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06화 (107/301)

106. 월희마녀(月熙魔女)

마치 초승달처럼 생긴 둥근 칼날.

온통 거뭇한 칼날은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칼날 끝에는 손가락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그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모두 다섯 개의 칼날을 한꺼번에 펼치면 마치 접선을 펼친 것처럼 보이는데, 방어용으로도 용이하다.

이 다섯 개의 칼날의 명칭은 흑월아.

한때 흑천련주가 젊은 시절 즐겨 다루던 무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재 그 흑월아를 다루는 강호 유일무이한 여인.

바로 흑천련주의 두 번째 제자이자 월희마녀(月熙魔女)라는 별호로 불리는 사예린(史豫瀾).

‘제길, 난감하게 됐네.’

적비연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필 사예린과 마주치다니.

이 공녀인 사예린을 종권악 수준으로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종권악은 다섯 제자 중에서도 무공이 가장 약하다.

하지만 사예린은 초절정을 훌쩍 넘어선 경지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초절정 중단 이상이리라.

지금 풍겨오는 기운만 봐도 강하다는 게 느껴진다.

그녀의 나른한 목소리가 달빛을 따라 구르는 듯하다.

“흐응. 내 목소리가 안 들려? 너 누구냐고 묻잖아?”

제길. 그걸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할 것 같으면 복면 따위를 뒤집어썼겠냐고.

적비연이 연신 눈알을 굴렸다.

어쩐다?

-어쩌긴. 주인 실력으로는 어림없는 상대다.

‘그래,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말해줘서 퍽이나 고맙다.’

-그럼 생각할 것도 없이 튀어야지? 뭐하고 있어?

이래서 문제다.

평생을 강하게 살았던 놈들은 약한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으니까 공감력이 떨어지는 거다.

이대로 몸을 돌려 달아나다간 조금 전 등이 꿰뚫려 죽은 저 무인과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될 거다.

-하긴. 당장 달아난다고 놓아줄 상대가 아니지. 그럼 일단 적당한 기회를 보는 수밖에 없군.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니냐?

적비연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사예린은 사뿐사뿐 가벼운 발놀림으로 걸어왔다.

“설마…… 귀가 어두운 거야? 내 말 잘 안 들려?”

꿀꺽.

적비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저렇게 물어오니 더 무섭다.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사예린이 미간을 곱게 찡그렸다.

“아무래도 말하고 싶지 않은 거구나.”

사람 긴장되게 하지 말고 진작 알아줄 것이지.

“흐응. 그럼 어쩔 수 없네. 말하게 만들 수밖에.”

촤라라랑.

다섯 개의 흑월아가 부채처럼 펼쳐졌다.

사예린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 집에 방문했으면 신분을 밝히는 게 예의란다.”

순간,

쉬이이익!

흑월아 한 자루가 어둠을 베며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적비연은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언제나 그렇듯 적의 공격이 끝나는 시점이 반격이나 달아나기 가장 좋은 순간이다.

“하앗!”

기합성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적비연이 가문의 비전절기인 낙뢰휘검 초식을 펼쳤다.

번쩍!

어둠을 깨는 빛이 터지면서 흑월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검신이 그대로 흑월아를 쳐내…… 야 하는데?

-숙여!

극마의 목소리에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쒸이잉!

놀랍게도 흑월아는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적비연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피하더니 그대로 뒤를 노려오는 게 아닌가?

파바밧!

적비연이 그대로 허공에 눕다시피 몸을 회전하면서 선풍뇌검을 변초로 펼쳤다.

파파파파!

적비연의 검이 허공을 할퀴듯 튀어 오르자 흑월아가 검신에 부딪치면서 튕겨 나갔다.

따앙!

“크읏!”

온몸의 뼈마디가 얼얼하게 울린다.

‘무슨 힘이 이리도……!’

수라철괴를 사용하면서 내공 소모가 심한 탓일까?

흑월아에 실린 도기를 내공으로 감당하기 벅찰 만큼 강한 힘이 느껴졌다.

순전히 도기가 실려서만은 아니리라.

-그만큼 저년이 저 비도(飛刀)를 잘 다룬다는 게지.

극마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흑월아는 마치 사예린과 한 몸인 듯했다.

흑천련주가 딸처럼 아낀다는 소문이 거짓은 아니겠군.

그때 사예린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긴장을 놓으면 안 될 텐데?”

“……?”

찰나 극마가 소리쳤다.

-양옆이다!

쉬이이잇!

쉬이이익!

극마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양옆에서 어둠을 찢으며 흑월아 두 자루가 각각 날아들었다.

‘젠장!’

어느 한쪽을 막아도 다른 한쪽에 당할 위기!

적비연이 과감하게 검을 집어 던졌다.

파앗!

쒸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검신이 날아가자 사예린의 이맛살이 찡그러졌다.

‘검을……?’

검사가 검을 던진다는 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그게 아니면 최후의 발악이거나.

‘조금 더 버틸 수 있을까 했는데 역시…….’

촤라랑!

사예린이 가볍게 세 자루의 흑월아를 부채처럼 펼쳤다.

따아앙!

적비연이 던진 검이 그대로 흑월아에 부딪치면서 불꽃을 터뜨리고는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적비연에게 날아든 두 자루의 흑월아!

적비연이 양손을 교차하는 순간,

파파앙!

기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적비연의 몸이 뒤로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콰당탕!

전각 벽을 부수며 적비연이 그 안으로 들어가 나뒹굴었다.

사예린의 표정이 다시 한번 곱게 일그러졌다.

‘튕겨져……?’

도기를 품은 흑월아다.

그것을 양손으로 잡는 건 말이 안 된다.

손마디가 싹둑 잘려 나가야 정상이다.

한데 마치 둔탁한 뭔가에 맞은 것처럼 적비연의 몸이 튕겨 나갔다.

금강불괴라도 익히지 않고서야.

아니, 금강불괴라도 맨손으로 흑월아를 잡는 건 불가능할 터.

사박사박…….

사예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무너진 벽면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무너진 벽 안쪽에서 녹색 연무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독……!’

팟!

독무를 단박에 눈치챈 사예린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촤라랑!

세 개의 흑월아를 부채처럼 펼친 그녀가 손을 한차례 휘저었다.

후우우웅!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강풍이 불어나가면서 전각 내부에 자욱하던 독무가 주변으로 흩날렸다.

‘독탄을 지니고 있었던 건가?’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다시 무너진 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잔해와 잡기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적비연은 보이지 않았다.

독무를 피워놓고는 몸을 빼낸 듯 보였다.

대신 흑월아 두 자루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핏자국도 보이지 않는다.

흑월아를 챙긴 사예린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재미있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그림자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욕탕에서 그녀와 함께 있던 남자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쫓으시겠습니까?”

“흐음.”

잠시 생각하던 사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차피 각주들까지 나서게 되면 곧 잡힐 테지. 일단 만검세가주를 만나러 가지.”

“그럼 객점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앞장서.”

“예.”

고개를 숙여 보인 남자가 몸을 돌리고는 걸어갔다.

* * *

“후우, 후우, 후우.”

적비연이 숨을 몰아쉬면서 벽에 등을 기댔다.

다행히 더 이상 추격자는 보이지 않았다.

‘제길, 아직도 손이 얼얼하네.’

손을 쥐었다가 펼 때마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한 치는 더 두꺼워진 것 같다.

귀갑수를 착용했다지만 도기를 머금은 칼날을 맨손으로 잡았으니 붓지 않은 게 이상하리라.

‘그나저나 귀갑수가 기물은 기물이구나. 손이 터질 것처럼 부었어도 잘리진 않았으니.’

문득 귀갑수가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서라, 손모가지 걸고 모험하는 거 아니다.

적비연은 극마의 말을 무언으로 긍정했다.

정말이지 흑월아를 양손으로 잡았을 때는 그대로 손이 잘려 나가는 줄만 알았다.

강동칠괴의 호신기공인 수라철괴까지 사용했지만 통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뭐 그래도 그 덕에 벽이 부서지면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무림맹 병기고에서 챙겨온 독탄을 사용했다.

이걸로 병기고에서 챙겨왔던 일회용 무기는 다 사용한 셈이다.

‘이렇게 빨리 소진해 버릴 줄 알았으면 좀 더 챙겨 오는 건데. 하다못해 공보단이라도 챙길걸.’

그래도 그 무시무시한 여자한테서 벗어난 게 어딘가?

전각의 벽이 부서지면서 진법 일부가 깨진 게 유용했다.

그렇게 독무가 퍼진 틈을 타서 무작정 달아나다 보니 이곳으로 오게 됐다.

다만 문제는…….

‘여기도 어딘지 모르겠네.’

미로 같은 구조다.

그렇다고 지붕 위로 올라섰다간 반드시 발각될 테고.

‘바로 앞에 내벽이 있는 걸 보면 외원에서도 상당히 안쪽인데…….’

다시 봐도 내벽은 정말 높다.

저 높은 곳을 어떻게 기어 올라갔던 거지?

무식이 용감이라더니.

꼭대기에서 한 번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것 같다.

문제는 또 있다.

내공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이게 다 호신기공인 수라철괴 때문이다.

급할 때는 제법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지만 내공 소모가 너무 심한 게 생각보다 큰 단점이다.

-그런 허접한 것 말고 괜찮은 호신공 하나 알려주랴?

‘그런 게 있어?’

-본좌는 마선까지 오른 몸이다. 그 정도 호신공이야…….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지!’

-주인이 알려달라고 안 했잖냐?

‘그걸 꼭 말로 해야…….’

그때였다.

기이이잉.

갑자기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면에 보이는 내벽의 일부가 쑥 들어가는 게 아닌가?

이미 기관장치에 당한 게 있었던지라 적비연은 반사적으로 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단검을 꺼내려던 그는 곧 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제길, 또 맨손으로 막아야 하나?’

그때 정면에서 움푹 들어간 벽이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시커먼 통로가 나타났다.

‘응? 뭐지?’

잠시 후 시커먼 통로에서 두 명의 무인이 나오다가 적비연과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

“엇!”

“누구……?”

두 사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진법에 의해 보호되는 구역이었기에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한데 처음 보는 얼굴이 서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그들은 곧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품에 손을 넣었다.

신호탄을 던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적비연이 먼저 바닥을 차면서 몸을 날렸다.

타앗!

적비연은 단전 바닥까지 남아 있는 모든 공력을 쥐어짰다.

거기에 선천지기까지 끌어올려 벽력활보를 펼쳤다.

파바밧!

화살처럼 날아간 그가 망설임 없이 수도를 곧게 뻗어냈다.

푹!

“커억!”

목을 맞은 무인 하나가 그대로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흐익!”

다른 무인 하나가 뒤늦게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팡!

철컥!

절반쯤 뽑혀 나오던 검신이 적비연의 발차기를 맞고 다시 검집에 꽂혔다.

대신 적비연은 쓰러지는 자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그대로 상대의 가슴을 베어 버렸다.

촤아아악!

“크아악!”

비명 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후우, 후우, 후우……!”

적비연이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발걸음 소리와 거친 사기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때였다.

그그긍……!

열려 있던 벽면이 닫히기 시작했다.

적비연이 얼른 두 구의 시체를 안아들고는 통로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그그그그궁!

문이 완전히 닫히자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이면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적비연이 벽을 더듬으며 일어났다.

“여긴…… 어디지? 내벽 안쪽으로 들어왔으니 내원의 지하인 셈인가? 그럼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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