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11화 (112/301)

111. 다시 흑천련으로

다음 날 아침, 교패는 약조한 대로 서호객점을 찾아왔다.

그의 곁에는 흑룡부대주 여추백과 삼 공자 종권악도 함께였다.

“바로 떠날 건가?”

“그럴 거요.”

교패의 물음에 적비연이 대답했다.

사실 더 머물고 싶어도 마땅한 명분도 없었다.

오히려 목적을 다 이뤘음에도 계속 머물겠다고 하면 괜한 오해나 의심만 살 터.

교패가 죽립을 눌러쓰며 말했다.

“가세.”

“그럽시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추백이 앞장 섰다.

“항구까지 안내하겠소.”

그러자 종권악이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잠깐!”

“뭐지?”

“교 선생이 약조를 지키면 사활침을 풀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날 보고도 모른 척하는 거지?”

종권악이 씨근거리며 소리쳤다.

적비연이 교패와 종권악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교 선생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긴 아직 당신들 구역이지 않소? 교 선생이 배에 승선할 때까지는 참으시오.”

“이익……!”

종권악이 내심 발끈했지만 더 이상 따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패를 쥔 건 적비연이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종권악이 입을 다물자 걸음을 옮기던 적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반 대주가 보이지 않는군.”

“그러게요. 마지막 날이라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데. 바쁜가 봐요?”

임송화가 말을 받았다.

뜻밖에도 여추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대주님은…… 현재 몸이 좋지 않으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적비연의 물음에 여추백이 곧장 대답하지 않고 교패의 눈치를 살폈다.

교패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뜻을 알아들은 여추백이 핵심은 제외하고 말했다.

“간밤에 련 내에 일이 있었소.”

“일이라면……?”

그러자 종권악이 차갑게 말을 뱉었다.

“흥! 본 련의 일이다. 네가 알 필요가 없다.”

생사결 이후로 종권악은 내내 적비연에게 적개심이 가득한 상태였다.

임송화가 내심 혀를 찼다.

‘으휴, 저 밴댕이 소갈딱지.’

어느 집안이나 속 썩이는 자식 하나쯤은 반드시 있다더니.

그 무시무시한 흑천련주에게도 저런 애송이 제자가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삼 제자가 망나니 기질이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직접 보니 더 실망스러웠다.

그에 비하면 어제 그 이 제자는…….

‘으으.’

임송화가 괜히 팔뚝을 쓰다듬으며 몸서리를 쳤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그토록 섬뜩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정말이지 그 깊은 눈을 마주 보고 있노라면 완전히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임송화가 적비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혹시 어제 련 내에 잠입하셨을 때 반 대주를 만나신 건가요?]

[아니오.]

[그럼 그 백발 광인을 잡으려다가 반 대주가 당한 건 아닐까요?]

[나도 모르겠소.]

적비연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백발 광인이 뇌옥을 벗어난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렇다고 지금 와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기도 애매하다.

종권악이 대놓고 신경 끄라는 말을 했으니.

한편 여추백은 항구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임무라서 어쩔 수 없이 사절단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련 내 상설의원인 의성각(醫聖閣)에 머물러 있었다.

‘제길. 그때 내가 돌아갔어야 하는 건데!’

생각할수록 어제 일이 후회된다.

‘그때 돌아갔더라면……!’

내려오던 길에 바위 절벽에서 들린 소음을 가볍게 넘긴 게 실수였다.

동파육을 사 들고 바위 절벽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참사가 벌어진 후였다.

피투성이가 된 반철룡은 의식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었고, 주변은 온통 난잡한 칼부림 흔적으로 가득했다.

보아하니 상대는 무기도 없는 듯했다.

전부 반철룡의 흔적이었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흉수는 이미 달아난 것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반철룡을 들쳐 업고는 곧장 의성각까지 내달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의성각주는 반철룡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교 선생을 찾아갔다.

누구보다 교 선생을 존경했던 반철룡이었으니까 그라면 한 번쯤 몸을 살펴봐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의성각으로 친히 찾아와주었다.

하지만 무림맹 신의에 버금간다는 그조차도 반철룡의 상태를 살피고는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부상이 너무 깊은 탓이었다.

나중에서야 흉수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봉무각 지하 뇌옥에 갇혀 있던 광인.

하지만 그 광인이 어떻게 뇌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흑천련이 모든 것을 기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대주님……!’

여추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살뜰히 챙겨주신 분이었다.

고아였던 자신에게 있어서 반철룡은 때론 아버지 같았고, 때론 친형 같은 존재였다.

과연 그 광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자신이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대주님…… 그것 보십시오. 검에 철학을 담을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요. 검은 그저…… 상대를 해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내가 당하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일행은 어느덧 항구에 다다랐다.

잠깐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항구라니.

생각보다 꽤나 오랫동안 감상에 젖어 있었나 보다.

바다 내음과 생선비린내가 곳곳에서 풍겨온다.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부둣가.

이걸로 자신의 임무는 끝이다.

여기서부터는 사절단이 알아서 찾아가리라.

“그럼 살펴가시오.”

“고맙소. 그간 고생하셨소.”

적비연을 비롯한 사절단이 가볍게 답례했다.

여추백은 교패에게도 다가가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돌아갔다.

적비연은 주변을 훑어보다가 붉은 바구니를 거꾸로 쌓아둔 생선 장수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손님. 어서 오십시오. 오늘은 오징어가 특히 싱싱합니다요.”

한데 적비연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

“귀한 용정차(龍井茶)를 드릴 테니, 구운 생선포를 내오시오.”

순간 멈칫한 생선 장수가 적비연을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얼마나 드리면 될깝쇼?”

“여섯.”

“따라오시지요.”

생선 장수의 눈빛이 변하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접선자와 약속된 암어였던 것이다.

항주 특산품인 용정차는 교패를 두고 한 말이었고, 생선포는 배를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이라는 것은 배에 올라탈 사람의 인원수였다.

생선 장수는 번잡한 거리를 벗어나 부둣가에 세워진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작은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

생선 장수가 먼저 말없이 올랐고, 사절단원들과 교패가 올라탔다.

이제 부두에는 적비연과 종권악만 남아 있었다.

적비연이 종권악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약속을 지켜주지.”

“언젠간 내가 네놈의 목을 따버리겠다.”

종권악이 적비연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헤어지는 마당에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자고.”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종권악의 몸에 사활침을 놓아주었다.

혹시라도 교패가 엿볼 것을 의식해 일부러 거짓 침술을 섞었다.

사실 엿본다고 해도 정확한 깊이와 각도 그리고 침의 종류를 알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겠지만 만약을 대비한 것이다.

적비연이 침을 놓고 나자 종권악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강호는 넓지만 원수는 항시 가까운 법이니.”

“충고 고맙군. 그럼 잘 지내라고.”

적비연이 빈정거리듯 웃으며 몸을 훌쩍 날렸다.

그가 배에 오르자 생선 장수가 나룻배를 저으며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부둣가 창고 지붕 위에 있던 동소유가 천리경을 내렸다.

“떠났어요.”

“흐음. 이제 어쩌지요?”

미계수가 착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동소유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장강이 아니어도 바다 역시 물이에요. 물에서라면 절대 놓치지 않아요. 그보다 저들이 정말로 이대로 떠나는 건지는 두고 봐야 알죠.”

“이대로 안 떠날 수도 있단 거요?”

“글쎄요. 두고 봐야겠죠. 다만…… 왠지 이대로 돌아갈 것 같진 않아요.”

“어째서 그렇소?”

“으음.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여자의 직감이랄까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직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그럴 때마다 잘 맞아 들어갔다.

“어쨌든 너무 걱정 마요. 한 달 뒤에 당신이 죽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까.”

“소저…….”

미계수가 감동한 눈빛으로 동소유를 빤히 보았다.

동소유가 짐짓 얼굴을 붉히면서 모른 체했다.

“일단 작은 배라도 구해야겠어요. 정말 이대로 광동성까지 간다면 놓칠 순 없으니까요.”

“아, 그럽시다.”

두 사람이 창고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 * *

동소유의 직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선박.

그 선실에서는 은밀한 밀담이 오가고 있었다.

밀담을 나누는 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바로 무림오절 중 한 사람인 염능파였다.

그가 적비연을 보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하면 그 백발 광인의 정체는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건가?”

“그렇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사실 아주 낯설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아상이나 그 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본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은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염능파가 침음을 흘렸다.

“백발 광인이라…… 나 역시 인상착의만 들어서는 누군지 알 수가 없군. 어쨌든 고생이 많았네.”

“별말씀을요. 형님을 찾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뭐, 사실 그렇게까지 아쉽진 않지만.

염능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일세. 장사소룡 대신 백발 광인이라. 허참…… 일단 내가 본단으로 돌아가는 대로 맹주님과 총군사께 이 사실을 보고하겠네.”

“감사합니다. 교패는 어떻습니까?”

“아직 한마디도 안 하고 있네. 신병을 확보했다지만 흑천사왕인 만큼 방심할 수 없는 자이니 공진철을 사용해서 최하층에 결박해 두었네.”

“그렇군요.”

적비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만한 무림 고수를 그런 식으로 대한다는 건 예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으리라.

염능파가 무림오절이라고는 하지만 흑천사왕인 교패의 상대가 되진 않는다.

무림오절은 어디까지나 무림맹 내에서만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자들이니까.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은 문파들까지 합하면 다섯 손가락으로는 부족한 게 사실이다.

“저희들 신원은 준비됐습니까?”

적비연의 질문에 염능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임무를 마치자마자 다시 또 이런 일을 맡기게 되는군.”

“임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이죠.”

염능파가 품에서 인피면구 여러 장과 서지를 꺼내더니 적비연과 사절단원들에게 각각 나눠주었다.

“거기 적혀 있는 게 각자가 맡을 신분일세. 인피면구도 넉넉히 준비했네. 천상원에서 만든 인피면구가 정말 정교하기 짝이 없더군. 인피면구를 전해 받고 나서 새삼 놀랐다네.”

“이게 다 벽력적가주님 덕분이죠. 그분은 정말 위대하신 분입니다.”

적비연의 말에 단휘가 입을 딱 벌렸다.

‘어쩌면 저렇게 지 자랑을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배우고 싶다!’

염능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일세. 벽력적가주를 한 번 만나고 싶군.”

“혹시라도 임무 도중 만나게 되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게나. 그리고 이쪽도 준비는 끝났네.”

염능파가 문 쪽을 돌아보았다.

“들어오너라.”

그러자 선실 문이 열리더니 다섯 남녀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들은 적비연을 비롯한 사절단원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외모도 흠잡을 데 없이 닮은 데다 입고 있는 옷까지 똑같았다.

사실 그 옷들은 사절단원들이 입었던 것을 벗어준 것들이기도 했다.

단휘가 감탄했다.

“와아, 이 정도면 정말 감쪽같군요. 내가 나를 보고 있으니 기분 묘하네요.”

“앞으로 이들은 자네들을 대신해서 광주로 갈 걸세. 거기서도 각자의 사문까지 귀가하게 될 걸세.”

강호에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속이지 않는다면 시도하지 않는 게 낫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해 보입니다. 꼼꼼하게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 전부 총군사님의 혜안이시지.”

그랬다.

이 계책을 짠 사람 역시 총군사 가후였다.

“이제 자네들 차례네.”

염능파의 말에 적비연을 비롯한 사절단원들이 저마다 인피면구를 덮어 썼다.

잠시 후 그들은 전혀 다른 외모가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감쪽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또한 천상원에 있는 다면선사가 만든 것이었으니까.

이제 다섯 사람은 각자 작은 배를 타고 다시 항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위장된 신분으로 흑천련으로 스며들 것이다.

염능파가 다섯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운을 빌겠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그럼 다시 가볼까? 흑천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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