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17화 (118/301)

117. 겉과 속이 다릅니다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하천웅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물었다.

미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아, 제가 정말 그렇게 멋진 사람이었단 말입니까?”

“흠…….”

“죄, 죄송합니다. 단지 대협께서 말씀해 주신 저의 행보가 워낙 멋진 것 같아서 그만…….”

이젠 미계수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이자가 정말 그 만검세가주가 맞나?

기억을 잃으면 성격도 바뀌는 건가?

왜 이렇게 찌질해 보이지?

한데 이번엔 하천웅이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갑자기 왜 그러오?”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님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나 슬퍼서 그렇습니다.”

“허 참.”

미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된다.

자신이 아는 하천웅은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는 자였다.

심지어 자신의 친형이 납치되었음에도 마치 남의 이야기를 대하듯 하는 자였다.

그리 길지 않은 동행이었지만, 그 짧은 만남 속에서도 그런 냉정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한데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천성 자체가…….

‘어딘지 너무 찌질하잖아!’

마침 동소유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됐어요. 그냥 죽여요.”

“예?”

미계수와 하천웅이 동시에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차피 기억도 못하잖아요. 이 인간은 이제 쓸모가 없어요. 그냥 죽여 버려요.”

“하지만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소?”

“그게 언제인 줄 알고요? 한 달이 지나면 소용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지금 당장 죽이는 것은 너무 빠른 포기가 아니겠소?”

“저 상태를 좀 보세요. 한 달 내에 기억이 돌아올 것 같아요? 그냥 죽여 버려요.”

“흐음.”

미계수가 침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저 뜻대로 하시오.”

그러자 하천웅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잠, 잠깐! 잠깐만요!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서든 한 달 내에 기억을 되살리겠습니다!”

“흥! 웃기는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동소유가 차갑게 힐난하자, 하천웅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저지른 짓을 전부 기억한다는 뜻이지요! 그럼 미 대협의 몸에 놓은 침을 해독하는 법도 알지 않겠습니까?”

“알게 되겠지. 하지만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너는 내 손에 죽는다. 그것도 알고 있을 텐데?”

“그, 그건…….”

“내가 모를 줄 알아? 네가 기억을 되살린다고 해도 가가의 사활침을 풀어주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땐 이용가치 없어진 네가 내 손에 죽을 거라는 걸 아니까.”

꿀꺽.

정확한 지적이었다.

동소유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기적이 일어났을 때지. 내가 볼 때 넌 기억을 되살리지 못할 가능성이 커.”

이것 역시 정확했다.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다.

단지 목숨을 한 달만이라도 연장해서 살 궁리를 찾아보려고 했더니.

젠장, 뭐가 이리 급한 거야?

사람 죽이는 걸 마치 파리 한 마리 때려잡는 것처럼 말하다니!

“말 다 끝났으면 이제 그만 저승으로 가라!”

말을 마친 동소유가 대뜸 채찍을 휘둘러왔다.

“우아앗!”

하천웅이 얼른 몸을 날려 데굴데굴 굴렀다.

그는 침상 곁에 놓인 촛대를 잡고는 잽싸게 들어 올렸다.

차아앙!

채찍과 촛대가 부딪쳤는데 금속성이 울렸다.

“어딜!”

동소유가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러 왔다.

마치 장강의 물결처럼 붉은 채찍이 굽이굽이 춤을 추듯 날아들었다.

하천웅이 얼른 몸을 눕히자 뱀의 혓바닥 같은 채찍이 그의 얼굴 위를 아슬아슬하게 핥고는 돌아갔다.

파바밧!

하천웅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면서 동소유의 가슴을 내질렀다.

뾰족한 촛대가 동소유의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채앵!

미계수가 불쑥 끼어들며 검으로 촛대를 쳐냈다.

휘리릭!

촛대가 허공으로 떠오르자 하천웅은 재빨리 몸을 날려 침상 위로 착지했다.

“나, 날 내버려 두시오! 당신들이 당한 일은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난 전혀 기억이 없소!”

“흥! 그딴 발뺌만 하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아?”

동소유가 바닥을 차고 날아가면서 그대로 손을 뻗었다.

마치 원수를 죽이는 데 채찍은 필요 없다는 듯.

직접 손으로 찢어 죽여야만 분이 풀리겠다는 표정이다.

하천웅이 얼른 금나술을 펼쳐서 동소유의 손목을 꺾어 잡았다.

하지만 동소유 역시 현묘한 수법으로 빠져나가더니 그대로 하천웅의 옷깃을 낚아챘다.

두 사람이 어지럽게 돌아서며 손을 섞었다.

마침내 동소유와 하천웅이 동시에 쌍장을 펼쳤다.

퍼퍼어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두막집 벽이 부서져 나갔다.

동시에 두 사람이 각각 반대 방향으로 튕겼다.

마침 뒤에 서 있던 미계수가 불쑥 손을 뻗어 하천웅의 뒷목을 콱 틀어쥐었다.

“커억! 컥!”

동소유가 서릿발같이 외쳤다.

“죽여요!”

“컥! 살, 살려…… 주시오……! 커컥!”

하천웅과 동소유, 미계수의 눈빛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잠시 후, 미계수가 한숨을 탁 내쉬고는 손을 놓았다.

“헉, 헉, 허억!”

하천웅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토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동소유가 쓰디쓴 표정으로 미계수를 보았다.

“어때요?”

미계수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니오. 소저의 생각은 어떻소?”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동소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사실 하천웅이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이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버티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래서 일부러 몰아붙였다.

한데 정말이지 무공의 기초도 모르는 움직임이지 않은가?

본능에 의해서 반응하긴 하지만, 두 사람이 작정을 하고 죽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내공의 깊이는 심후한 게 느껴졌다.

‘정말 죽이려고도 했는데…… 반응하지 않았어.’

이 정도면 기억 상실이 확실하다.

이런 내막을 모르는 하천웅이 겨우 숨을 몰아쉬면서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사활침이라는 것…… 어쩌면 풀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냐?”

“제가 벽력적가주를 몹시 존경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벽력적가주의 똥꼬가 헐 정도였다고 했다.”

“커험, 흠! 소저…… 그런 표현은 좀…….”

미계수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동소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천웅이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벽력적가주는 저보다 의술도 뛰어나고 신의와도 친분이 깊었으며 천상원까지 세웠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럼 그 벽력적가주님이 사활침을 풀 방법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제가 친분이 깊었다고 했으니…… 제가 그분께 부탁을 드린다면 청을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미계수와 동소유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법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 * *

“어딜 가는 것이냐?”

적비연이 나룻배에 올라 노를 젓는 여추백을 보며 물었다.

여추백이 대답은 하지 않고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도대체 저놈 속내를 모르겠다.

‘잠 좀 푹 자려고 했더니…….’

주변을 둘러보니 달빛 아래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남녀노소가 즐비했다.

흑천련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나서부턴 서호의 밤은 언제나 백야(白夜)였다.

정파 무인들은 흑천련이 그 아름다운 서호를 피로 물들였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흑천련이 항주에 터를 잡으면서 그렇잖아도 유동인구가 많던 곳이 더 북적거렸다.

돈 많은 무림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니 지역 경제도 발전했고, 여러 유흥시설이 생겨났다.

원래 호랑이 굴 근처에는 어설픈 맹수가 살지 않는 법.

흑천련이 버티고 있는 이곳 서호 인근은 치안도 훌륭한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흑천련 권역에서는 가장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도 떠돌았다.

어쨌거나 그런 한가로운 풍경을 보니 잠시 긴장을 놓을 수는 있었다.

반철룡은 생각보다 감상적인 인간이었다.

하긴. 그래서 검을 다루면서 자주 고뇌에 빠진 것일지도 모르지.

마침 바로 곁으로 여인들만 탄 배가 지나쳤다.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기녀들이었다.

서호를 끼고 둘러싼 수많은 기루 중 한 곳에서 호객행위를 하느라 배를 타고 나온 것이다.

저렇게 배를 타면서 돌아다니다가 남정네들끼리 탄 배에 다가가 유혹한다.

그러다 보면 남녀가 섞여서 배를 나눠 타고 이차로 기루까지 가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반철룡의 기억에도 딱 한 번 그런 경험이 있었다.

싫다는 반철룡을 여추백이 억지로 끌어들여서 기녀들과 어울렸던 것이다.

반철룡이 감상적인 이유는 다 외로움을 타기 때문이라나?

혼자 청승맞게 바위 절벽에 올라서 술 마시지 말고 예쁜 여인을 곁에 두고 함께 즐기라나?

하지만 반철룡이 감상에 자주 젖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루고자 하는 경지는 저 멀리 높은 곳에 있는데, 자신의 실력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기에.

그러다 보니 모종의 자괴감과 회의감이 자주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그런 식으로 해석하다니.

어쨌든 그날 반철룡은 기녀와 함께 기루까지 갔지만 밤새 대화만 나누고 돌아왔다.

예쁜 여인이었다.

비록 몸을 파는 직업이지만 자신의 고민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준 여인에게 돈을 두둑이 챙겨주었다.

참 이상한 손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지육신 멀쩡한 것도 모자라 힘이 넘치는 무인이 찾아와 그 짓은 하지도 않고 오로지 검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니.

그런데 그게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그녀는 받은 돈을 후일 여추백을 통해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대신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물론 반철룡은 거절했다.

돈도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여인은 끝내 그 돈을 받지 않았다.

그 돈은 결국 여추백이 꿀꺽했다.

아무도 받지 않겠다면 자신이 먹어버리겠다나?

알아서 하라고 했다.

어쨌든 반철룡은 한 번 건네준 돈이었다.

그 돈을 돌려받으면 다시 만날 약조를 빚처럼 떠안아야 할 것 같았기에.

여추백도 그냥 꿀꺽하기에는 양심에 찔린 탓인지 심심찮게 그 기녀 이야기를 꺼내며 반철룡을 회유했다.

아마 나름의 돈값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는 넘어가지 않았다.

적비연이 여추백을 가만히 보며 물었다.

“너 설마 또 허튼짓하려는 건 아니지?”

“허 참, 그게 그렇게까지 정색하실 일입니까? 그리고 오늘 같은 날 좀 어떻습니까?”

“싫다.”

“혹시 대주님…… 취향이 남자 쪽……?”

적비연이 사납게 노려보자 여추백이 씨익 웃었다.

“아니면 다행이고요.”

당연히 아니지.

네가 아는 그 반 대주는 철저한 이성애자다.

다만 모든 생각이 여자보다 검에 향해 있을 뿐이었지.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추백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기대하십쇼. 오늘은 절대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녀석은 한결같구나.’

반철룡의 기억을 온전히 흡수한 상황이었기에 적비연은 여추백이 이전보다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서호 중앙쯤 다다랐을 때였다.

여추백이 작은 선실이 있는 작은 배 한 척 곁으로 나룻배를 바짝 붙였다.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정말 이럴 거냐?”

“거참,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니까.”

“생각 없다지 않느냐?”

“일단 만나보시고 말씀하세요. 장담합니다. 대주님이 좋아하실 거라고.”

적비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때 꿀꺽한 돈 몇 푼 때문에 아직도 이럴 정도인가?

지금 여자나 만나고 있을 때가 아니 건만.

적비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여추백을 따라 옆의 배로 옮겨갔다.

작은 선실은 발이 쳐져 있었다.

그 앞에 멈춘 여추백이 포권을 했다.

“어르신, 데려왔습니다.”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르신……?’

여자가 아니었던가?

의아해하는데 여추백이 옆으로 비켜서며 적비연에게 눈짓을 보낸다.

들어가는 신호다.

끝까지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을 모양이다.

적비연이 천천히 다가가서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실 한쪽에 작은 호롱불이 밝혀져 있었고, 방갓을 눌러쓴 사내가 가만히 뒷짐을 지고 있었다.

-주인, 강한 자다.

‘네가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냐? 대체 이자가 누구……!’

순간 적비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뭔데 그러냐?

극마가 옆에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거지?

마침내 뒷짐을 진 방갓 사내가 침중한 목소리를 흘렸다.

“몸은 좀 괜찮은가?”

“……!”

적비연의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적비연은 이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마침내 방갓 사내가 스윽 돌아섰다.

그가 검지로 방갓을 슬쩍 올리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철룡.”

“어, 어르신……!”

놀랍게도 눈앞에 서 있는 자는 분명 무림맹으로 끌려갔을 교패였다.

옆에 있던 극마도 깜짝 놀라서 입을 척 벌렸다.

-이런 미친! 도대체 이 작자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