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너였지?
“얘기라면 어떤……?”
적비연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사예린은 빙그레 미소 짓고는 창가의 탁자로 걸어가서 앉았다.
그녀가 맞은편 의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앉아. 그렇게 얼어 있을 필요 없어.”
“괜찮습니다.”
“앉으래도.”
더 거부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탁자로 걸어가 마주 앉았다.
“말씀하시지요.”
적비연이 깍듯하게 말했다.
어쨌든 그녀는 흑천련의 이 공녀였다.
반철룡으로 환생한 적비연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사예린이 적비연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 여자는 눈을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회복이 빠르네?”
“운이 좋았습니다.”
“회복이 빠른 것도 운인가? 보통 그런 경우는 운이 아니라 체질 탓 아냐?”
“그런…… 지도 모르겠습니다.”
적비연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도대체 이 여자가 왜 온 거지?
괜히 불안하다.
하천웅으로 활동할 때도 사예린은 사사건건 걸림돌이었다.
결국 그녀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기도 했고.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엔 반철룡의 집에 불쑥 찾아온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반철룡과 사예린이 딱히 깊은 인연은 아니었다.
오히려 련 내에서도 교류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 정도 되면 확실한 악연인가?
한편 적비연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예린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좀 달라.”
“무슨 말씀이신지?”
“글쎄.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예?”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뭔가 달라졌어. 너.”
“…….”
-하! 정말이지 직감 하나는 귀신같은 여자구나.
듣고만 있던 극마가 탄성을 흘렸다.
‘진짜 귀신이 그런 소리 하니까 웃기는군.’
적비연이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사예린에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죽다 살아나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큰 고비를 넘기면 사람이 변한다지.”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흐응.”
사예린이 다시 적비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열린 창문으로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사예린의 시선이 적비연의 온몸을 더듬는 것만 같다.
정말이지 숨이 막힐 듯 긴장되는 분위기.
마침내 사예린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만검세가주.”
“……!”
“좀 어때?”
“무, 무슨 말씀이신지……?”
“너였지?”
“……!”
적비연은 순간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옆에 있던 극마도 경악한 표정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런 귀신보다 더 귀신 같으니라고. 이 여자가 어떻게 안 거지?
‘그걸 알면 내가 당황했겠나?’
-무서운 여자다.
‘공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수긍할 순 없다.
일단은 발뺌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뭘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까?”
“공녀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만검세가주를 안내한 게 너 아니었어?”
“그, 그렇습니다만.”
“네가 보기에 만검세가주는 좀 어떠냐고.”
그제야 적비연은 안도의 숨을 탁 내쉬었다.
물론 그런 반응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극마 역시 긴장이 풀린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내 간이 다 쪼그라들었네. 아니, 그게 궁금한 거면 처음부터 주어와 서술어를 다 말해야 할 것 아냐! 무턱대고 단어만 툭툭 내뱉는 경우가 어디 있어?
‘네가 왜 간이 쪼그라들어? 귀신 주제에.’
-말이 그렇다는 거다. 주인.
적비연이 내심 코웃음을 치고는 사예린에게 말했다.
“그런 말씀이셨군요.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대단한 자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무공도 뛰어나고 의술도 뛰어났습니다.”
“의술이라면 얼마나?”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신의가 친손자처럼 여겼다더군요.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사사한 사람이 신의인 만큼 그 솜씨가 범상치는 않았습니다. 삼 공자님에게 이상한 침술을 놓은 것만 봐도 보통은 아니었지요.”
“하긴. 그렇지.”
사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또 다른 특이사항은?”
“딱히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
“아쉽네.”
“죄송합니다.”
사예린이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자꾸 날 이런 식으로 쳐다보는 거야?’
-호감은 아닌 게 분명하다.
‘알려줘서 퍽이나 고맙다.’
-별말을.
적비연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예린이 입을 열었다.
“너, 그날 밤. 어디에 있었지?”
-저년 또 시간을 빼먹네. 일부러 저러는 건가?
극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적비연은 극마의 말에 동의했다.
아마 일부러 그러는 것이리라.
주어를 빼거나 서술어를 뺀 채로 단어만 툭툭 던지는 이유도 이쪽의 실수를 유발하려는 것이리라.
왜인지는 모르지만 이 여자는 지금 반철룡을 시험하고 있었다.
조심해야 한다.
“그날 밤이라면……?”
적비연이 되묻자 사예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네가 백발 광인에게 당한 날.”
“아…….”
“바위 절벽에서 백발 광인에게 당하기 전까진 어디서 뭐 했지?”
“그곳에 줄곧 있었습니다.”
적비연이 대답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
‘내가 만검세가주와 한편이라고?’
-그런 것 같은데?
극마의 대꾸에 적비연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라면 도대체 이 여자는 믿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반철룡처럼 충성스러운 부하마저 의심하다니.
사예린이 다시 말했다.
“그 말은 부재증명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거네?”
“여 부대주가 함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같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들었는데?”
“아, 그렇습니다.”
적비연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사예린이 피식 웃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그날 일을 의심하는 건 아니니까. 나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사장에서 흑검단이 전멸당한 소식은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흉수는 밝혀졌습니까?”
“짐작 가는 바가 없어?”
사예린이 묻는 말에 적비연이 미간을 모으고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단지 놀랐습니다. 앞으로는 사절단을 보내면서 뒤로는 간자를 보내다니. 무림맹다운 짓이랄까요?”
“이걸 알면 더 놀라겠네.”
“어떤……?”
“그 간자가 바로 만검세가주였어.”
“예?”
적비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적절한 반응이다.
극마가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칭찬했다.
사실 노린 것이기도 했다.
이 정도 반응은 보여줘야 쓸데없는 의심을 피할 것 같았기에.
사예린이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한테 물어본 거야. 그자를 본 련까지 안내한 사람이 너잖아.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이 너지. 어때? 그자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어?”
“죄, 죄송하지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제가 느끼기에는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역시 그렇지? 그럼 다 죽어가는 순간 갑자기 기적처럼 회생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자가 신의의 의술을 가지고 있어서 일순간 몸을 회복한다거나.”
“말이 안 됩니다.”
적비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좋다, 적절한 반응이다.
‘추임새 그만 넣어라. 몰입 안 된다.’
-쓸데없이 예민해 가지곤.
아, 정말 고민된다. 그냥 소멸시켜 버릴까?
사예린이 그날 일을 떠올리듯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져 버렸어. 흔적을 보면 죽어가던 만검세가주가 기적처럼 몸을 회복해서 흑검단을 거의 전멸시켰어. 그리고 정체불명의 이인조가 나타나 그를 도왔지.”
“그럴 수가…….”
-연기 좋고!
‘그만해라.’
-흥!
극마가 토라진 듯 팔짱을 끼고는 휙 돌아섰다.
사예린이 다시 적비연을 빤히 보았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말이야. 그 비슷한 일이 본 련에서도 일어났더군.”
“예? 대체 누가……?”
말을 뱉던 적비연이 흠칫거리고는 사예린을 보았다.
사예린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그래, 너.”
“…….”
“죽어가던 만검세가주가 기적처럼 몸을 회복하더니 적을 전멸시켰고, 다 죽어가던 넌 거짓말처럼 몸을 회복해서 집으로 돌아왔지. 그런데 넌 만검세가주의 안내자였고. 뭔가 묘한 연결 고리가 느껴지지 않아?”
하! 보통 그걸 이런 식으로 엮을 수 있는 건가?
그런데 이 여자의 표정을 보면 그냥 떠보는 게 아니다.
‘분명 나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두근두근.
적비연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상력이 지나치잖아!’
사예린이 마치 생각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잠깐 상상해 봤지. 네가 만검세가주와 동행하는 동안 어떤 대법이나 술법을 배운 건 아닐까? 만검세가주가 마공을 익혔다는 소문도 잠깐 돌았으니까. 그렇다면 너는 그 대가로 뭘 제공했을까?”
“억, 억측이 지나치십니다.”
“억측인지 아닌지 진맥을 해봐도 될까?”
“……!”
“알아. 실례라는 것. 하지만 너무 궁금해서. 네 체질이 도대체 어떻기에 이런 기적을 만들었는지.”
적비연의 표정이 굳었다.
극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맥을 하면 네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바로 눈치챌 거다. 거절해라!
알고 있다.
그녀와 이미 손을 섞은 적이 있었다.
만약 이대로 그녀가 자신의 몸에 넘쳐흐르는 공력을 확인한다면 분명 뭔가 눈치챌 가능성이 있다.
만검세가주와 결이 비슷하다고 느끼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리라.
하지만 거부한다고 해도 이 여자라면 강제로 손목을 잡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자체가 시험일지도 모른다.
결국 적비연은 도박을 걸었다.
“정 원하신다면.”
적비연이 손을 내밀자 사예린이 풋 웃었다.
“됐어. 그렇게 짓궂은 성격은 아냐.”
아니. 충분히 그 이상의 성격이다.
사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급 심사에 참여할 거지?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널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응원해 주지.”
“영광입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숙였다.
내뱉는 말과 달리 적비연의 표정은 어두웠다.
‘곤란하게 됐군.’
말이 좋아서 관심과 응원이지, 확실하게 찍혔다는 소리가 아닌가?
지금 더 몰아붙이지 않는 것은 더 꼬리가 길어지길 바라는 것이리라.
-꼬리를 늘어뜨리기 바라면서 왜 이렇게 겁을 주는 거냐?
‘내가 압박도 느껴야 실수도 할 테니까.’
-하여튼 약한 것들은 잔머리만 복잡하게 굴려대는군. 피곤하다, 피곤해.
적비연이 다시 들었을 때는 이미 그 자리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기감을 펼쳐 주변을 확인했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프하아!”
그제야 적비연이 잔뜩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정말 귀신같은 여자다.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반철룡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사예린 눈에 찍혀서 끝이 좋은 경우가 없었다.
그녀가 한 번 낙인찍은 인간은 어떻게든 수렁에 빠졌으니까.
-주인이 만검세가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걸 확인해도 말이냐?
‘그런 여자야. 증거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매장해 버리는.’
-지독한 여자군.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이유는 단순하다.
증거는 없지만 자신의 직감을 무시하기에는 찝찝하니까.
그래서 한 번 눈 밖에 난 자는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찍어낸다.
그녀의 방식이다.
-그럼 어떤 식으로든 주인에게 해코지를 해올 가능성이 크다는 거군.
‘그렇겠지.’
-무공의 결을 완전히 바꿔야겠는데? 저 정도로 의심병이 도져 있으면 주인의 검결만 봐도 유추할 수 있을 거다.
그건 그렇다.
초절정 중단을 넘은 고수다.
그녀가 관심 있게 지켜본다면 자신이 사용하는 무공의 결이 어딘지 만검세가나 벽력적가와 닮아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내가 나라는 건 모르겠지만……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지는 건 사실이지.’
그렇다고 반철룡이 익힌 검법만 사용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부분이 많다.
-어쩔 생각이냐?
‘글쎄…….’
곰곰이 생각하던 적비연이 창밖을 보았다.
‘이참에 새로운 무공을 제대로 한 번 창안해 볼까?’
-무공을?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에 의하면 반철룡은 항상 검에 대한 고뇌가 많은 자였다.
그 고민들을 잘 엮어내면 훌륭한 무공이 만들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적비연에게는 수백 년의 삶에 해당하는 연륜이 있었다.
거기에 마선의 경지까지 오른 극마도 있다.
어쩌면 반철룡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무공을 하나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그 무공으로 진급 심사에 임한다면 의심을 살 일도 없으리라.
‘진급 심사에서 단휘와 예홍도 만날 수 있겠구나.’
물론 현청과 임송화도 만나게 되리라.
물론, 그 두 사람만큼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일단 잠이나 한숨 자야겠다.
반철룡의 몸으로 깨어나고 나서부터는 생각이 복잡해서 제대로 쉬질 못했다.
적비연이 침상으로 가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추백이 들어왔다.
“대주님!”
“뭐냐?”
“대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데?”
여추백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대주님이 제일 좋아하실 만한 사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