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너는 누구냐
적비연이 흠칫거리고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거친 숨소리.
마치 인간이 아니라 짐승의 숨결 같다.
하지만 분명 조금 전에 들린 목소리는 사람이었다.
-내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공진철 같은 것에 구속되어 있는 걸지도.’
-그렇겠지. 내공은 느껴지지 않지만 존재감만큼은 대단한 놈이니.
극마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보통 인간은 아닌 모양이다.
혹시 하기룡일까?
하지만 빛 한 줌 들지 않는 뇌옥에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공으로 안력을 높인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빛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의 이야기니까.
‘철문을 닫아 버리니 정말 완벽한 암흑이네.’
-일단 내공부터 회복하는 게 어떠냐?
‘그래야지.’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자 맞은편 벽에서 버럭 고함 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말이 없느냐! 누구냐고 묻지 않았느냐!”
철커덩! 철커덩!
갑자기 요란한 금속성이 일어났다.
적비연이 흠칫거리고는 반사적으로 철문 쪽을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이 소란이 바깥까지 들릴까 봐 염려한 탓이다.
하긴 들려도 할 수 없다.
지금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차라리 무시하고 공보단을 복용해서 내공부터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공보단을 복용하고는 곧장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천상원에서 만든 공보단만큼의 효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내공이 차올랐다.
그런 와중에도 벽에서는 성난 고함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내 말이 말 같지 않느냐! 대답을 하란 말이다! 누구냐! 너는 누구냐! 대답을 해라! 대답을!”
-젠장, 더럽게 시끄럽네.
‘너도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해.’
-쳇!
극마가 혀를 차는데 마침 철문 밖에서 인기척에 이어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여기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뭐야? 이런 미친……!”
“열쇠를 가져오겠습니다!”
“서둘러라!”
곧 한 명의 발걸음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적비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육 할 정도는 회복했군.’
이 정도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애초에 무공 수위에 비하면 내공이 많은 편이었기에 부족한 양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철문 밖에는 다섯인가? 아니, 여섯? 열쇠를 가지러 간 자가 돌아오면 최소 일곱이네.’
물론 철문 바로 앞이 그럴 뿐, 통로마다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가득할지 알 수가 없다.
-제대로 외통수에 몰렸군.
극마의 말대로다.
여기서 이제 어떻게 빠져나간담?
그때 철문 밖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지금이라도 순순히 항복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허튼짓하지 말고 나와라!”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 같으면 여기까지 몰리지도 않았지.
자리에서 일어난 적비연이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벽을 바라보았다.
“대답해라. 너는 누구냐? 누구냐! 누구냐! 누구냐!”
‘흐음. 광인(狂人)인가?’
철그렁! 철커덕!
확실히 말투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정상 같지는 않다.
우선 확인을 해봐야겠지.
적비연이 홰를 들고 내공을 운기해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수법으로 불을 붙였다.
화르륵!
곧 뇌옥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크으윽!”
벽에 결박된 사내가 눈살을 와락 찌푸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백발이 치렁치렁 늘어진 사내.
역시 공진철로 사지가 구속되어 있었다.
‘누구지?’
적비연이 고개를 숙인 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크와아아!”
사내가 느닷없이 머리를 들어 올리더니 괴물처럼 포효하는 게 아닌가?
하마터면 깜짝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누구냐! 너는 누구냐! 누구냐! 나를 여기서 풀어줘! 내보내란 말이다! 나를 내보내! 누구냐! 누구냐!”
침을 튀어가며 소리치는 사내는 하기룡이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였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두 눈은 광기로 물들어 있었고, 으르렁거리는 표정은 마치 짐승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역시 미친놈이었군.
적비연도 극마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자임은 분명했다.
‘대체 이자가 누구기에 이렇게 갇혀 있는 거지?’
-사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녀석이 아닐까? 뭐, 아니면 마공을 익히다가 잘못된 걸 수도 있지.
‘확실한 건 결박을 풀어봐야 알겠군.’
-공진철에서 벗어나면 공력의 질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극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철문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이봐! 허튼짓하지 마라! 괜한 수작 부렸다간 후회하게 될 거다!”
후회라.
적비연이 백발 사내를 보며 물었다.
“여기서 풀어주면…… 날 좀 도와줄 수 있겠소?”
“날 풀어라! 날 풀어! 날 여기서 내보내란 말이다! 크아아아!”
철그덕! 철커덩!
사내가 다시 고막이 아플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이래서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뭘 재고 있느냐? 지금은 선택지가 없다!
극마의 재촉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내의 훈혈을 점했다.
탁탁탁!
백발 사내가 이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지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워낙 소리 지르며 날뛰는 상황이라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결박을 풀 수가 없었다.
적비연은 서둘러 공진철의 자물쇠를 열기 시작했다.
먼저 발목을 모두 풀어내고 손목을 풀자 벽에 매달려 있던 사내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흐음. 이제 저놈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이 미친개를 풀어줘야겠군.
그럴 계획이다.
지금으로서는 이자에게 모든 기대를 걸어야 한다.
극마도 그 존재감을 인정할 정도로…….
“음?”
적비연이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툭, 투둑……!
쓰러져 있던 백발 사내의 몸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움찔거리는 게 아닌가?
‘설마……?’
툭……! 투둑……! 툭!
극마도 미간을 좁히고는 백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저놈…… 스스로 혈을 푸는 건가?
‘그럴 리가.’
적비연이 얼른 다가가 백발 사내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파박!
“헉! 커억!”
쓰러져 있던 백발 사내가 벼락같이 일어나면서 적비연의 목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그대로 적비연을 벽까지 밀어붙인 사내가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네놈은 누구냐! 누구냐!”
“크윽……!”
적비연이 얼른 손을 뻗어 백발 사내의 마혈을 짚었다.
팍팍! 팍!
“으음?”
하지만 백발 사내는 눈살을 슬쩍 찌푸릴 뿐 반응조차 없다.
‘이럴 수가……! 뭔 내공이 이렇게나……!’
“커억!”
목을 조이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대로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다.
“누구냐? 천 쪼가리 덮어쓴 그 얼굴이 궁금하구나.”
백발 광인이 손을 뻗어서 복면을 벗기려는 순간,
철컹!
“노옴! 꼼짝 마라!”
철문이 열리면서 횃불을 든 무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네놈 정체가 뭐……!”
앞장섰던 무인이 소리치다가 이내 입을 딱 벌렸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무인들도 저마다 경악한 표정으로 백발 광인과 적비연을 보았다.
“제, 제기랄……!”
“저 괴물이……!”
무인들이 아연실색하는데, 백발 광인이 눈을 희번덕이며 돌아섰다.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비연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듯 히죽 웃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너희들은 누구냐? 누구냐? 누구냐?”
“이런 젠장! 쳐라!”
수장의 명령에 무인들이 저마다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여업!”
“크하하하! 하찮은 벌레들이구나!”
퍽! 퍽! 콰앙!
정말이지 괴물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움직임이었다.
횃불에 비친 백발 광인이 여기저기에서 번쩍번쩍 나타났다.
그때마다 무인들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크악!”
“으아악!”
신체가 도검불침(刀劍不侵)이라도 되는 건지 행보에 거침이 없었다.
아니, 실제로 무인들이 휘두르는 검신은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신위!
뇌옥 안에 들어온 무인들을 순식간에 처리한 백발 광인이 철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흐이익!”
철문으로 모여들었던 무인들이 헛바람을 삼키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백발 광인이 히죽 입매를 치켜 올리더니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이놈들! 천벌이다! 천벌! 천벌을 받아라! 으하하!”
퍽! 퍽! 콰당! 콱!
“크아악!”
“아악!”
연신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잠시 후 바닥에 쓰러졌던 적비연이 목을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제길, 이번에야말로 죽는 줄 알았어.”
-죽어도 환생하니 상관없지 않냐?
‘그렇지만 내 정체가 발각되겠지. 그럼 임무고 나발이고 다 끝나는 거야.’
-하긴. 그나저나 저놈 정체가 뭔지 궁금하군. 저런 놈은 처음이다. 상당한 놈이다.
극마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면 초절정의 극에 달한 건가?’
-아마도.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아니면 그 이하이거나.
‘뭔 말이 그래?’
-아무튼 저놈 이상한 놈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뭐, 어쨌거나 이걸로 여길 벗어날 수는 있겠네.’
적비연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탁!
누군가 발목을 잡았다.
시선을 내리니 앞서 문을 열고 들어온 수장이 피투성이가 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네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실수한 거다……! 네놈은…… 크윽! 쿨럭, 쿨럭! 저 괴물을…….”
힘겹게 말을 뱉던 사내는 눈을 뜬 채로 절명하고 말았다.
적비연이 사내의 손에서 발을 빼내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실수든 뭐든 당신들이 날 쫓으니 어쩔 수가 없었잖아.”
* * *
“그럼 볼일은 끝났소?”
하천웅의 인피면구를 쓴 단휘가 최대한 무뚝뚝한 표정으로 목소리까지 변조해서 물었다.
하지만 내심은 떨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
한 번 보면 눈을 떼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여인.
하지만 흑천련주의 이 제자라는 무시무시한 신분!
그 여인이 단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였다.
은하란 이후로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본 건 처음이었다.
사예린이라는 본명까지 밝힌 이 여인은 객점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만검세가주를 찾는다고 했다.
이에 만일의 사태를 준비하고 있던 단휘가 인피면구를 쓴 채로 그녀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찾은 이유가…….
‘고작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라니!’
단휘가 최대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사예린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사예린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당신이 만검세가주라. 생각보단…….”
“생각보단?”
“훗. 아니. 아무것도.”
뭐, 뭐야? 기분 나쁘게!
단휘가 내심 발끈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어쨌거나 적비연이 부재중인 지금, 이 여자를 조금이라도 빨리 돌려보내야 한다.
사예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사절단 일행을 훑어보았다.
현청과 임송화, 그리고 예홍이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사예린이 한쪽 입매를 치켜 올리더니 어딘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한 명이 없네?”
단휘가 흠칫거렸다.
‘제길. 역시 눈치챘나?’
그나저나 이 여자, 아까부터 슬쩍 반말을 하는 것 같다.
가주님 같았으면 어떻게 대했을까?
끝까지 하오체를 썼을까?
절대 아니지.
단휘가 한껏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나보고 싶다고 한 건 내가 아니었나?”
오, 지금은 스스로 생각해도 가주님 같았다.
사예린이 단휘를 돌아보았다.
“그렇긴 한데…… 보이지 않는 한 명도 궁금하네.”
“그 녀석은 지금 기녀를 불러서 한 바탕 즐기고 있는 중이라서.”
마침 이곳 서호객점(西湖客店)은 바로 옆 건물인 서호루(西湖樓)를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사절단으로 온 첫날밤부터 기녀를 부른다라.”
“그 녀석이 꽤나 밝히는 놈이라서.”
젠장, 내 입으로 날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다니.
사예린이 단휘를 빤히 보며 대꾸했다.
“그 밝히는 남자, 얼굴 한번 보고 싶네. 방이 어디지?”
“……!”
이런 말도 안 통하는 여자라니!
기녀를 불러서 그 짓을 하고 있다잖아!
하지만 사예린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다.
정말이지 단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아, 가주님.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