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천벌
“서호객점 삼 층.”
천리경을 접은 여인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남자가 물 건너편 불빛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모두 무사한가 보오.”
“사절단이니 흑천련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겠죠.”
“하긴. 그도 그렇겠지. 그나저나 몸은 좀 어떻소?”
남자가 여인을 돌아보았다.
여인의 왼팔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바로 동추추의 여동생이자 장강의 거머리로 불리는 동소유였다.
그리고 지금은 녹림미검 미계수의 정인으로서 옆에 서 있었다.
“괜찮아요. 약을 복용하고 있으니까.”
초절정에 이른 무공 고수일지라도 통증이 없는 건 아니다.
팔 하나를 싹둑 잘라냈으니 내공 운기만으로는 치유가 어렵다.
게다가 내내 물속을 들락거렸으니 상처 부위가 아물 여가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곧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수로채를 떠나면서 챙겨온 상비약들 때문이다.
수로채에서 사용하는 약들은 방수에 특화된 것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금창약도 방수 효과가 더해져 있었다.
게다가 그 냉혈한처럼 느껴졌던 수황 무자강이 녹림미검을 통해서 영단 몇 가지를 챙겨 보냈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남자다.
수로채를 떠난다고 할 때는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녹림미검에게 영단까지 챙겨 보낼 줄이야.
영단은 대체로 진통 효과와 소염 효과가 있는 것들이었다.
덕분에 상처가 아무는 속도도 빨라졌다.
동소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단 당신이 걱정이에요. 한 달에 한 번씩 해독침을 맞아야 하잖아요? 정말 그 인간은 용서할 수가 없어요.”
“미안하오. 괜히 나 때문에 그자를 죽일 수도 없게 됐으니. 녹림괴의(綠林怪醫)조차도 그자가 놓은 사활침의 해법을 모르겠다고 하니…….”
녹림괴의는 녹림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난 의원이었다.
정통 의학보다는 사술에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녹림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자였다.
동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어떻게든 저자에게 당신을 치료하게 하고 그 후에 죽여 버릴 거니까요. 그때까진 잘 지켜봐야죠.”
미계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힘이 되려고 왔다가 오히려 짐이 되었구려.”
“가가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힘이 돼요.”
“그리 생각해 줘서 고맙소.”
“그런데…… 그날 정말 기루에 간 건 임무 때문인 거죠?”
“맹세코 그렇소.”
“믿을게요.”
동소유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반면 미계수는 내심 억울한 심정이었다.
‘자기는 다른 남자랑 그 짓도 했으면서.’
하지만 이런 얘기를 꺼냈다간 본전도 찾지 못하리라.
한편 동소유는 다시 표독스럽게 변한 얼굴로 서호객점을 노려보았다.
“만검세가주……!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겠어!”
* * *
서호 북측 기슭에 위치한 보석산(寶石山).
왼편으로는 북송 시대에 세워진 보숙탑(保俶塔)이 보이는 바위 절벽에 한 사내가 홀로 술병을 들고 있었다.
흑룡대주 반철룡이었다.
그는 이 바위 절벽을 자주 찾았다.
밤에는 사람도 드물뿐더러,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서호의 야경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마침 흑천련 본단 쪽에서 북소리가 둥둥 울려왔다.
‘무슨 일이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던 그가 곧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만두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나설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게다가 모처럼 휴식이었다.
사절단 안내 임무를 이제 막 끝마치고 겨우 얻은 잠깐의 휴식.
몸도 마음도 피곤한 지금 굳이 제 발로 찾아가 짐을 짊어질 필요는 없으리라.
이 기회에 애들도 좀 쉬게 해주고.
‘그래, 한 번쯤은 모른 척도 하자.’
만약 정말 급한 일이라면 수하 중 누군가가 찾아오리라.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흑룡대가 아니더라도 본단에는 날고 기는 고수들이 즐비하니.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지은 그가 다시 서호로 시선을 던졌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문득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니 여추백이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저만치 아래쪽에 서 있었다.
“그만 내려가시죠?”
“련에서 부른 것이냐?”
“아직 아닙니다.”
“그럼 네가 와라.”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여추백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손에 뭔가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닥에 툭 내려둔 여추백이 씨익 웃었다.
“안주가 있어야죠, 안주가. 그렇게 병나발만 불면 내일 아침에 머리 아프다고요.”
물론 농담이었다.
반철룡 정도 되는 고수라면 취기 정도는 내공으로 쉽게 몰아낼 수 있을 테니.
반철룡이 피식 웃고는 여추백이 가져온 나무 쟁반을 보았다.
“대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동파육(东坡肉)입니다. 흐흐. 예쁘죠?”
확실히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쟁반 덮개를 열자 양념에 절인 돼지고기의 풍미가 코를 자극했다.
동파육 한 점을 입에 넣은 반철룡이 서호를 보며 물었다.
“너는 내가 왜 동파육을 좋아하는지 아느냐?”
“맛있으니까요.”
여추백이 돼지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반철룡이 픽 웃었다.
“동파육은 저기 보이는 제방을 쌓을 때, 소동파 태수가 인부들을 위해 만든 돼지고기 요리라고 한다.”
“쩝쩝. 그런데요?”
“한마디로 이 동파육에는 철학이 있다는 소리지.”
“그래서 좋아하시는 거군요.”
여추백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부지런히 동파육을 먹으며 대꾸했다.
문득 반철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춤에서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마치 이대로 저기 보이는 서호를 베어 버리겠다는 듯 비장한 눈빛마저 보였다.
한입 가득 넣고 있던 동파육을 겨우 삼킨 여추백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철룡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대주님. 제가 너무 많이 먹어서 화나신 건 아니죠?”
“추백아.”
“예, 대주님.”
“네 검에는 어떤 철학이 담겨 있느냐?”
“예?”
“네 검에 담긴 철학은 무엇이냐고 묻는 거다.”
“글쎄요…… 뭐랄까? 고기 먹다가 갑자기 어려운 소리 하지 말기? 뭐 그런 철학 같은 건 방금 막 생긴 것 같습니다만.”
“싱거운 놈.”
여추백의 농담에도 반철룡은 내내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여추백도 더 이상 실없는 소리는 던지지 않았다.
“네가 보기에 무림맹 사절단이 어떻더냐?”
“흐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강인해 보였습니다.”
“동감이다.”
“뭐랄까? 실력에 비해서도 왠지 더 뛰어나 보이더군요.”
“바로 그거다. 그 사절단 대표라는 만검세가주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다른 자들도 모두 뛰어나 보였지.”
“혹시 그게…… 검에 담긴 철학과 관련이 있단 소리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닌 것 같으냐?”
반철룡이 여추백을 돌아보았다.
여추백이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검에 담긴 철학이라. 그게 무슨 소용이죠? 어차피 검은 찌르고 베는 용도 아닙니까?”
스르릉.
여추백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달빛에 비춰 보았다.
시리게 빛나는 검.
언뜻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검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을까?
타인에게 고통만을 안기는 도구에 철학이 담길 수 있을까?
여추백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대주님은 생각이 너무 많으십니다. 그리고 그건 너무…….”
“정파 같단 말을 하려는 것이냐?”
“사실 그렇잖아요.”
“그럼 사파는 생각이 없는 인간들이냐?”
“그건 아니지만…… 쉽게 말해서 쓸데없는 생각을 덜 하는 거죠. 좀 더 효율적이랄까요?”
반철룡이 피식 웃었다.
“교 선생이 내일 무림맹으로 가신다더구나.”
“들었습니다.”
“내가 흑천련으로 들어온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을 테지.”
“알지요. 교 선생이시잖아요.”
반철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던 시절.
길거리에서 쓰레기통이나 뒤지며 하루하루 근근이 명줄을 이어가던 어린 시절.
그때 교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반철룡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추백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때 대주님은 질색하셨다면서요? 절대 사파의 무인이 될 수는 없다고.”
“그랬지. 나는 정도를 가고 싶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참 대주님도 고리타분하다니까요. 그런 대주님을 설득하신 교 선생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고요.”
“그분이 날 무슨 말로 설득했는지 아느냐?”
“뭐였습니까?”
반철룡이 뽑아 든 검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짐짓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에 너만의 철학을 담아라. 무인의 가치는 정공이나 사공으로 가를 수 없다. 네가 휘두르는 검에 담긴 철학이 무엇이냐가 너의 가치와 수준을 결정한다.”
“…….”
어딘지 울림이 있는 목소리에 여추백도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후 여추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교 선생은 어려운 말만 골라서 하신다니까요.”
피식.
반철룡이 결국 웃어버렸다.
그래, 어쩌면 저놈의 철학은 바로 저런 모습인지도 모른다.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그래서 망설임 없이 검을 뽑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고.
하지만…….
‘역시 그들은 강했다. 특히 만검세가주는…….’
서른도 되지 않은 자들이었다.
한데 불혹을 넘긴 자신보다 훨씬 강인한 면모를 보였다.
한데 만검세가주의 말에 따르면 그와 같은 나이인 벽력적가주가 훨씬 뛰어나다고 했다.
정파 녀석들은 언제나 말만 번지르르하고 약골뿐이라고 생각했건만.
그 젊은 나이에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르다니!
도대체 적비연이라는 자는 얼마나 강한 건가?
그것이 어쩌면 교 선생이 말한 검에 담긴 철학과 관련된 건 아닐까?
하아, 모르겠다.
그래,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이니 술과 안주나 즐기면서…….
“음? 동파육 다 어디 갔냐?”
“우물우물…… 쩝쩝…… 그러게요? 벌써 없네요. 쩝쩝…….”
따악!
“아얏! 너무하시잖습니까!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가서 다시 사 와.”
“와아, 세상에 이런 갑질이라니! 저보고 이 산을 또 내려갔다가 올라오라고요?”
“맞고 다녀올래? 그냥 다녀올래?”
“그냥 다녀옵니다!”
“뛰어라. 올 때 술 한 병 더 가져오고. 아니, 두 병.”
여추백이 씨근거리며 일어났다.
“제 철학은 지위를 두고 갑질하지 말자는 겁니다!”
말을 마친 그가 후다닥 달려 내려갔다.
“너 이리 안 와?”
반철룡이 따라가려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웃어넘겼다.
하여튼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바위 절벽에 걸터앉은 반철룡이 눈을 지그시 감고 밤바람을 느꼈다.
그때,
부스럭…… 부스럭!
“음? 뭐냐? 생각해 보니 역시 맞고 가는 게 예의인 것 같냐?”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반철룡은 다음 순간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당신……!”
파밧!
반철룡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백발이 치렁치렁 늘어진 나이 지긋한 사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득였다.
“너는 누구냐? 누구냐?”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반철룡의 시선이 백발 광인을 훑었다.
전신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피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피.
아마도 흑천련 무인들이리라.
‘아까 그 북소리는 이자 때문이었던가?’
떨린다.
정말이지 살이 떨리고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곤두선다.
강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존재감.
맹수 앞에 선 먹이가 된 기분이다.
‘선공을 당해선 안 된다. 그럼 끝장이다.’
생각을 굳힌 반철룡이 일순 기를 발출하며 바닥을 찼다.
팟!
“흐아앗!”
“노옴! 천벌을 받아라! 천벌이다!”
백발 광인이 광분을 터뜨리며 마주 부딪쳐 왔다.
꽈앙!
천지가 격동하는 듯 큰 울림이 터져 나왔다.
주변의 숲이 통째로 흔들렸다.
같은 시각, 보석산을 내려가던 여추백이 흠칫거리고는 바위 절벽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 예, 뛰어갑니다. 뛰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