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월희마녀(月熙魔女)
타앗! 팟!
적비연의 신형이 어둠 속을 가르며 사뿐사뿐 날았다.
흑천련 외원 사흥각(史興閣) 지붕에 안착한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높게 치솟은 벽을 바라보았다.
‘너무 높은데.’
내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벽이나 다름없는 저 벽을 올라타야 한다.
하지만 경공술을 펼쳐서 넘기엔 너무 높다.
계단으로 올라도 무려 백팔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그렇다고 계단을 통해서 오르면 ‘나 좀 봐주시오’ 하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소싯적 나였다면 저런 내벽쯤은 가뿐히 넘었을 거다.
‘암요. 그랬을 테지.’
-이익. 날 무시하는 거냐?
‘무시가 아니라 지금은 쓸데없는 자랑질에 지나지 않잖아.’
-흥!
극마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적비연은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곳곳에서는 늦은 밤까지 수련하는 무인들이 꽤 있었다.
조만간 진급 시험이 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정문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홀로 수련하고 있는 누군가를 사로잡아 그자로 변장해서 백팔 계단을 오른다고 해도 문제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 그러니까 내원의 입구에도 번을 서는 무인들이 있다.
그들은 적비연의 얼굴을 알아볼 것이다.
내원은 경계가 훨씬 삼엄할 터.
더구나 무림맹 사절단이 인근에 머물고 있으니 특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경계가 허술한 곳이라면 역시…….’
적비연이 다시 깎아지른 듯 치솟아 있는 내벽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생각을 읽은 극마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주인은 능공허도(凌空虛道)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잖냐?
‘능공허도는커녕 허공답보(虛空踏步)라도 펼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놈이…… 아니, 주인이 어떻게 저 내벽을 뛰어넘겠다는 거냐?
‘날지 못하면 뛰어야 하고, 뛰지도 못하면 기어야지.’
적비연이 품에서 단검 두 자루를 꺼내며 말했다.
* * *
흑천련 내원 월희전(月熙殿).
열린 창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또로로롱.
수증기가 자욱한 욕탕에 물이 떨어지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나신을 욕조에 푹 담고 있는 여인.
그녀는 마치 달빛과 한 몸인 것만 같았다.
기다란 속눈썹과 둥글고 하얀 어깨, 가늘고 매끈한 목과 보드랍게 솟아오른 가슴.
달빛은 그 모든 신체 부위에 끈질기게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다.
마치 그녀를 보고 있으면 달빛이 그녀에게 달라붙는 것만 같다.
그녀가 가녀린 손을 들어 올려 다시 욕조에서 퍼낸 물을 비워냈다.
또로로롱.
수면에 닿아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난다.
“교 선생이 무림맹으로?”
“그렇습니다.”
욕조 뒤에서 목석처럼 서 있는 사내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옆에서 목욕하고 있으면 눈 한 번 돌릴 만도 하건만 그는 마치 굳건한 바위처럼 미동도 없었다.
“교 선생이 무림맹으로…… 무슨 생각인 걸까?”
“…….”
또로로롱.
다시 손으로 물을 퍼서 비워내던 여인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달의 정기를 온몸으로 느끼려는 듯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살며시 눈을 뜨고는 입을 열었다.
“만검세가의 하천웅이라고 했지?”
“예.”
“만검세가주가 교 선생의 칼날에 당했는데, 그 아들이 찾아와서 휘저었다니. 견부(犬父) 아래에 호자(虎子)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녀가 피식 웃었다.
마침내 그녀가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촤르르르르.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물이 미끄러지면서 눈부신 나신이 달빛에 훤히 드러났다.
정말이지 사람이라면 눈을 떼기도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럼에도 바위처럼 서 있는 남자는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다가오자 고개를 숙이며 옷을 내밀었다.
내공을 운용해서 몸의 물기를 순식간에 말려 버린 여인이 옷을 하나씩 걸쳐 입었다.
“어떤 자인지 궁금하네. 그 교 선생을 끌어낼 정도의 배짱이라니.”
“인근 객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사내는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여인은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옷을 완전히 챙겨 입은 여인이 창밖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모처럼 밤바람이나 쐐 볼까?”
* * *
콰각!
단검이 벽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적비연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외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곳곳에서 수련 중인 무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적비연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원을 둘러싼 벽이 어두운 데다 현재 적비연은 은신술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은신술의 대가였던 운귀로 환생했던 게 천운인 셈이다.
그 바람에 은신이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지 않는가?
다만 은신술을 펼치고 있으니 공력 소모가 심했다.
적비연은 다시 고개를 꺾어 들고 담벼락을 보았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끝이다.
옆에서 극마가 혀를 내둘렀다.
-주인도 어지간하군. 이 높이를 정말로 기어서 올라올 생각을 하다니.
사실 말이 백팔 계단의 높이지, 실제로는 어지간한 절벽을 기어오른 셈이다.
계단 한 단의 높이가 웬만한 어른 무릎 높이 정도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단을 다 올라서서도 담벼락이 이 장 정도 쌓여 있으니 정말 높다.
적비연은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서 더 위쪽으로 옮겨서 박아 넣었다.
콱!
단단하게 박힌 것을 확인한 적비연이 다시 몸을 끌어 올렸다.
먼저 찾아가볼 곳은 내원의 봉무각(封武閣)이다.
그곳은 흑천련의 뇌옥이다.
만약 이들이 하기룡을 납치한 게 분명하다면 거기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하기룡이 죽든 살든 넌 상관없잖냐? 진짜 친형도 아니고.
형재애로 구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두 가지를 확인해 보고 싶다.
먼저 하기룡이 정말 살아 있는지.
분명 심장을 찔렀는데, 살아 있다면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인지.
둘째, 만약 살아 있다면 다 죽어가는 그를 왜 납치한 것인지.
-그럼 하기룡이 납치된 사실도 슬쩍 흘려보지 그랬냐? 흑천궁에서 말이야.
그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간 이들이 더욱 하기룡을 꽁꽁 숨기려고 할 테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
‘어쨌든 이제 다 올라왔어. 드디어 내원이다!’
파밧!
벽을 차는 것과 동시에 적비연이 몸을 날렸다.
콰각!
이번에도 벽면에 단검을 쑤셔 박는 순간,
쿠득! 덜컥!
‘헉!’
벽이 부서지는가 싶더니 마치 덮개가 열리는 것처럼 벽면이 젖혀지는 게 아닌가?
‘기관장치?’
맙소사. 이런 위치에 기관장치라니!
아니나 다를까, 벽면에 드러난 구멍에서 세침이 쏘아졌다.
퓨퓨퓩!
따다당!
황급히 단검을 휘두른 적비연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제길! 떨어진다!’
세침을 막아냈지만 덕분에 몸이 벽면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이런 높이에서 떨어지면 운 좋게 살아난다고 해도 치명상을 피할 수 없으리라.
-장풍을 쏴라!
극마의 외침에 적비연이 얼른 벽 반대방향으로 일 장을 터뜨렸다.
퍼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반발력으로 적비연의 몸이 다시 벽면으로 밀렸다.
콰가가가가각!
‘크으으윽!’
단검이 벽면을 길게 파냈다.
하지만 추락하는 속도를 조금 줄였을 뿐 적비연의 몸은 멈추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조금 전 허공에서 은신술을 풀고 일 장을 터뜨리는 바람에 외원에서 순찰을 돌거나 번을 서는 무인들이 일제히 떨어지는 적비연을 목격한 것이다.
“거기 누구냐!”
“웬 놈이냐!”
대번 소란스러워지면서 외원 곳곳에 횃불이 일어났다.
‘젠장!’
콰가가각, 째캉!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단검마저 부러지고 말았다.
적비연은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을 느끼다가 이내 추락하면서 땅바닥에 부딪쳤다.
콰당!
“크윽!”
그나마 단검을 이용해서 추락 속도를 늦췄기에 큰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강동칠괴의 호신기공인 수라철괴를 이용해서 충격도 어느 정도 완화했다.
“저쪽에서 소리가 났다!”
마침 건물 뒤쪽으로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둥둥둥!
침입자를 알리는 북소리도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거의 다 올라갔었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정말 지독한 놈들이 아닌가?
누가 저길 기어서 올라간다고 저 높은 위치에 기관장치를 해놨단 말인가?
-클클. 주인 같은 놈이 많은가 보지.
‘지금 웃음이 나오냐?’
-어쨌든 안 죽고 산 게 어디냐? 그리고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어서 도망쳐야 할 텐데?
극마의 말이 맞다.
외원에 포진한 무인들이 전부 몰려들기 시작하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적비연은 빠르게 경신술을 펼쳐서 달렸다.
사방에서 발걸음 소리가 어수선하게 들려왔다.
“어디냐?”
“여긴 없어!”
“저쪽이다!”
고함 소리와 함께 추격자들이 뒤를 쫓았다.
“칫!”
적비연이 혀를 차고는 서쪽으로 달려갔다.
장원 내벽을 끼고 돌아가자 바로 앞에서 달려오던 무인들이 흠칫거리고는 소리쳤다.
“여, 여기다! 미꾸라지가 있다!”
“웬 놈이냐? 거기 서라!”
적비연이 얼른 방향을 틀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전각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누비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칠괴 시절 몇 번 온 기억이 있었는데,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다.
-흐음. 전각이 진법대로 설계되어 있군. 무작정 달리다간 결국 잡히고 말 거다.
‘알고 있어!’
적비연이 대답과 동시에 벽을 차고 지붕 위로 뛰어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지붕 위쪽에도 수많은 무인들이 수색하고 있었다.
“엇! 저놈이다! 저기 복면인이다!”
“잡아라! 놓치면 안 된다!”
쒸에엑! 쒸에에엑!
고함 소리에 이어 화살까지 날아들었다.
따다앙!
하나 남은 단검으로 화살을 쳐낸 적비연이 얼른 아래로 뛰어내려서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전방에서 또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적비연이 방향을 꺾으려는 순간 극마가 소리쳤다.
-기척이 없는 곳으로 달리면 안 된다!
‘어째서?’
-이렇게 전각이 진법대로 설계된 경우 놈들을 피해서 달리기만 하다 보면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저놈들은 널 몰아넣고 있는 거다.
‘제길, 그럼 부딪쳐야겠군.’
-차라리 그게 낫다.
적비연이 극마의 말을 듣고는 그대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다섯 명의 무인이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나타났다.
찰나, 적비연이 마기를 개방하면서 구천활보를 펼쳤다.
쉬이이잇!
질풍처럼 뻗어나간 적비연이 구천일관시를 펼치자 순식간에 적의 목에 단검이 박혔다.
푹!
“커억!”
단검을 손에서 놓은 적비연이 그대로 적의 허리춤에서 검을 뺏어 들고는 제이초식 구천단혼전을 펼쳤다.
구천일관시와 다르게 구천단혼전은 베는 동작이 주를 이루는 초식이었다.
쉬커컥!
시뻘건 검기가 횡으로 스치면서 두 사람의 목을 단숨에 잘라냈다.
츄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터뜨리며 쓰러지는 자들 사이로 두 명의 무인이 보였다.
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더듬거렸다.
“방, 방금…… 마공…… 컥!”
말을 꺼냈던 무인은 자신의 단전을 뚫어 버린 적비연의 검을 보았다.
정말이지 눈 깜빡할 순간이었다.
“히이익!”
그 자리에 주저앉은 무인이 얼른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적에게 등을 보인 순간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푹!
“꺼어억!”
검신이 등을 뚫고 가슴으로 튀어나오자 무인이 입을 쩍 벌리더니 이내 푹 고꾸라졌다.
“하아, 하아.”
적비연이 숨을 몰아쉬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때,
-주인, 뒤다!
극마의 외침에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채앵!
불꽃이 일어나면서 매섭게 날아들던 뭔가가 튕겨 나갔다.
하마터면 순식간에 목이 날아갈 뻔했다.
‘강한 상대다!’
정말이지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공격이었다.
휘리리릭, 탁!
허공을 한 바퀴 맴돈 거뭇한 물체가 한 여인의 손에 잡혔다.
허공에서 유유히 바닥으로 내려서는 여인.
달빛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녀가 놀라움과 흥미로움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내 흑월아(黑月牙)를 쳐내? 너, 누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