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12화 (113/301)

112. 또 만났네

철썩!

커다란 선박 아래로 작은 배 한 척이 내려섰다.

마지막 다섯 번째 배였다.

사뿐!

그 배 위로 적비연이 가볍게 뛰어내렸다.

“갑시다.”

적비연이 말을 뱉자 다섯 척의 배가 선박과 멀어지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뱃머리에 선 염능파가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절단원이었던 다섯 무인이 이제는 특임대원이라는 이름으로 불안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가 조용히 뇌까렸다.

“모두들 무운을 빌겠네.”

한편 한동안 바다를 가로지르며 나란히 가던 다섯 척의 나룻배가 어느 순간 망망대해에 멈춰 섰다.

이제 각자가 맡은 방향으로 가야 할 순간이었다.

특임대원 다섯 명이 각각 맡은 신분이 모두 다르다.

그런 만큼 목적지 또한 다르다.

그들의 임무는 하기룡이 납치된 장소를 알아내고 그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간 실종되거나 흑천련에 포로로 사로잡혀 감금된 무림맹 고수들을 구출하는 임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현청이 모두를 향해 포권하며 작별을 고했다.

“모두들 무운을 빌겠습니다. 반드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길 바랍니다.”

“당연하죠. 전 반드시 살아남아서 맹에서 약속한 혜택을 모두 받을 거예요. 아마 조만간 임무 중에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고요.”

임송화에 이어 단휘도 인사를 건넸다.

“물론입니다. 곧 다시 뵙게 될 겁니다. 그때까진 모두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모두의시선이 적비연과 예홍에게 향했다.

예홍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내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주님 곁으로 이장시켜…….”

“커흠! 이 친구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건너뛰고 특임대주를 맡으신 하 가주님의 말씀을 듣죠.”

단휘의 말에 예홍이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단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고는 말했다.

“이제 정말 어려운 임무가 될 수 있소. 다들 마지막까지 긴장 놓지 말고 잘 해냅시다.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것 같으니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그럼요. 금방 다시 볼 거예요. 우린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이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임송화가 밝게 웃으며 적비연을 향해 노골적으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적비연이 모른 척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각자 접선자를 찾아 갑시다. 모두 무운을 빌겠소.”

“무운을 빌겠습니다!”

다섯 특임대원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이후 다섯 척의 나룻배는 잔잔한 파도를 헤치며 각각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적비연 역시 배를 타고 항주 항구로 향했다.

특임대원들은 이제 각자에게 배정된 접선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접선자들은 미리 준비된 계책에 따라 특임대원들이 흑천련에서 적응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환경을 만들어줄 터였다.

물론 접선자들은 자신이 만나는 특임대원 이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특임대가 몇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조차 모른다.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적비연이 만날 접선자는 항주 부둣가에서 생선을 팔던 그 생선 장수였다.

물론 그와 다시 만날 장소는 같은 부둣가가 아니다.

그보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온 지역에서 접선하기로 되어 있었다.

적비연은 품에서 서지를 꺼내 찬찬히 훑었다.

앞으로 자신이 맡을 신원에 대한 정보였다.

천혈대(天血隊) 삼 조(三組) 이상천(李湘川).

나이 삼십이 세.

가족관계는 해당 없음.

그 외에도 이상천의 평소 성격이라든지 습관 같은 것들이 무척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이럴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진짜 이상천을 무림맹에서 제거했거나, 애초에 무림맹에서 심어놓은 간자였거나.

거기까지는 적비연도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적비연은 이제 이상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뭐, 남의 몸으로도 잘 사는데, 그깟 남의 이름으로 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않냐?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지금처럼 타인의 몸에 혼이 깃든 경우는 그 기억과 능력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만큼 딱히 연기라고 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로 이상천이라는 인간을 연기해야 한다.

적비연은 신상 정보를 모두 암기한 다음 서지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추후 파도에 떠밀려 서지가 육지에서 발견될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먹물은 전부 지워지고 없을 테니까.

“그럼 서둘러 볼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적비연이 내공을 운기하자 배가 더욱 빠른 속도로 육지를 향해 달려갔다.

* * *

허름한 공용 창고 안.

창문이 뜯겨 나간 틈으로 달빛이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달빛이 닿는 곳에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데 그 미소가 어딘지 차갑다.

마치 달빛만큼이나 시리다.

언뜻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묘한 위화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차라라랑.

그녀가 초승달처럼 휜 다섯 개의 칼날을 부채처럼 펼치자 벌겋게 묻어 있던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랬다.

그녀는 바로 월희마녀 사예린이었다.

촤아악!

그녀가 부채처럼 펼친 흑월아를 한 차례 휘젓자 핏방울이 날카롭게 흩뿌려지며 바닥에 칼날 같은 자국을 만들었다.

그것만으로 흑월아는 씻은 듯 깨끗해졌다.

그녀가 흑월아를 부채처럼 살랑살랑 부치며 말했다.

“너, 생각보다 독종이었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벌거벗겨진 채 의자에 꽁꽁 묶여서 부들부들 떠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바로 사절단을 선박까지 안내해 준 그 생선 장수였다.

적비연의 접선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건 완벽했다.

생선을 팔 때도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고, 사절단을 선박에 데려다준 후에 돌아올 때는 다시 다른 인피면구를 착용했다.

물론 옷도 갈아입은 채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부두를 통해서 육지로 들어왔다.

그런데 꼬리를 밟힌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잘못된 것일까?

이들은 자신을 어떻게 찾아낸 것일까?

그렇다고 이렇게 굴복할 수는 없었다.

생선 장수가 덜덜 떠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나, 난…… 정말 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그저…… 돈 몇 푼을 받고…… 어느 노인이 시, 시키는 대로…… 쿨럭, 쿨럭! 쿠웨에엑!”

말을 마저 잇지 못한 생선 장수가 피를 한 바가지 정도 토해냈다.

그가 애처롭게 사예린을 올려다보았다.

움푹 들어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생선 장수의 몰골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몸 곳곳이 멍들고 찢어져 있었고, 손가락은 겨우 두 개만 남아 있었다.

그마저도 손톱이 모두 빠져 있어서 차마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지경이었다.

“제, 제발…… 이제 그만…… 날 죽여주십시오…….”

피식.

사예린이 웃었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이고는 생선 장수를 빤히 보았다.

“그거 알아?”

“……?”

“조금 전까지는 내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는 것.”

“…….”

“그런데 지금은 죽여 달라고 하네? 삶과 죽음에 대한 열망이 이처럼 짧은 시간에 변하다니. 인간이란 참 웃기지 않아?”

“정말…… 나, 나는…… 아무것도…… 흑……!”

생선 장수가 서럽도록 울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아……!”

사예린이 감탄한 표정으로 생선 장수를 보았다.

그녀가 홀린 듯 말했다.

“방금 달빛에 비친 당신의 그 눈물은…… 보석처럼 아름다웠어.”

“제발…… 이제 죽여주십시오!”

생선 장수는 정말이지 이 정신 나간 여인이 무서웠다.

차라리 빨리 죽어서 편안해지고 싶은 심정이 가득했다.

사예린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쩌죠?”

그러자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스르르 다가왔다.

방갓을 깊이 눌러쓴 사내였다.

그가 사예린에게 서지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사용해 보시지요.”

“아, 이거 좋네요.”

사예린이 눈을 반짝이고는 싱긋 웃었다.

생선 장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여덟 개를 잃었고, 손톱은 전부 뽑혀나갔다.

각 요혈을 고문당하고 뼈마디가 부러졌다.

이들이 자신에게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한들 굴복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사예린의 목소리에 생선 장수는 흠칫거리고 말았다.

“조미령(朝美玲) 사십삼 세. 정수련(正垂蓮). 열일곱 살. 호무관(虎武館) 사 년 차. 정차련(正次蓮). 열두 살…….”

“잠, 잠깐…….”

“음? 왜?”

“아, 아내와 아이들은 아, 아무 상관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당신 생각이고.”

“이런 악랄한! 아니, 내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정말로 저는 아무것도…….”

“그게 당신 죄야. 아무것도 모른 죄.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

“하, 하면 아내와 아이들은……?”

“당신 같은 남편, 당신 같은 아비를 둔 게 죄지.”

“어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소!”

“잘 가. 가족들도 곧 곁으로 보내줄 테니.”

촤르르륵!

사예린이 흑월아를 접었다.

그러자 생선 장수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알겠소! 모든 걸 다 말하겠소! 그러니 아내와 아이들은 제발 건드리지 말아주시오!”

“흐음. 그럼 어디 들어볼까?”

생선 장수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이 아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사예린이 방갓 사내를 돌아보았다.

방갓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예린이 그제야 만족한 듯 생선 장수를 보았다.

“좋아.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지.”

“하, 하면 내 가족도…….”

“걱정 마. 건드리지 않을 테니. 귀찮은 건 딱 질색이거든.”

“고, 고맙소.”

“하지만…… 네 소원은 들어줘야지?”

“무슨……!”

쉬컥!

순간 흑월아 한 자루가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순식간에 생선 장수의 목을 그어 버렸다.

이내 생선 장수의 머리가 툭 떨어졌다.

츄아아아아!

잘린 목의 단면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지면서 달빛을 무수히 쪼갰다.

사예린이 빙긋 웃었다.

“죽여 달라며?”

* * *

촤아아.

나룻배가 바닷물에 떠밀리며 모래 언덕 위로 올라섰다.

적비연은 배에서 뛰어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쯤 어디일 텐데.’

그가 해변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마침 저만치 오두막집이 보였다.

창가로 불빛이 흘러나왔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깜빡였다.

약속된 신호였다.

‘저기구나.’

오두막집으로 다가간 적비연이 문을 두드리고는 소리쳤다.

“계십니까? 늦은 밤길을 잃었는데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오두막집 안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잃었으면 달빛을 따라 걸으시오.”

“구름이 달을 가려 파도 소리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하면 들어오시오.”

적비연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순간 방 안을 밝히고 있던 등불이 훅 꺼졌다.

찰나,

-조심해라!

극마의 외침과 함께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날아들었다.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순간,

쩌어어엉!

불꽃과 함께 양손으로 칼을 내려친 여인의 얼굴이 일순 확 드러났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흩어져 떠오르고 어딘지 희열에 찬 미소를 짓는 여인.

사예린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적비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째서 이 여자가……?’

사예린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또 만났네. 만검세가주.”

“……!”

흠칫거리는 사이 등 뒤에서 날카로운 도명이 들려왔다.

퀴리리리링!

-뒤다!

적비연이 순간 돌아서면서 검을 사선으로 후려쳤다.

따다앙!

배후를 노려오던 흑월아 두 자루가 동시에 양쪽으로 튕겨 나갔다.

콰콰아앙!

두 자루의 칼날이 벽에 부딪치자 마치 포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오두막집이 산산조각 나며 무너졌다.

파바바밧!

적비연이 떨어져 내리는 지붕 파편을 피하며 얼른 몸을 빼냈다.

촤아아앗!

모래사장 위에서 미끄러지다시피 멈춰 선 적비연이 사방을 둘러보고는 혀를 찼다.

‘제길, 일이 틀어졌군.’

-이거 위험한데.

극마도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흑의를 입은 자들이 어느새 사방을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사예린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그녀가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역시 그때도……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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