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낄 때 끼어야지
적비연은 서호 주변을 산책했다.
반철룡의 몸으로 깨어난 이후로는 거의 비슷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흑천련의 중심에 가장 가까워진 상태였지만 하천웅의 몸으로 지낼 때보다는 훨씬 여유로웠다.
이 기회에 차분하게 계획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흑천련의 상황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이었다.
반철룡의 기억을 흡수했기에 대략의 사정을 파악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다만 반철룡은 일생을 검에 대한 고민만 했기에 정치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딱히 출세에 대한 욕망도 없는 자였다.
‘사파에 몸을 담은 무인치고는 참 담백한 자였네.’
하지만 적비연의 입장은 다르다.
어떻게든 흑천련에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는 편이 좋다.
넓게 보았을 때는 강호일통을 위해서 좋을 것이고, 좁게 보았을 때는 그래야 임무를 수행하기에 수월할 것이다.
그러니 련 내의 정치적 상황도 잘 이해해야 한다.
-정말 강호일통이 농이 아닌 것이냐?
‘당연히 아니지.’
-허참.
‘왜? 못할 것 같나?’
-글쎄. 지금으로서는 너무 허황된 목표가 아닌가?
‘모든 대업의 시작은 그런 법이야.’
적비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가 걷는 곳은 서호십경(西湖十境)중 하나인 화항관어(花港觀魚)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거리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특히 바로 옆의 연못에는 비단 잉어가 떼 지어 헤엄치는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적비연에게 극마가 툴툴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그 대업을 이룬다는 사람이 이렇게 한가롭게 구경이나 하고 다녀도 되는 거냐? 무공을 창안한다더니? 벌써 사흘이 지났다.
‘무공은 지금도 연구 중이야.’
-도대체 무슨 연구를?
‘반철룡은 서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야. 어쩌면 이 장소와 검법을 연관 지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뭔가 깨달은 건 있냐?
‘글쎄. 아직은 잡힐 듯 말 듯하군.’
적비연이 연못에 손을 넣고 잉어를 잡으려는 아이를 보며 답했다.
-그건 그렇고 그럼 흑천련의 정치적 상황은 어떠냐?
‘궁금한 게 많군.’
-쳇! 주인이 내 입장이 되어봐라! 육신이 없으니 하루 종일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고! 이보다 갑갑한 일이 또 어디 있겠냐? 그러니 수다라도 떨어야 덜 답답할 것이 아니냐! 내 유일한 낙이다.
뭐,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자신이라면 차라리 소멸시켜 달라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극마는 현신하고 싶은 욕망이 꽤나 큰 모양이다.
어쨌든 머릿속으로 정리도 해둘 겸 말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흑천련은 지금 세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다.’
-세 개의 파벌?
‘그래. 흑천련주가 멀지 않은 시기에 후계자를 선정하겠다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지.’
-호오? 흑천련주가 그 정도로 나이가 많던가?
‘글쎄. 나도 직접 본 기억이 없군. 최측근이 아니면 항상 면사로 얼굴을 가렸으니.’
-흥! 겁쟁이군.
단언컨대 흑천련주를 겁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극마가 유일하리라.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라서 현재 흑천련에는 일 공자를 지지하는 파천계(破天系), 이 공녀를 지지하는 월희계(月熙系), 그리고 사 공자를 지지하는 권왕계(拳王系)가 있지. 그중에서도 파천계와 월희계가 용호상박이고, 권왕계가 가장 입지가 약해.’
-그럼 반철룡은 어느 쪽이었냐?
‘중도.’
-아직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거군.
‘그런데 이번엔 선택해야 해. 진급을 위해서라면. 중도를 선택하면 진급에 한계가 있다.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만 하지.’
-가만. 그런데 왜 삼 공자와 오 공자 파벌은 없는 거지?
‘삼 공자는 이 공녀에게 붙었거든. 애초에 무공이 약한 자신이 하나의 계파를 이끌 능력이 없다는 걸 인정한 거지.’
-흥! 꼴에 주제 파악은 하는구나. 그럼 오 공자는?
‘글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오 공자는 권력에 관심이 없는 것 같더군. 지금도 유유자적 강호 유랑이나 하고 있다나?’
-그럼 넌 이번에 어느 쪽을 선택할 거냐? 당연히 파천계겠지? 그래도 일 공자니까 말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권왕계를 선택할 생각이야.’
-뭐? 거기가 제일 약하다면서?
그렇다.
세 가지 파벌 중에서도 가장 입지가 약한 곳.
그래야 자신이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데 걸림돌이 없을 것이다.
지금 일 공자의 파천계에 들어가면 이미 먼저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같은 녀석들이 가만있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자신을 낙인찍은 이 공녀의 월희계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역시 사 공자의 권왕계가 가장 만만하다.
특히 권왕계를 선택하면 이번 진급시험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바로 사 공자의 호법 자리다.
현재 사 공자는 호위가 없는 상태다.
이에 사 공자는 이번 진급 심사를 통해서 자신의 수신호위를 모집하겠다고 공표했다.
대주나 단주의 직책은 아니지만, 다섯 전주의 호법은 당주급 직책과 맞먹는 처우를 해준다.
특히 어딜 가든 사 공자를 그림자처럼 따르게 될 테니 모든 정보에 접근하기가 용이해진다.
-호오, 만약 사 공자가 후계를 잇기라도 하면 정말 높은 지위까지 오르겠군.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흑천련주의 수신호위가 된다.
그러면 모든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다만 지금은 어떻게든 사 공자의 호법이 된 후, 그를 도와서 흑천련의 실권을 장악할 생각이다.
흑천련의 진급 심사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매번 그 방식이 달라지는 것 또한 특징이다.
-매번 달라진다니?
‘지난번 진급 심사 때는 생사결이었다.’
-생사결?
‘그래. 누군가 흑룡대주 자리를 원한다면, 흑룡대주인 나와 생사결을 펼치는 식이었지.’
-아주 단순무식한 방식이군.
‘하지만 그 전에는 굉장히 복잡한 방식으로 진행했었어. 매번 달라지지.’
-그럼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치러지는 거냐?
‘몰라. 당일에 발표할 테니 그때 가봐야 안다.’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이쯤일 텐데.”
오늘은 여추백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몸을 회복한다는 핑계로 병가를 내놓은 상태였는데, 아침부터 여추백이 다짜고짜 약속을 잡은 것이다.
마침 저만치 정자에서 여추백이 손을 흔들었다.
“여깁니다! 대주님!”
적비연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정자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이게 다 뭐냐? 낮술이라도 하려는 거냐?”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휴가 중이지 않습니까?”
“명색이 병가다.”
“원래 병은 술로 고치는 거죠.”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자, 받으십쇼. 대주님.”
“왜 이러는 거야? 무슨 부탁을 하려고.”
“에이, 섭섭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꼭 무슨 부탁할 때만 이러는 줄 알겠습니다.”
“사실이잖아.”
“음…… 그런가? 하하하. 뭐, 사실 날도 좋은데 대주님과 이렇게 여유롭게 한잔하고 싶었습니다. 아? 여기요!”
대꾸하던 여추백이 돌연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들었다.
적비연의 시선이 자연히 그가 보는 곳을 향했다.
곧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에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시라고요. 이런 날씨에, 이런 술자리에 시커먼 남자 둘은 좀 그렇잖아요?”
적비연이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추백이 손을 흔드는 곳에는 기녀 둘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대낮에 기녀를 정자로 불러서 술이나 마시자고 할 줄이야.
게다가 기녀 중 한 명은 바로 오래전 반철룡과 동침 아닌 동침을 했던 그녀였다.
이름이…….
‘화령(花寧)이라고 했던가?’
여추백이 얼른 일어나 두 여인을 안내했다.
“어서 오시오. 자자, 이리로 앉으시고.”
그의 안내에 따라 화령이 반철룡 곁에 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주님.”
화령이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왔다.
다시 보니 그녀는 제법 단아한 인상이었다.
기녀라는 직업을 잊고 본다면 마치 어느 세가의 여식으로 보일 것만 같았다.
“오랜만이오.”
적비연의 대답에 화령이 살짝 미소 지었다.
-보기 좋구먼. 왜 그렇게 싫어했던 거야?
‘나도 모르지. 반철룡이 싫어했던 거니까. 아니, 싫어하기보단 관심이 없었던 거지.’
-그건 주인하고 비슷하구나. 그래서 주인이 반철룡 몸으로 환생한 건가?
‘별걸로 다 엮는군.’
-아무튼 저 착한 녀석이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줬으니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말고 잘해봐라. 하악.
‘뭘 잘해? 그리고 그 숨소리는 뭐냐?’
-내 숨소리가 어때서? 하악.
‘됐다. 아무튼 오늘도 아무 일 없을 거다. 그 짓 할 여유가 없다.’
-이런 답답한지고! 자고로 영웅호색이라고 했거늘! 강호일통을 하려면 호색한이 되어야 하는 걸 모르는가!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하지 마라.’
-주인은 강호일통을 이룰 자격이 없다!
‘영웅호색이라는 조건에 맞지 않아서?’
-당연하다!
‘그런데 왜 네가 화를 내는 거냐? 왜 네가 흥분하고?’
-그, 그건……! 내, 내가 언제 흥분했다고 그러냐!
‘너…… 관음증 있냐?’
-뭣이? 이 몸이 맘만 먹으면 여자들이 줄을 섰거늘! 고작 관음증이라니!
‘뭐, 과거엔 그랬을지라도 지금은 육신이 없으니 아무것도 못하잖아?’
-그야 그렇지만…… 제길! 그래! 나도 좀 대리만족도 좀 하려고 했다! 주인은 너무 유흥이 없단 말이다! 난 정말 이러다가 미쳐 버릴 것 같다! 여자를 안을 수도 없고! 박 터지게 싸워서 피맛을 볼 수도 없고! 이렇게 둥둥 떠다니기만 하는 게 보통 고역인 줄 알아? 내 욕구는 어떻게 풀라는 거야?
‘그건 좀 힘들 것 같네.’
-그렇지? 그러니까 이번엔 날 봐서라도 호색한이 되어주라. 정말 보기만 할 테니까. 하악.
극마는 이제 두 손을 맞잡고 침이라도 흘릴 표정이었다.
‘이런 미친놈…….’
적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화령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 소녀가 고집을 부려 기분이 언짢으신 건지요?”
“아, 그런 건 아니오. 잠시 생각을 하고 있었소.”
“꼭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천박한 몸이지만 이리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천박하게 생각하지 않소. 그리 낮추실 것 없소.”
화령이 빙그레 웃으며 술을 따라주었다.
“대주님은 여전하시네요.”
적비연이 술을 받으며 물었다.
“한데 날 왜 그리 보려고 했소?”
화령이 멈칫하더니 어딘지 그윽한 눈길로 적비연을 보았다.
“실은 오래전부터 대주님을 알고 있었답니다.”
“오래전부터?”
“혹, 십여 년 전에 홍등가 뒷골목에서 파락호들에게 겁간당할 뻔한 아이를 기억하시는지요?”
“십여 년 전?”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십여 년 전이면 반철룡이 막 약관을 지났을 때였다.
서호 뒷골목에서 파락호에게 겁간당할 뻔한 아이라.
“아……!”
기억난다.
그 해가 바로 흑룡대 막내로 입련했을 때였다.
혈기왕성한 그때, 동네 파락호들이 뒷골목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겁간하려던 걸 막은 적이 있다.
정의 구현 따위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어릴 적에 동네 뒷골목에서 쓰레기통이나 뒤지던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여아 역시 꼬질꼬질한 것이 자신의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기에.
그렇다고 그 여아를 먹여 살릴 자신은 없었기에 기루에 데려가서 먹고살게는 해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흑룡대원의 부탁이라고 기루에서 마다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하면…….
“네, 그때의 아이가 바로 저랍니다.”
-허참,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는군. 역시 강호의 연은 모르는 법이야.
화령이 말을 이었다.
“강호에서 좋은 인연만큼 강한 무기가 없다지요?”
“나더러 그 무기가 되어달란 소리라면…….”
“아뇨. 이번엔 부족하나마 제가 무기가 될 수도…….”
그때였다.
“여어, 이게 누구야? 요즘 소문 자자한 반 대주 아냐?”
적비연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정자 아래에 한 무리의 무인이 이죽거리며 서 있었다.
적비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시답잖은 놈은 누구냐?
극마가 물었다.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반철룡의 천적. 혈성단주(血星團主) 마영후(馬瀛煦)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영후가 이죽거리며 말을 뱉어냈다.
“병가를 냈다더니…… 이제 보니 이런 곳에서 쳐놀고 자빠졌네?”
그러자 화령이 얼른 나섰다.
“오해이십니다. 이분은 제가 억지로 간청하여 이 자리에 모신…….”
짜악!
“악!”
순간 주변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적비연도 미간을 좁히고는 마영후를 노려보았다.
화령의 뺨을 후려친 마영후가 목을 우둑 꺾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어딜 천한 것이 끼어들어, 끼어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