소.”

사실 핑계에 가까운 변명이었다.

흑천련으로서는 무림맹 사절단을 장원에 들여놓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테니까.

외원이라 하더라도 어쨌거나 흑천련의 은밀한 구조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뭐, 어차피 대략의 구조는 기억하고 있지만 좀 더 면밀히 살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그런 적비연의 생각과 달리 단휘는 오히려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반철룡의 손을 덥석 잡았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핫! 이 얼마나 좋은 환경입니까? 두 분이 그리웠습니다!”

진심이었다.

흑천궁에서 명줄이 십 년은 짧아진 기분이다.

아마 평생 받을 살기를 오늘 다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데 이렇게 장외에 숙소를 마련해주니 단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정말이지 그동안 여추백이 툴툴거리며 대했던 게 애교로 느껴질 정도였다.

반철룡이 돌아가자 적비연은 사절단을 불러 모았다.

단휘가 싱글벙글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일도 잘 풀렸으니 마지막 날을 기념해서 한잔하는 겁니까?”

“그럼 좋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아, 그럼 왜 부르신 건지?”

“이제부터 흑천련 장원으로 잠입할 생각이다.”

“예에엑?”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이제야 겨우 호랑이 아가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 아가리를 벌려 머리를 들이밀겠다니!

예홍이 불쑥 나섰다.

“저도 함께 죽겠습니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그리고 잠입은 나 혼자 한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단휘가 물었다.

“혼자 가신다니요?”

“위험합니다, 하 대협.”

현청도 얼른 나섰다.

하지만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납치된 형님을 찾으려고 하오.”

“아주버님…… 아니, 하기룡 대협이 어디에 사로잡혀 있는 줄 알고요?”

임송화가 불쑥 나서며 묻는 말에 적비연이 차분히 대답했다.

“일단 흑천련 본단에 온 김에 살펴볼 생각이오. 그러니 혹시 밤중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여러분들이 시간을 좀 끌어주시길 바라겠소.”

갑작스러운 발언에 사절단원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똑…… 똑…….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인 곳에서 이따금씩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르르…….”

마치 짐승의 숨소리 같은 것이 나직이 울렸다.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횃불을 든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확, 확인해 보세.”

“제길, 난 저자한테 가까이 가는 것조차 싫다니까.”

“그래도 매일 상태를 확인하라고 하시지 않았나? 공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공진철(功鎭鐵)로 묶어뒀으니 괜찮을 걸세.”

두 사람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마침내 쇠사슬 같은 것에 양팔과 양다리가 벽에 결박된 사내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사내.

사내의 몸을 꼼꼼히 살피던 두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별 달라진 점은 없어 보이지?”

“오늘도 똑같군.”

그렇게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크아아아아!”

철커덕! 철커덩!

갑자기 백발의 사내가 소리를 지르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히이익! 가, 가세!”

두 사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자, 백발의 사내가 광기에 찬 목소리로 외쳐댔다.

철커덩! 철커덩!

“날 여기서 내보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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