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또 만났네
콰다앙!
적비연이 모래사장 위에 큰 대자로 뻗었다.
가슴에서 솟구쳐 오른 핏물이 주변으로 흩어져 간다.
샤샤샤샥!
적비연을 빙글 에워싸며 흑의 무인들이 검을 앞세웠다.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한 적비연이 비척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순간 흑의 무인 하나가 욕설을 뱉어내며 달려와 발을 내질렀다.
“이 개새끼!”
파박!
순간 적비연이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헛!”
깜짝 놀란 그가 발을 빼내려고 했지만, 적비연은 그대로 발목을 돌려서 꺾어버렸다.
우둑!
“컥! 끄아아악!”
상대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자 흑의 무인들이 험악한 살기를 뿜어내며 일시에 달려들었다.
“죽여!”
적비연이 순간 사내의 발목을 잡은 채 원을 그리듯 빙글 잡아 돌렸다.
촤아아악!
모래먼지가 풀썩 일어나면서 시야를 가렸다.
그 틈을 타서 적비연이 뇌운섬광 초식을 펼쳤다.
번쩍!
검신이 달빛을 받아 광휘를 발하는 사이 적비연은 어느새 종권악의 품을 파고들고 있었다.
“헉! 이 새끼, 왜 나만……!”
손 놓고 구경만 하던 종권악이 기겁을 하며 물러나려는데,
-왼쪽이다!
극마의 외침에 적비연이 일순 방향을 틀었다.
쩌어엉!
고막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소리에 이어,
푹! 푸푸푹!
“커억……!”
사방에서 날아든 검신이 적비연의 요혈에 박혀들었다.
사예린의 흑월아를 막아내는 사이 흑의 무인들이 달려든 것이다.
츄아아아아!
검신이 뽑혀 나가자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적비연은 쓰러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이제 선천지기마저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헉…… 헉……!”
그때 적비연의 시야에 저만치 나뭇가지 위에서 지켜보는 방갓 쓴 사내가 보였다.
그는 이제 끝이라고 여겼는지 스윽 몸을 돌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누구지……?’
하지만 그게 궁금할 때가 아니다.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제야 좀 얌전해졌군.”
종권악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는 걸어왔다.
척!
적비연이 한 걸음 내딛자 움찔 놀란 종권악이 뒤로 물러나다가 이내 자존심이 상한 듯 인상을 팍 구겼다.
“다 죽어가는 새끼가……!”
그가 적비연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데, 사예린이 입을 열었다.
“흑검단주.”
“예, 공녀님.”
“뒤처리 맡겨도 되겠지?”
“문제없습니다.”
흑검단주가 고개를 숙여 보이자 종권악이 당황해서는 돌아보았다.
“엇? 이대로 돌아가시렵니까?”
“다 잡은 물고기는 재미가 없으니까.”
사예린이 가볍게 말을 뱉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가자 종권악이 어쩔 줄을 모르다가 곧 욕지거리를 뱉고는 뒤따라갔다.
“제길! 저 개새끼를 반드시 사로잡거나 죽여라! 흑검단주!”
“복명!”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라지자 흑검단주가 달빛처럼 시린 눈으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 화려하게도 저질렀구나.”
흑검단 이백 명 중에 사상자가 무려 마흔 명이 넘었다.
만검세가주 한 명을 잡기 위해서 이렇게나 희생하다니.
흑검단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항복한다면 목숨은 살려준다. 하지만 반항한다면 가차 없다.”
적비연이 시뻘건 핏물이 배어든 입매를 틀어 올렸다.
“사파 나부랭이들답게 무정하게 가자고.”
“흥! 제 복을 걷어차는구나! 제거해라!”
“존명!”
대답과 동시에 흑의 무인들이 일제히 적비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쉬쉬쉬익!
적비연은 마지막까지 검을 휘둘렀다.
채채앵!
하지만 두 자루의 검을 막아낸 직후 검신이 그의 손을 떠나고 말았다.
푹! 푸푸푹! 푹푹!
수십 자루의 검신이 적비연의 몸을 찔렀다.
마지막 순간 호신기공인 수라철괴를 사용해서인지 관통당한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상처만으로도 적비연의 움직임을 봉쇄하기에는 충분했다.
츄아아아아!
검신이 뽑혀 나오자 다시 한번 피가 흩뿌려지면서 적비연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파도 소리.
달빛 아래에서 어깨를 들먹이던 적비연은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하천웅으로서의 생을 마감한 적비연이었다.
그제야 흑검단주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독한 새끼. 놈이 죽었는지 확인해라.”
흑검단원들이 적비연에게 다가가 손을 목 언저리에 댔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감히 본좌의 몸에 손을 대느냐!”
죽은 줄만 알았던 만검세가주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내지르더니 강맹한 기운과 함께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퍼퍼퍼엉!
그가 사방으로 장력을 발출하니 가까이 다가가던 무인들이 속절없이 터져 나가면서 여기저기 나가떨어졌다.
그들 모두 내장이 진탕이 되어서는 피를 토하고는 절명하고 말았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흑검단주를 비롯한 무인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찌 저런 몸으로……!”
“저놈은 대체……?”
한편 씨근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본 만검세가주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면서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러더니 미친놈처럼 웃는 게 아닌가?
“크흐흐흐! 이 육신……! 인간의 육신……! 얼마만이던가! 크하하하!”
“큭! 뭣들 하느냐! 저 미친 새끼를 죽엿!”
흑검단주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검단원들이 일제히 검을 부리며 날아갔다.
쉬쉬쉬쉬쉭!
검기가 쇄도하는데도 만검세가주는 전혀 다른 존재라도 된 것처럼 강맹하게 마주쳐왔다.
“가소로운 놈들! 그딴 하찮은 실력으로 본좌를 꺾을 수 있으리라 보느냐!”
쾅! 콰콰콰콰앙!
그가 주먹을 마구 내지르자 마치 허공에서 천둥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마다 쇄도하던 무인들은 전신이 터져 나가면서 모래사장에 파편이 되어 널브러졌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신위였다.
게다가 지금 피부가 따갑도록 느껴지는 이 기운은…….
‘이, 이건…… 마공!’
흑검단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눈앞에서 번쩍번쩍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상대를 보면서 처음으로 공포심을 느꼈다.
만검세가주가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어김없이 아군 서너 명이 목숨을 잃어갔다.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싸움을 지켜보는 듯했다.
“이, 이익!”
파악!
흑검단주가 바닥을 차고는 쏜살같이 날아갔다.
쒸에에엑!
그가 빛살처럼 검을 뻗자,
콰악!
“……!”
놀랍게도 만검세가주가 손을 뻗어서 검신을 낚아채는 게 아닌가?
‘이, 이게 무슨……! 몸이 금강불괴라도 된단 말인가!’
그가 놀라는 사이 상대가 검신을 확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팔꿈치로 가슴을 찔러왔다.
빠악!
“커억!”
곧이어 상대의 손이 뒤통수를 움켜잡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앙!
“커억!”
흑검단주는 도대체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다 죽어가던 자가 이리도 생생하게 움직인단 말인가?
‘만검세가주……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힘겹게 고개를 들어 보니 만검세가주는 여전히 흑검단원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면서 살풀이를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백여 명이 죽었다.
정말이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무위였다.
“젠장……!”
흑검단주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헉,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살아남은 흑검단원이 열 명 남짓이다.
대부분 대주급이었는데 그나마도 몸이 성치가 않다.
퍽썩!
마침 저만치 바닷가에 서서 흑검단원 한 명의 머리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려 깨트려 버린 만검세가주가 이쪽을 스윽 돌아보았다.
“미친……!”
만검세가주가 히죽 웃는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된 것만 같다.
“온다……!”
저벅…… 저벅……!
만검세가주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
“큽!”
순간 만검세가주가 몸을 기이하게 뒤틀더니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다가 풀썩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잔뜩 긴장한 채 지켜보던 흑검단주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지? 확인해 봐!”
그의 말에 가까이에 있던 대주 한 명이 만검세가주에게 다가갔다.
검봉으로 어깨를 푹 찔렀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애매하다.
어쨌거나 기회였다.
“그 개새끼 목숨을 확실히 끊어라.”
흑검단주의 명에 대주가 검을 들어 올렸다.
찰나,
촤아아!
바닷물에서 뭔가가 솟구쳐 오르더니,
“하앗!”
기합성과 함께 붉은 채찍이 굽이치며 날아들었다.
취리리리릿!
“헉!”
뒤늦게 대주가 몸을 틀었지만 이미 채찍은 그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촤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대주의 목이 그대로 몸에서 찢어져 나갔다.
“삼 대주!”
흑검단주가 경악하며 외쳤다.
“이익! 웬 년이냐!”
하지만 상대는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빠르게 공격을 이어갔다.
취리리릿!
그런데 한 명이 아니었다.
흑검단주의 등 뒤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그대로 등을 찔렀다.
푸욱!
“커어억!”
흑검단주가 심장을 뚫고 튀어나온 검신을 보았다.
‘젠장……!’
갑자기 채찍을 휘두르며 나타난 여인 때문에 모든 신경을 빼앗긴 탓에 방어조차 못했다.
“네놈들은……?”
“미안하게 됐소.”
서늘한 음성을 귓가로 전해 들은 흑검단주가 그대로 풀썩 쓰러지더니 다신 움직이지 못했다.
달빛에 비친 사내의 얼굴은 바로 미계수였다.
그리고 채찍을 휘두르며 종횡무진하는 여인은 바로 동소유였다.
두 사람은 지칠 대로 지친 흑검단원들을 순식간에 베고 찢어갔다.
촤아아악!
“커억!”
마침내 마지막 남은 단원까지 제거한 미계수가 심호흡을 하고는 동소유를 보았다.
“괜찮소?”
“네, 괜찮아요. 그보다 저자를 어떻게 해야겠어요.”
동소유가 만검세가주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미계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가가서 목에 손을 대보았다.
“아직 죽진 않았소.”
“그럼 옮겨야죠. 그나저나 명줄은 질기네요.”
“동 소저가 살린 거요.”
“어쩔 수 없잖아요. 이자가 죽으면 당신의 사활침을 풀 수 있는 자가 없으니.”
“미안하오.”
“그런 소리는 지금 하지 말고 어서 옮겨요. 녹림괴의에게 갈 거죠?”
“그래야겠소.”
“서둘러요. 지체하다간 그 괴물 같은 여자가 돌아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럽시다.”
팟!
만검세가주를 들쳐 업은 미계수가 몸을 날렸다.
동소유가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곧 그 뒤를 따랐다.
* * *
“크헉! 헉, 헉!”
적비연이 눈을 부릅뜨면서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정말이지 처절한 싸움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지?’
-제길, 어디긴 어디냐? 네놈이 환생한 장소지!
극마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극마……?’
-그래, 본좌다! 젠장, 네놈이 몸에서 빠져나간 후에 내가 그 몸을 좀 차지할 수 있으려나 했더니……! 네놈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여기로 곧장 소환되어 버렸다!
‘그 몸이라면……? 하천웅?’
-그렇다.
‘그럼 내가 죽어서 빠져나온 게 아니란 말이야?’
-죽기 전에 의식을 잃었지. 그 정도 상처를 입었으니 정신이 멀쩡한 게 이상하지.
‘하천웅은 어떻게 됐지? 죽은 건가?’
-아마 그럴 거다. 뭐, 본좌가 그 몸에 생기를 주입해서 한동안 움직였으니, 어쩌면 그 덕에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 죽었을 거다. 아무튼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젠장. 내 육신…….
‘그런데 너 아까부터 말투가 좀 그렇다?’
-크흠! 말실수다.
참 당당하게도 말한다.
적비연이 헛웃음을 뱉고는 물었다.
‘그나저나 이번엔 누구지? 기억이 흡수되려면 조금 걸릴 모양인데.’
극마가 대답하지 않아도 적비연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옆에서 엎드려 졸던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반색하며 외친 탓이다.
“대, 대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접니다! 저요!”
그는 다름 아닌 여추백이었다.
‘이자가 대주라고 부른다면…… 나는…… 반철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