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자꾸 만나네
흑천련 외원에 위치한 의성각 후원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연못에는 홍예교(虹蜺橋)가 있었는데, 적비연은 그 다리 중앙에서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면에 비친 얼굴은 틀림없는 반철룡이었다.
“보석산 바위 언덕에서 당한 거구나.”
적비연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기억은 완전히 흡수됐다.
보석산 바위 언덕에서 만났던 백발 광인도 떠올랐다.
하지만 아쉬운 건 반철룡조차도 그 백발 광인의 정체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었다.
흑천련에서는 백발 광인의 정체에 대해 기밀처럼 취급했다.
‘결국 그자의 정체를 알려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건가?’
-그딴 미친놈 정체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 이제 어떻게 할 건지나 생각해라.
극마가 핀잔을 주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백발 광인이다.
당장은 그자의 정체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우선 몇 가지 사실을 새로 알아냈다.
하나는 극마의 빙의에 관한 것이다.
자신이 의식을 잃었을 때, 극마는 하천웅의 몸을 빌려 잠깐 동안 설쳐댔다.
그 결과 지금 흑천련은 비상이 걸렸다.
총 이백 명으로 구성된 흑검단이 전멸한 것이다.
그것도 만검세가주 한 명을 제거하지 못해서.
이에 련주가 격노했고, 이 공녀인 사예린과 삼 공자인 종권악을 엄하게 꾸짖었다는 후문이다.
그렇게 만검세가주는 행방불명이 됐다.
물론 세간에는 사라진 자의 정체가 만검세가주라고 알려지진 않았다.
그저 ‘무림맹이 심은 첩자’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다만 적비연은 본인의 이야기인 만큼 만검세가주라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그땐 좋았지. 모처럼 육신을 가지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더군.
극마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적비연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얼거렸다.
“과연. 그럼에도 내가 다른 몸에서 의식을 회복하면 넌 곧장 내 곁으로 소환된다는 뜻이군.”
-결국 날 소환한 게 주인이니까 그런 거겠지.
극마가 투덜거렸다.
다시 생각해도 아쉬웠다.
지금도 손끝에서 전해지는 짜릿한 살육의 감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그것이 주는 절대적인 쾌감!
극마가 희열에 차 있었던 그 기억을 곱씹는 동안 적비연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라는 건가?”
-뭐, 뭣이? 강, 강아지이이?
극마가 눈이 뒤집혀서는 콧김을 푹푹 뿜어냈다.
적비연은 그런 극마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여전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진 않을 거다. 이번에는 운 좋게 내가 먼저 의식을 잃어서 그렇지만,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꿰뚫려 단숨에 절명한다면 네가 육신을 차지할 확률도 그만큼 줄어들겠지.’
-흥! 누가 들으면 목이 잘리거나 심장에 구멍 뚫리길 바라는 인간 같구나!
‘뭐, 일단 알고는 있으라고 한 말이야.’
-안다! 나도!
‘그럼 됐고.’
-이익……! 사과해라! 날 보고 강아지라고 한 걸!
‘그래, 그럼 호칭을 변경하지.’
-진작 그럴 것이지!
‘개.’
-뭐?
‘주인을 따르는 개.’
-크아아! 이 주인 놈이 진짜 장난하는 거냐?
‘개야. 난 진심이다.’
-으아아아! 주인이고 나발이고 죽여 버리겠다!
극마가 적비연을 향해 연신 주먹을 휘둘러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기운은 적비연과 거의 하나라고 볼 수 있었기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귀찮게 굴면 소멸시킨다.’
-이익……!
결국 극마가 팔짱을 끼고는 몸을 홱 돌려 버렸다.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다시 연못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극마의 빙의라.
이걸 잘 이용하면 극마의 힘을 잠시나마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지금도 아주 집중하면 극히 짧은 순간 극마의 힘이 육신을 통해서 나오기도 하니까.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훈련이라도 해봐야겠다.
그때 전각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여추백이 나타났다.
“여기 계셨군요.”
“좀 걷고 싶어서.”
“정말 대단하십니다. 의성각주님조차 놀라자빠질 일이라며 혀를 내두르십니다.”
적비연은 희미하게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상처가 깊어 죽을 확률이 높았던 자가 사흘 만에 기적처럼 빠른 속도로 회복했으니.
주변에서는 천운이 따랐을 뿐만 아니라 신령의 도움이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적비연이 슬쩍 물었다.
“그래서 좀 알아본 건?”
“아, 네. 그날 밤 이 공녀와 삼 공자가 바닷가에서 무림맹의 간자와 싸운 것은 사실인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이 공녀와 삼 공자가 다 죽어가는 간자를 두고 먼저 돌아왔고, 남아 있던 흑검단이 전멸해 버린 겁니다.”
뭐, 그건 이미 아는 사실이고.
“흑검단을 전멸시킨 흉수는?”
이게 궁금하다.
사실 처음에는 극마가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극마의 말에 의하면 마무리까지 하진 못했다고 했다.
흑검단주를 비롯한 대주 몇몇을 죽이지 못한 채로 이곳으로 소환됐다고 했다.
그런데도 흑검단이 전멸한 것이다.
대체 누구의 소행일까?
여추백이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아직 흉수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무림맹의 간자는?”
“실종 상태입니다. 현장에 남은 흔적으로 보아서는 두 사람이 개입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라…….”
적비연이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여추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 일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본 련을 위협한 간자의 짓이다. 자세히 알아둬야 우리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지.”
“뭐, 그건 그렇죠.”
“또 다른 소식은 없나? 간자가 더 있을 수도 있을 텐데.”
“현재까지는 파악된 바가 없습니다.”
다행이다.
단휘와 예홍, 현청과 임송화는 무사한 모양이다.
하긴. 접선자가 접선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여추백이 말을 덧붙였다.
“이게 참 증거도 없으니 위에서도 난감한 모양입니다. 무림맹에 항의할 수도 없고.”
그렇겠지. 이렇게 될 줄은 나조차도 몰랐으니까.
어쨌든 다행인 셈이다.
자칫 하천웅의 시신이라도 발견됐더라면 지금껏 쌓아올린 주춧돌이 무너졌을 테니까.
여추백이 곁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안타깝게 됐네요. 이번 진급 심사 많이 벼르고 계셨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참가하지 못…….”
“아니. 참가할 거다.”
“예? 그 몸으로요?”
“내 몸이 어때서?”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곤 하지만…… 심사가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정도면 충분해.”
여추백이 입을 딱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진급 심사.
어쩌면 잘된 건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상천이라는 인물로 진급 심사에 참가하려고 했다.
어쨌든 첩자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최대한 높은 지위까지 오르는 게 유리할 테니까.
그런데 지금이라면 더 수월하게 진급할 수 있다.
반철룡이라면 오히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여추백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주님…… 불과 사흘 전만 해도 몸이 어떤 상태였었는지 기억이나 하십니까?”
* * *
“전혀 기억이 나지 않소.”
하천웅의 말에 동소유는 눈이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저, 저……!”
그녀가 당장에라도 채찍을 휘둘러 하천웅의 목을 따려고 하자, 미계수가 얼른 그녀를 말렸다.
“동 소저. 진정하시오. 일단 대화를 나눠봅시다.”
“지금 나더러 저 말을 믿으라고요? 저 때려죽일 작자가 어디서 거짓부렁을……!”
“죽다 살아난 자요.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지 않소?”
“거짓말인 게 뻔하잖아요! 만약 기억난다고 했다간 나한테 죽을까 봐 저러는 거라고요!”
“확실치 않으니 좀 더 대화를 나눠봅시다.”
미계수가 동소유를 말리며 도와달라는 듯 옆을 힐끔 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들창코에 눈이 유독 작은 녹림괴의가 앉아 있었다.
그가 턱 끝에 염소처럼 자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기억을 잃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네. 저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살아난 게 기적인 만큼 기억을 상실했다고 해도 놀랄 건 아니지.”
“보시오. 괴의께서도 그렇다 하지 않소? 진정합시다.”
그제야 동소유가 긴 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하지만…….”
“……?”
“만약 정말로 저자가 기억을 잃었다면…… 내 복수는 어떻게 하죠?”
“음…….”
“저자 때문에 죽은 오라버니의 한을 어찌 풀어야 하죠? 난 저자가 반드시 기억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그래야 나도 사활침을 풀 수 있지 않겠소?”
“아…… 미안해요. 당신이 더 급한데.”
“괜찮소. 소저의 상실감을 내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소? 하지만 지금은 침착하게 대응합시다.”
“알겠어요.”
그제야 동소유와 미계수가 침상으로 돌아왔다.
침상에 누워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던 하천웅은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도, 도대체 여긴 어디요? 당신들은 누구시오? 아니, 그보다…… 나는…… 누구요?”
녹림괴의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하천웅 몸에 박힌 침을 뽑아내며 말했다.
“다 죽어가는 자네를 살린 건 여기 두 사람일세. 자네는 만검세가주 하천웅이고, 이 두 사람의 원수일세.”
“원, 원수라고요? 한데 어째서 이들이 날 살렸단 말입니까?”
“그건 이들에게 직접 듣게나.”
말을 마친 녹림괴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계수와 동소유를 가리켰다.
“당, 당신들은 누구…… 흐익!”
푹!
동소유가 단검을 꺼내 하천웅의 얼굴 옆을 내리찍었다.
하천웅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릴 뻔했다.
동소유가 울분에 찬 표정으로 씹어뱉듯 말했다.
“잘 들어. 넌 내 오라버니를 죽인 놈이야.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내, 내가…… 그랬단 말이오? 정말로 내가?”
“그래! 더 이상 모른 척하지 마!”
동소유가 당장에라도 죽일 듯 소리치자 하천웅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알, 알겠소! 미,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사과도 하지 마! 네가 사과할 방법은 오로지 목숨을 내놓는 것뿐이니까!”
하천웅이 입을 꾹 다물고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미계수가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와 물었다.
“나 모르시겠소?”
“모, 모르오.”
“당신이 내 몸에 사활침을 놨소. 정말 모르겠어요?”
하천웅이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계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동소유가 미간을 팍 일그러뜨리고는 말했다.
“걱정 마요. 피부를 벗기다 보면 기억나겠죠.”
“흐억! 살, 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소! 으아아악!”
칼날을 목 언저리에 들이대던 동소유가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미계수를 돌아보았다.
“정말인가 봐요.”
“그런 것 같구려.”
미계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하천웅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죄, 죄송하지만…… 두 분.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면 좀 알려주시겠소?”
* * *
의성각을 나선 적비연은 곧장 반철룡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반철룡의 기억을 완전히 흡수한 상태였기에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반철룡은 보석산 서쪽 언저리의 허름한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주변이 비교적 한적했기에 적비연이 머물기에는 제법 괜찮은 환경이었다.
‘남은 기간 최대한 빨리 몸을 회복하고 수련에 집중해야겠다.’
적비연이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 그가 휙 돌아섰다.
“누구냐?”
마침 어둠 속에서 누군가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창가에서 스며든 달빛에 비친 여인은 바로 이 공녀 사예린이었다.
적비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여자가 여기에는 왜……?’
한편 사예린은 적비연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정말 다 나았나 보네. 많이 다쳤다더니. 우리 얘기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