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너는 누구냐
창밖으로 펼쳐진 서호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꽤 깊은 밤이었음에도 서호는 달빛과 등불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등불을 들고 뱃놀이를 하는 여인들, 나룻배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는 악사들, 호숫가를 따라 산책하는 가족들.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객실까지 고스란히 들려왔다.
정말이지 서호의 밤 풍경은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화기애애하고, 여유롭고, 푸근한 밤 풍경.
세상의 모든 근심은 서호가 다 집어삼켜 버리기라도 한 듯 흥겨움이 넘쳐흘렀다.
예홍은 그윽한 눈길로 서호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아름답고 한가로운 밤이라니.
이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속에서 저절로…….
“싹 다 불태워 버리고 싶어.”
예홍이 음침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그윽한 시선은 점점 어딘지 모를 원망과 분노가 섞이고 있었다.
“가주님이 사지에 들어가셔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저것들은 그저 웃고 떠들며 즐기는구나. 마음 같아서는 싹 다 불태우거나 전부 모가지를 썰어버리고 싶어.”
그녀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불안한지 엄지손톱을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예홍은 창가를 연신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였다.
“가주님은 무사하실까? 아니, 이미 돌아가셨겠지. 장례는 어떻게 치르지? 이런, 멍청하긴! 장례는 무슨! 복수부터 해야지! 장례는 그다음이야. 아니지, 먼저 영혼의 안식을 위해 장례부터 치르고 복수를 해야지. 그럼 가주님을 죽인 게 누구지? 그놈을 찾아 돌아가신 가주님의 복수를…….”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갑자기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돌아보니 단휘가 한숨을 내쉬며 객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예홍이 얼른 물었다.
“무슨 소식이라도?”
“이제 막 외원에 잠입하셨을 텐데 벌써 소식이 있겠냐? 이럴 땐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무소식은 곧 죽음이겠지.”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흑천련에서는 말을 하겠지.”
“아…….”
간단한 이치를 이제야 깨달은 듯 예홍이 짤막하게 탄성을 흘렸다.
단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예홍 옆으로 나란히 섰다.
창밖에서 밤바람이 소슬하니 불어왔다.
부드러운 바람결이 단휘의 머리카락에 엉겨 붙었다.
“불안하겠지만…… 조금은 믿어보는 게 어떠냐? 너를 위해서라도.”
창밖을 보던 단휘가 시선을 돌려 예홍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달빛을 품고 있었다.
어딘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예홍이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고는 물었다.
“흥,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어련하겠어.”
“이 야밤에 내 방엔 왜 온 거냐?”
“그냥. 걱정되니까.”
“혹시…….”
예홍이 미간을 곱게 모으고는 단휘를 올려다보았다.
“성희롱할 목적이냐?”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그럼…… 추행?”
“아니라고.”
“……폭행?”
“아니라니깟!”
버럭 소리친 단휘가 씨근거리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지 예홍의 생각 구조는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예홍이 코웃음을 치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니면 아니지 왜 광분을 하고 그러지? 찔리냐?”
“광분이라니 누가……! 이익……!”
단휘가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한 번쯤은 마음을 내려놔도 되지 않겠냐?”
“뭐?”
예홍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돌아보았다.
단휘가 여전히 호수에 시선을 던진 채 말했다.
“한 번쯤은 가주님을 믿고 마음을 편히 먹어보라고.”
“흥, 믿음이 밥 먹여주냐?”
“글쎄. 먹여주는 밥도 토해낼 불안보다는 낫잖아.”
“믿음과 현실은 철저히 별개다. 희망과 현실이 완전히 별개인 것처럼.”
예홍이 어딘지 아련한 눈길로 서호를 바라보았다.
단휘가 그런 예홍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사혈곡(死血谷) 생각나서 그런 거냐?”
“내 앞에서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을 텐데.”
예홍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워졌다.
단휘가 미안하다는 듯 손을 들어보이고는 다시 시선을 밤하늘로 돌렸다.
“그래도 난 믿어.”
“그렇겠지. 넌 언제나 가주님을 따르…….”
“널 말이야.”
“뭐……?”
“널 믿는다고.”
예홍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단휘를 돌아보았다.
“대체 뭘 믿는다는…….”
“그냥 모든 걸. 너에 대한 모든 걸 믿는다.”
“…….”
단휘가 예홍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때? 방금 묘한 기운이 불끈 솟지 않았냐?”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예홍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단휘가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아닌가? 헤헤. 만약 그랬다면…… 그게 믿음의 힘이란 거야.”
“대체 뭔 소리냐?”
“누군가 날 믿어준다는 건…… 마치 격체전공이라도 받은 것처럼 힘이 솟는단 말이지.”
“……!”
“너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모두를 위한 거다. 너, 그리고 가주님, 또 우리 모두.”
“너…….”
“그러니까 별개처럼 보여도, 쓸데없는 것처럼 보여도, 한 번 믿어보란 말이다. 가주님을. 그리고 너 자신을.”
예홍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지금껏 자신에게 이런 말을 진지하게 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는 있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그 사혈곡에서.
“누구도 믿지 마라.”
“킬킬. 누구도 믿지 마란 말에는 나도 포함인 거다.”
“희망이란 최고의 고문이지.”
“이 세상은 널 죽이기 위해 존재한다.”
“사방이 적이다!”
‘쳇, 떠올리기 싫은 기억.’
예홍이 혀를 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벽력적가에 오고 나서는 자신의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피했다.
그래서인지 이런 대화가 무척이나 낯설다.
예홍이 물었다.
“너는 어때?”
“뭐가?”
“정말로 마음이 편해?”
“응. 난 정말 가주님을 믿거든. 사실 아예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믿음이 더 커.”
“정말 편해 보이네.”
“그래. 그러니 너도 마음을 조금 내려놔. 그럼 한결 편해질 거야.”
“그래. 확실히 편안해 보이네. 정말이지 널…….”
“음?”
“불살라 버리고 싶어.”
“헉!”
단휘가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어느새 예홍이 단검을 꺼내 들고는 소리쳤다.
“가주님이 사지로 들어가셨는데 마음이 편하다고? 이 적폐 놈아!”
“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시끄러! 당장 내 방에서 꺼져 버려! 안 그러면 네 피부를 벗겨서 가주님 제사상에 올릴 거다!”
“아니, 왜 가주님을 벌써 죽은 사람으로 만드냐?”
“닥쳐라!”
“우앗! 아무튼 난 간다!”
단휘가 헐레벌떡 방을 나가자, 예홍이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흥! 내 방엔 얼씬도 하지 마라! 너답게 기녀나 불러서 놀아!”
예홍이 한참을 씨근거리다가 휙 돌아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의 풍경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아까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정말이지 이곳이 흑천련의 중심지라는 걸 잊을 정도로.
“믿음이라…….”
예홍이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격체전공을 받은 것처럼 솟는 기운이라니.
정말 그런 걸까?
누군가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
피식.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때,
둥! 둥! 둥!
갑자기 요란한 북소리가 울렸다.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니 흑천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평화롭기만 하던 근방이 묘하게 분주해지고 있었다.
마침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단휘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인피면구가 들려 있었다.
적비연이 천상원에서 챙겨왔던 인피면구 중 하나였다.
“네 말대로 기녀라도 불러야겠다.”
* * *
간단하게 운기조식을 마친 적비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공 소모가 심한 상태이지만 죽치고 앉아서 운기행공만 할 수는 없다.
기관장치로 벽이 닫히긴 했지만, 추격자들이 혈흔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이곳까지 들이닥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냐?
‘글쎄. 내벽 안이니까 내원의 지하라는 말이고. 어쩌면 여기가 뇌옥일 수도 있겠는데?’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또 있다.
바로 쓰러져 있는 무인들의 허리춤에 매달린 열쇠 뭉치.
절그럭.
적비연이 열쇠 뭉치를 꺼내 들었다.
혹시나 내공을 보충할 수 있는 공보단 같은 게 없는지 뒤져보았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하긴. 말단 뇌옥 간수가 공보단을 들고 다닐 리가 만무하지.
‘어쩌면 봉무각의 지하 뇌옥으로 연결되는 통로일지도 모르겠군. 출입구가 하나만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뇌옥이란 말이겠군.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든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어둡고 습한 통로를 따라 얼마나 이동했을까?
빛도 한 줌 들지 않는 통로이다 보니 내공으로 안력을 키워도 한계가 있었다.
무심코 걸음을 옮기던 적비연은 뭔가에 쿵 부딪치고는 얼른 물러났다.
“깜짝이야. 철창이 있었군.”
손을 더듬어 보니 철창 한쪽에 열쇠구멍이 있었다.
적비연은 챙겨 온 열쇠 꾸러미를 꺼내 하나하나 맞춰보았다.
철컥!
다행히 그중 하나가 맞았는지 철창이 열렸다.
끼이이익.
철창을 활짝 열고 들어갈 때였다.
타타타탓!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곧이어 멀찌감치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젠장! 벌써 쫓아온 건가?’
하긴 이 정도 시간이면 혈흔을 보고 눈치채기엔 충분하리라.
-서둘러야겠군.
극마의 말을 들으며 적비연도 얼른 몸을 날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자 이번에는 앞에서도 불빛과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어쩔 수 없다. 은신술을 펼쳐서 정면에서 오는 적을 먼저 뚫을 수밖에!’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최대한 앞으로 달려간 다음 은신술을 펼쳤다.
그의 신형이 어둠 속에 스르르 묻히는가 싶더니 이내 벽면과 하나가 된 듯했다.
마침내 횃불이 나타나면서 무인 두 명이 달려왔다.
느껴지는 기감만 보면 두 사람 모두 절정 이상.
특히 한 사람은 절정의 극에 이른 듯 보였다.
최소 조장이나 대주급이리라.
앞서 달리던 무인 하나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왜 그러십니까? 조장.”
조장이라 불린 사내가 검지를 입술에 댔다.
그가 눈알을 좌우로 굴리더니 나직이 일렀다.
“뭔가 이상한데…….”
한편 그 모습을 본 극마가 감탄했다.
-호오, 저 녀석은 그래도 기감이 꽤 뛰어난 모양이군.
‘쳇!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어쩔 수 없다.
후방에서도 추격자가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사람이 많아지면 오히려 발각되기도 쉽고 싸움도 불리해진다.
타앗!
판단을 내린 적비연이 돌연 몸을 날렸다.
쉬이이잇!
“어엇!”
뚜까앙!
검신이 맞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노오옴!”
앞선 무인이 그대로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젖히면서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해냈다.
곧이어 검파를 거꾸로 쥐고는 휘둘렀다.
쉬컥!
“커억!”
목이 베인 적이 그대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검파를 거꾸로 쥔 것은 좁은 통로에서 동작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오히려 또 다른 적이 당황해서 검을 휘두르다가 벽에 검신이 부딪치고 말았다.
까앙!
찰나 적비연은 그대로 몸을 회전했다.
촤아아악!
상대의 아랫배가 갈라지면서 내장과 함께 피가 쏟아졌다.
“크아악!”
상대가 쓰러지자마자 적비연이 얼른 수장으로 보였던 사내의 몸을 더듬었다.
‘있다!’
품에서 단환 하나가 나왔다.
냄새를 맡아 보니 공보단 종류다.
과연 조장급 이상이니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닐 여분이 있는 모양이다.
마침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빨라졌다.
얼른 단환과 불 꺼진 홰를 챙긴 적비연이 그대로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가니 갈림길이 나타났다.
자연히 추격자가 느껴지지 않는 방향으로 달렸다.
하지만 몇 걸음도 가지 못해 멈추고 말았다.
‘막다른 길!’
하필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대신 정면에 철문이 희미하게 보였다.
-생각할 게 뭐 있냐? 어차피 뇌옥을 살펴본다고 했으니 일단 저 문을 열고 들어가야지.
맞는 말이다.
추격자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적비연이 열쇠를 철문에 맞춰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몇 개 시도하지 않았는데도 금방 맞는 열쇠를 찾았다.
-운이 좋군.
철컥!
철문이 열리면서 적비연이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기이익, 쿠웅!
철커덕!
기관장치가 되어 있는 것인지 철문은 저절로 닫히더니 곧 잠겼다.
상관없다.
어차피 열쇠가 있으니.
그런데…….
‘여기 갇힌 자는 누구지?’
맞은편 벽에서 어둠에 묻힌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마침내 그곳에서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들어온 놈……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