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19화 (120/301)

119. 각자의 목적

“흐음.”

적비연이 침음을 흘리고는 바위 절벽에서 서호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반철룡이 자주 찾는 장소였다.

반철룡의 기억을 고스란히 흡수하다 보니 적비연도 이 장소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일단 경치도 나쁘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익숙한 장소이기도 했다.

‘뭐, 마지막에 백발 광인을 만나는 바람에 마냥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지만.’

반철룡의 기억으로 본 백발 광인은 정말 초인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적비연조차도 그 백발 광인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도대체 그자는 누구였을까?

-기억을 잘 더듬어봐라. 수백 년의 기억 중에 어느 한 부분에 웅크리고 있을지 혹시 아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뜻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도통 백발 광인의 외모가 너무 알아보기 힘든 탓도 있었다.

머리카락은 치렁치렁했고,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마치 사자처럼 얼굴을 뒤덮고 있었으니까.

‘뭐, 연이 된다면 언젠간 다시 보겠지. 안 만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언젠간 그의 정체를 짚고 넘어가야 하리라.

앞으로 어떤 계획을 진행하든 그렇게 강한 변수를 덮어두고 넘어갈 순 없을 테니.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눈을 가만히 내려감았다.

귓가로 바람 스치는 소리만 들려온다.

모처럼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다.

뭐, 옆에서 조잘거리는 덩치 큰 강아지만 아니라면 말이다.

-강아지라니!

‘들렸냐?’

-듣게끔 생각해 놓고선!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사실 극마라도 적비연의 머릿속을 완전히 들여다보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전달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극마가 적비연의 의념을 듣게 된다.

‘하여튼 놀리는 재미는 있다니까.’

-이익……!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극마를 두고선 적비연이 체내의 공력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흠.’

확실히 사기가 늘어났다.

반철룡이 원래 가진 내공의 이 할 정도가 흡수된 듯하다.

그만해도 어딘가?

이미 내공만큼은 동년배에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극마가 불쑥 물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

‘뭘?’

-저 교패가 여기 있다는 게 밝혀졌잖냐? 무림맹에 알려야 하는 것 아니냐?

피식.

적비연이 웃음을 터뜨리자 극마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뭐야? 또 왜 웃어? 날 비웃은 거냐?

‘아니, 뭐, 비웃었다기보단…… 마선까지 오른 네가 무림맹의 개가 되어간다는 게 좀 재미있다고나 할까?’

-뭐가 어쩌고 어째? 무림맹의 개애애? 나는 그저 주인의 입장을 생각해서 물어본 것일 뿐이다!

‘어련하겠어.’

-으이익!

하여튼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

적비연이 빙글빙글 웃다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일단은 지켜볼 생각이야.”

-무림맹에 알리지 않고?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지금 시험당하고 있어. 무림맹에 알리려는 시도를 하는 순간 들키고 말걸?”

-흐음, 그렇군. 하면 하기룡을 찾는 건 어쩔 생각이냐? 하천웅의 사망 소식이 곧 무림맹에 전해질 텐데.

‘으음. 하천웅이 죽건 말건 상관없지. 하기룡도 마찬가지. 애초에 나는 하기룡을 구하는 임무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자가 내 친형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

‘단지 하기룡이 왜 납치된 건지 궁금했을 뿐이지. 그리고 임무를 완수하면 공을 세워서 벽력적가의 위상을 높일 기회가 생길 테니까 임했던 거고.’

-그럼 이제 뭘 하려고?

‘마찬가지로 계속 임무에 집중한다. 벽력적가의 위상을 높일 기회를 만들려면 어쨌든 내가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야 할 테니까.’

-하긴.

극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의미 있는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야 한다.

밑바닥에서는 제아무리 설쳐봐야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적비연이 고개를 돌려 저만치 떨어져 있는 흑천련 장원을 보았다.

정말이지 멀리서 봐도 그 웅장함에 압도되는 기분이다.

‘흑천련에서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면 기밀에도 접근하기 쉬워질 테지. 그렇게 되면 그간 납치당한 무림맹 고수든, 하기룡이든 그 내막을 알기 쉬워질 거야.’

-옳거니. 그런 다음 단휘나 예홍에게 그 공을 넘겨줘도 되겠군.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다음에 이렇게 공표하도록 하는 거야.’

-뭐라고?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었던 건 벽력적가주님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라고.’

-뭐, 사실은 사실이군. 다만 그 벽력적가주가 지금 흑천련의 대주 모습을 하고 있다면 놀라 뒤집어지겠지만.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위상을 차근차근 이뤄간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벽력적가의 위상을 천하제일로 만드는 거니까.’

-강호일통이라도 할 기세군. 클클.

‘필요하다면 해야지.’

-진심이냐?

극마가 정색하며 물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을 적비연이 덥석 문 것이다.

적비연이 극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못할 것도 없잖아.’

-호오. 포부가 커졌군.

그건 아니다.

처음부터 강호일통을 이뤄서 가장 높은 곳에 벽력적가를 올려놓겠다는 생각은 해왔다.

다만 그 방법을 몰랐을 뿐.

지금도 그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당장 앞에 놓인 문제를 하나씩 풀어 가다 보면 뭐가 되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지금 앞에 놓인 문제는…….

‘무공을 창안하는 것.’

이왕이면 정말 제대로 만들고 싶다.

반철룡의 몸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비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무공을.

적어도 벽력검법이나 구천혈마검에 준하는 수준으로.

-그나저나 교패와 사예린이 역학이나 점괘로 널 의심하는 거라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냐?

‘꼭 그렇진 않아.’

-어째서?

역학이나 점괘를 보더라도 명확한 해답처럼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이다.

‘가령, 물가는 위험하다거나, 가까운 자가 등을 돌린다거나 하는 식이다.’

-결국 정확히 어디 물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가까운 자가 누구며 어떤 식으로 등을 돌린다는 건지 알 수는 없단 거군.

‘그렇지. 점괘가 그리 정확하다면 삶이 너무 재미없어지겠지.’

-그래서 그놈들이 주인을 그리 떠보았던 거군.

극마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비연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스르르릉.

검을 뽑아든 적비연이 검봉을 가만히 노려보며 생각했다.

‘반철룡은 오랜 시간 검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 지금 보니 그 고뇌의 깊이가 범상치 않을 정도야. 그 정도의 성찰력과 내 기억에 축적된 경험을 결합한다면 제법 훌륭한 검법이 탄생할 것 같다.’

-좋아, 어디 한 번 펼쳐보아라. 본좌가 검수해 주지.

‘든든하긴 하다만 아직은 아니다. 좀 더 생각해야겠어. 일단은 몸 좀 풀고.’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검을 곧게 뻗어냈다.

쉬이이잇!

적비연의 몸이 가볍게 날았다.

* * *

서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세 사람이 멈춰 섰다.

그들 모두 죽립을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굴곡진 몸매가 드러난 것을 보아 여인인 듯했다.

“결국 다시 이곳으로 왔구려.”

죽립을 들어 올리며 담담히 말을 뱉은 사람은 바로 미계수였다.

그 옆에 선 여인, 동소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다시 제자리인 느낌이네요.”

“하하, 제자리까지야. 조금씩 다가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과연 정말 이곳에 벽력적가주가 있을까요?”

“내 듣기로 벽력적가주는 흑천련 권역으로 들어와서 종횡무진 활약한다고 했소.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놓치진 않을 거요.”

그러자 미계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분명 그럴 겁니다.”

그는 바로 인피면구를 쓴 하천웅이었다.

동소유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흥! 넌 기도나 해라! 만약 우리가 벽력적가주를 찾지 못한다면 제일 먼저 너부터 죽여줄 테니!”

“흐익! 제발 살려주세요.”

“칫!”

동소유가 미간을 팍 구기며 혀를 찼다.

정말이지 하천웅을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

그렇게 무정한 눈빛으로 오라버니의 목을 그어버릴 땐 언제고!

지금은 저토록 순진해 빠진 표정을 짓다니!

미계수가 동소유를 달래듯 말했다.

“자, 그만 갑시다. 보름 후에는 진급 심사가 시작될 테니 이제부터 속속 무인들이 모여들 거요.”

“저어. 진급 심사인데 왜 사람들이 모여드는지요?”

하천웅이 눈치를 살피며 묻자, 미계수가 대꾸했다.

“흑천련은 삼 년에 한 번 진급 심사를 하는데, 그때마다 입련자들을 모집하오.”

“아…….”

하천웅이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계수가 걸음을 옮겼다.

“서호 객점으로 갑시다.”

“싫어요!”

“음? 왜요?”

“거긴 기루를 같이 운영하는 곳이잖아요? 설마 당신은 또 기녀와 어울릴 생각이에요?”

“허 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왜 하필 서호 객점이에요? 이상하잖아요.”

“아니, 그저 그곳이 가장 크니까 무심코 한 말이었소.”

“다른 곳으로 가요.”

“그럼 그럽시다. 그런데…… 생각하니까 좀 그렇네.”

“뭐가요?”

미계수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나 말고도 다른 남자와 그…….”

“그……?”

“그러니까 그…… 야한…… 그걸 하지 않소? 그래서 정기까지 빨아먹잖소? 근데 왜 나만 가지고 이러는 거요?”

그러자 듣고만 있던 하천웅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뭔가 불공평하군요.”

그로서는 자신에게 비교적 온화하게 대해주는 미계수가 좋았던 것이다.

이왕이면 두 사람이 대판 싸워서 헤어지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걸핏하면 살기를 뿜어대는 동소유와는 잠시도 같이 있기 싫었기에.

동소유가 눈썹을 성큼 치켜올리더니 미계수를 쏘아붙였다.

“언젠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면서요? 그저 내가 좋다면서요!”

“그, 그랬지.”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려는 거예요?”

“아니, 뭐 그건 아니고…….”

“흥! 그렇게 그 짓을 하고 싶으면 하든지! 그럼 우리 둘 다 어디 한번 각자 광란의 밤을 보내보죠!”

“아니오. 내가 잘못했소. 소저가 하도 날 의심하기에 투정 좀 부렸소.”

“피.”

“기분 푸시오? 응?”

“몰라요.”

“난 소저만 있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당신이 없으면 난 무슨 낙으로 살아요?”

“그러니 우리 기분 좋게 내려갑시다. 객점은 소저가 원하는 곳으로 가시오.”

“그래요. 사…… 랑해요, 가가.”

“나도…… 사랑하오.”

“아이참, 부끄럽게.”

“하하하!”

이내 두 사람이 서로를 안았다.

그 모습을 본 하천웅이 입을 딱 벌렸다.

‘의식의 흐름을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다. 저 두 사람, 정상이 아닌 게 분명해.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겠어. 하긴, 나도 지금 정상은 아닌 것 같지만.’

* * *

흑천궁 지붕 위.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고고한 자태로 꼿꼿하게 서 있는 사내.

흑립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그는 바로 흑천련주 태청강(太菁岡)이었다.

그가 흑천련과 서호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보름 남았군.”

“차질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옆에 나란히 선 총군사 요당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벽력적가주가 본 련의 권역에서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더군.”

“조사 중입니다.”

“자네가 아직도 헤매다니 별일이군.”

“죄송합니다.”

“이번 심사에서 영향은 없어야 할 걸세.”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그것들은 어찌 되고 있나?”

“차질 없이 준비 중입니다. 최종심에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교 선생이 길을 텄으니, 이젠 자네 차례일세.”

태청강의 말에 요당이 그 어느 때보다도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꾸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반드시 결과를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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