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또 만났네
사방을 에워싼 무인들의 기도가 만만치 않다.
작정을 하고 찾아온 모양이다.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시오?”
일단은 모른 척을 해봤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사예린이 풋 웃음을 짓더니 흑월아를 부채처럼 펼쳐 들고는 살랑살랑 저었다.
“웃자고 한 소리야?”
“영문을 모르겠소만.”
“인피면구를 쓴 건가? 꽤나 정교하네.”
“사람 잘못 보셨소.”
“피차 쓸데없이 말장난은 그만하지 그래?”
파앙!
순간 사예린이 바닥을 차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 바람에 모래먼지가 풀썩 일어나면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따앙!
간발의 차로 흑월아를 막아낸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검신이 그대로 허공을 베면서 모래사장을 내리그었다.
파팟!
적비연이 얼른 발을 차면서 모래를 흩뿌렸다.
언뜻 비겁해 보이는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 그런 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흥!”
코웃음을 친 사예린이 부채처럼 펼친 흑월아를 한 차례 내저었다.
후우우웅!
강렬한 바람이 불면서 그녀를 덮친 모래먼지가 말끔히 날아갔다.
곧이어 그녀가 다섯 자루의 흑월아를 모두 날렸다.
퀴퀴퀴리리링!
검은 칼날이 원반 모양을 만들면서 적비연을 향해 다섯 방향에서 쇄도해왔다.
“칫!”
적비연이 혀를 차며 발끝으로 바닥을 툭 찍었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휘리리리릭!
따다다다당!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면서 흑월아를 모두 쳐냈다.
만검세가의 화룡만검법의 초식, 선풍만엽이었다.
이번만큼은 초식을 쓰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촤아악!
다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미끄러지듯 멈춰 선 적비연이 사예린을 노려보았다.
초식을 보여 버렸다.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결국 적비연이 한숨을 탁 내쉬고는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뭘 어떻게 알아? 딱 봐도 너니까 알지.”
사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과연 흑천련주의 이 제자라는 건가?
적비연이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분명한 건 사예린이 자신보다 무공 수위가 높다는 것이다.
그래도 내공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그녀와 손을 섞어본 결과 내공에서도 조금 밀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영약을 처먹은 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저 어린 나이에 쌓을 수 없는 공력이었다.
거기에 흑의 무인들을 이끄는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초절정을 넘어선 고수다.
굳이 따진다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절정고수가 모두 스무 명.
나머지는 하나같이 일류 이상이다.
진짜 어려운 상황.
‘이길 수 있을까?’
-못 이긴다.
극마가 단호한 어조로 고개를 저었다.
‘희망을 줘서 퍽이나 고맙군.’
-별말을.
적비연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극마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자신 역시 같은 생각이다.
이기기는커녕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
적비연이 심호흡을 하고는 물었다.
“접선자를 어떻게 찾았지?”
사실 딱히 궁금하진 않다.
그저 시간을 끌면서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하기 위해 질문한 것이다.
한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후후후. 똑똑한 사람이 어디 무림맹에만 있다더냐?”
부서진 오두막집 뒤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사람.
그는 바로 련주의 삼 제자 종권악이었다.
적비연이 종권악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미간을 슬쩍 구겼다.
바로 접선자인 생선 장수의 머리였다.
“그를 죽였군.”
“그럼 뭐가 예쁘다고 살려두겠느냐?”
말을 마친 종권악이 생선 장수의 머리를 휙 집어 던졌다.
툭, 데굴데굴.
모래사장에 떨어진 생선 장수의 머리가 적비연의 발치까지 굴러와 멈췄다.
종권악이 입매를 틀어 올렸다.
“그놈의 몸에 천리향(千里香)을 뿌려두었었지. 내가 뭐라고 했느냐? 강호는 넓지만 원수는 항시 가깝다고 하지 않았더냐?”
적비연이 검파를 콱 움켜쥐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그렇다면…….
-닥치고 선공이지!
파앗!
극마의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적비연이 바닥을 차며 쏘아져 나갔다.
“헛!”
깜짝 놀란 종권악이 검을 뽑아 들었다.
따아앙!
“크웃!”
양팔이 저릿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종권악이 신음을 터뜨린다.
불꽃이 일어나고 두 사람의 기운이 충돌하면서 기파가 터져 나가 모래먼지가 풀썩 일어난다.
“쳐라!”
흑의 무인들의 수장이 목청껏 소리치자 검은 인영들이 바람처럼 덮쳐온다.
파바바바밧!
시커먼 그림자가 하늘에 드리워지면서 검기가 폭사한다.
쉭쉭쉭쉭쉭!
수십 개의 칼날이 달빛을 무수히 쪼개며 떨어진다.
적비연이 다시 발끝으로 바닥을 툭 찍어 차면서 몸을 팽이처럼 회전했다.
휘리리릭!
따다다다다당!
촤악! 촥!
금속성 사이에서도 살을 베는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선풍만엽 초식이었다.
두어 명이 부상을 입고 모래바닥이 풀썩 쓰러진다.
적비연은 바닥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포탄처럼 튕기듯 날아갔다.
쒸에에엑!
“헉! 이 새끼가……!”
종권악이 눈을 부릅뜨고는 검을 수직으로 내려친다.
“내가 만만하냐!”
쩌엉!
다시 한번 종권악과 적비연의 검이 부딪치면서 기파가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큿!”
“웃!”
사방에서 덮쳐오던 무인들이 그 기파에 흠칫거리며 자세가 흐트러진다.
노린 건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신의 내력을 겨우 받아낼 수 있는 종권악을 이용해서 모두의 빈틈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 빈틈이 만들어진 지금 이 순간, 최대한 많은 인원을 제거한다!
파박!
쉬이이잇!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로 기를 한껏 발출한 적비연이 그대로 검을 곧게 내질렀다.
푸푸푸푹!
“크아악!”
“크헉!”
“우악!”
만검합일초식이다.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무려 네 사람의 몸을 꼬챙이처럼 꿰뚫어 버렸다.
“노오옴!”
다시 사방에서 검은 바람이 불어닥친다.
적비연은 그대로 몸을 뒤틀며 사선으로 검을 베어 올린다.
촤촤촤아악!
단 한 번의 검격이었음에도 두세 줄기의 검기가 위로 솟구친다.
그와 함께 모래바람이 광풍처럼 불기 시작한다.
후우우우웅!
“이익!”
흑의 무인들이 멈칫하는 사이 적비연은 그대로 한 바퀴 더 회전하면서 만초무검을 펼친다.
촤촤촤촤촤촥!
모래사장에서 검기가 마치 잡초처럼 자라나는 듯하다.
“크아악!”
“으아악!”
적비연에게 근접했던 예닐곱 명의 무인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진다.
하지만 독기가 오른 흑의 무인들은 그것만으로 주눅 들진 않았다.
그들은 동료의 몸을 밟고 넘어서며 그대로 적비연을 향해 파고들었다.
-좌측 후방!
극마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눕다시피 젖히면서 검을 쭉 뻗어냈다.
쩌엉!
놀랍게도 적비연의 검봉과 적의 검봉이 정확히 마주쳤다.
두 개의 검 끝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접하자,
콰콰콰콰앙!
요란한 소리가 일어나면서 흑의 무인이 든 검이 산산조각 깨져 나갔다.
푸욱!
검신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적비연의 검이 그대로 상대의 단전을 뚫었다.
“커억!”
비명과 함께 피를 주르륵 토해낸 적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찰나,
-뒤다!
극마의 외침에 적비연이 그대로 검을 뽑으면서 횡으로 그었다.
까아앙!
청명한 금속성에 이어 뒤에서 노려오던 무인의 검신이 튕겨 날아갔다.
무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 무슨……!”
아무리 기감이 예민하다 해도 이처럼 난잡한 싸움터에서 이렇게 기민하게 반응하다니!
정말이지 놀라운 반응력이 아닌가?
물론 그들은 극마가 조력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극마의 조력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제길, 다시 뒤다! 아니, 좌우! 전방에서도 온다!
이에 적비연이 바닥을 툭 찍어 차면서 몸을 허공에 눕히고는 휘리릭 회전했다.
쒸이잉! 쒸잉!
두 자루의 칼날이 가슴 위와 허리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흑월아다.
적비연이 가까스로 중심을 바로잡자 좌우전방에서도 세 자루의 흑월아가 날아든다.
그대로 검을 던졌다.
따앙!
날아간 검이 흑월아 한 자루를 튕겨낸다.
그리고 좌우에서 날아드는 흑월아를 양손으로 잡아냈다.
콰콰앙!
도기가 실린 탓에 온몸을 뒤흔드는 충격이 전신에 전해진다.
촤아아아아악! 첨벙!
모래사장을 미끄러지면서 떠밀리던 적비연은 결국 무릎까지 바닷물에 빠졌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멈춰 섰는데,
팟!
눈앞에 나타난 사예린이 흑월아 두 자루를 치켜들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같은 방법이 또 통할 줄 알았어?”
사예린이 흑월아 두 자루를 내려치는 순간,
쩌저어엉!
적비연이 들고 있던 흑월아 두 자루로 간신히 막아냈다.
“크으윽!”
온몸을 진동시키는 충격이 전해진다.
팍!
순간 사예린이 씨익 웃으며 적비연의 가슴을 발로 차며 훌쩍 멀어진다.
손에 들고 있던 흑월아 두 자루도 어느새 그녀의 손으로 옮겨졌다.
-아직 한 자루 남았다!
극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두운 허공을 가르며 흑월아 한 자루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정말이지 흑월아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진 생명체 같다.
‘제길!’
막기엔 이미 늦었다.
조금 전의 일격을 막느라 몸의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
그렇다면 최대한 몸을 비틀어 피해야 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바닷물에 몸을 절반이나 담고 있는 지금은 여의치 않다.
게다가 조금 전 일격을 막으면서 적비연의 다리는 정강이까지 바다 아래의 모래 속으로 파묻힌 상태다.
결국 매섭게 날아들던 흑월아 한 자루가 적비연의 가슴을 길게 찢어냈다.
촤아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붉은 핏방울이 달빛 아래에 흩뿌려진다.
핏물이 바닷물에 섞이면서 흩어져 나간다.
첨벙!
균형을 완전히 잃은 적비연이 바닷물에 빠져 버렸다.
“죽여랏!”
수장이 외치는 소리에 흑의 무인들이 일제히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제 적비연은 무아지경 속에서 움직였다.
목을 자를 듯 날아드는 검을 피하고는 금나술을 펼쳐 상대의 손목을 꺾었다.
“크아아악!”
비명 소리를 들으며 검을 뺏어 들고는 머리를 쪼갤 듯 떨어지는 검을 올려쳤다.
채앵!
검이 튕겨 나가자 당황한 적을 향해 그대로 검신을 박아 넣었다.
푸욱!
“컥!”
그대로 손을 놓은 적비연이 상대가 든 검을 빠르게 뺏어 쥐고는 다시 좌측에서 공격해 오는 적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다.
푹!
“커헉!”
상대가 신음을 터뜨리며 쓰러진다.
하지만 적의 쇄도는 끝이 없다.
적비연은 반사적인 움직임을 이어간다.
채앵!
파앗!
푹!
“크악!”
촤아악!
첨벙!
바닷물과 모래가 튀어 눈이 따갑다.
그렇다고 소매로 눈가를 훔칠 여유 따위는 없다.
찰나지간 적비연이 선천지기까지 끌어올리면서 선풍뇌검 초식을 펼쳤다.
짜르르르릉! 꽈앙!
파파파파파!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는 적비연이 그대로 바닷물 위로 솟구치면서 단숨에 모래사장까지 이동했다.
튕겨 나가거나 베인 적들이 흩어지면서 적비연을 둘러쌌다.
“헉, 헉, 헉……!”
적비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제길, 끝이군.
극마의 입에서 씁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이어 바로 등 뒤에서 섬뜩한 기척과 함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이네?”
움찔거린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돌아서는 순간,
촤촤아아악!
두 줄기의 도기가 적비연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솟구쳐 오르는 핏줄기 사이로 웃음 짓는 사예린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가 비릿한 미소로 말했다.
“제법 눈요기가 됐어. 이제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