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전화위복
끼이이익, 철컹!
육중한 철문이 닫히면서 적비연은 어두컴컴한 곳에 홀로 남았다.
그나마 저만치 높은 벽 위에 손바닥만 한 창이 나 있는 게 작은 위로가 됐다.
-꼴좋다! 꼴좋아! 흥!
극마가 팔짱을 낀 채 잔뜩 심술이 난 듯 소리쳤다.
이럴 때는 좀 시끄러워도 극마가 있어서 심심하진 않다는 생각도 든다.
안 그랬으면 이 어두컴컴한 뇌옥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어야 했을 테니.
적비연이 마영후의 손목을 잘라낸 순간,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혈성단원들이 대거 나타나더니 구경하던 사람들을 물리기 시작했고, 단주인 마영후를 부축해서 옮겼다.
마영후는 수하들의 부축을 뿌리치면서 반철룡을 죽여 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쳐 댔다.
정말이지 눈이 뒤집혀서 발악하는 그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하긴. 평생을 사용해 왔던 오른손이 순식간에 날아갔으니 그 분함을 온몸으로 표현해도 모자랐을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도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던 반철룡에게 당했으니 그 원통함이 오죽했으랴.
결국 소란은 수라당주(修羅堂主)가 도착한 후에 진정됐다.
제 아무리 마영후라도 자신보다 상관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처세술이 뛰어난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다만 수라당주 역시 월희계였기에 마영후를 엄하게 꾸짖진 않았다.
대신 적비연에게 모든 화가 돌아왔다.
수라당주는 전후사정을 따지지도 않고 적비연을 곧장 수라당 뇌옥에 가두라 명한 것이다.
조직 내의 하극상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라며.
-그러게 좀 참지. 젠장할! 이 꼴이 뭐냐?
‘어째 나보다 네가 더 분한 것 같다만.’
-답답해서 그런다! 이제 앞으로 어쩔 거냐? 이 시커먼 감옥에 갇혀서! 정말 생각만 해도 속상하다! 내 하룻밤이 날아가 버렸다고!
‘네 하룻밤?’
-그래! 주인이 그 아이와 같이 뜨거운…… 커험. 흠.
‘역시 그쪽이었군. 욕구불만 관음증 변태.’
-크익!
순간 극마가 적비연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결국 긴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혀를 찬 극마가 적비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자세였지만, 덩치만큼은 어른이 서 있는 것보다도 컸다.
-그나저나 어쩔 거냐?’
‘글쎄. 어떻게 돌아가는지 두고 봐야지.’
-두고 보긴. 이대로면 진급 심사도 보지 못하는 것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고.’
-그럴지도 모른다니? 그런데 이렇게 태연하게 있는 거냐?
‘아닐지도 모르니까.’
-허 참! 도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당최 주인 생각을 모르겠군!
‘그래서 내가 주인이고 네가 멍멍이인 거다.’
-으아아! 더는 못 참겠다!
극마가 적비연을 향해 마구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거대한 주먹은 번번이 적비연의 몸을 통과할 뿐이었다.
한참이나 허공에 분풀이를 한 극마가 씨근거리다가 슬쩍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거…… 뭐였냐?
‘뭐가?’
-내가 모를 줄 아냐? 주인이 그놈 손모가지를 자를 때, 평소에 보지 못한 검초였다.
그랬다.
당시 적비연은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딱히 어떤 생각을 하고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본능적으로 그런 행동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분명 상승의 무리를 담아낸 꽤나 훌륭한 검초였다.
어떠한 강호 명숙이 보아도 놀랄 만큼.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때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반철룡의 사색이 통한 것 같다.”
-반철룡의 사색?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그놈처럼 맨날 바위 절벽에서 멍 때리더니 득도라도…… 가만, 그렇다면……?
극마가 말끝을 흐리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식 하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매번 바위 절벽에서 서호를 내려다보던 그 습관 덕분에.
-어디 한 번 보자. 검수해 주마.
극마가 흥분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영혼밖에 없다지만 그래도 무인이라고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반응이 달라졌다.
적비연은 마다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검을 뽑아 든 것처럼 기수식을 취했다.
실제로 검은 없지만 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들숨과 날숨.
가상의 검을 든 채 천천히 심호흡했다.
-잠깐.
극마가 적비연 앞으로 다가가더니 기수식을 취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손끝에서 유형의 기운이 칼날처럼 길쭉하게 솟아났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한 번 붙어봐야 알 수 있지.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와라.
극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타앗!
적비연이 바닥을 차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쉬이이잇!
극마가 마찬가지로 검을 베어 올리며 마주쳐 갔다.
두 자루의 검이 마주치려는 순간,
팟!
-음?
극마가 미간을 좁혔다.
일순 적비연이 든 가상의 검신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만 같았다.
실제로 검이 존재한 건 아니지만, 검을 들고 있었다면 딱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검로를 놓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변초인가?
그렇다면 검을 회수해서 방어에 신경 써야 한다.
그렇게 멈칫하는 사이,
쉬아아악!
적비연의 검신이 다시 나타나면서 극마의 손목을 잘라냈다.
극마의 손목이 연기처럼 풀썩 흩어지다가 다시 나타났다.
적비연이 손을 쥐었다 펴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통한 것 같지?’
-그, 그런 것 같군.
극마는 다소 멍한 표정이 되어서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그는 곧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쳤다.
-흥! 하지만 내 육신이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런 가상의 대결은 제대로 된 게 아니지!
‘원래 실력도 없는 것들이 패자가 되고서도 말이 많지.’
-뭐, 뭐얏!
적비연은 노발대발 소리치는 극마를 무시했지만, 내심 그의 말을 인정하고는 있었다.
극마의 말대로 그에게 육신이 있었다면 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초식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다.
그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 한들 육신이 없다면 그 강함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다.
어쨌거나 그렇다고 쳐도 방금 보인 초식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쳇, 어떻게 한 거냐?
‘단교잔설(斷橋殘雪).’
-음? 뭔 소리냐?
‘이 초식명이다.’
적비연이 극마를 돌아보며 웃었다.
단교잔설.
서호의 십경 중 하나다.
서호의 제방에 쌓인 눈이 봄이 되면 가운데 부위가 먼저 녹게 된다.
한데 이 풍경을 멀리서 보면 마치 새하얀 다리가 이어지다가 뚝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단교잔설 초식은 바로 이 풍경을 보고 응용하여 만든 것이었다.
-과연! 그래서 네놈의 검로가 중간에 뚝 끊어진 것처럼 보였구나! 마치 검이 사라진 것처럼!
확실히 마선의 경지까지 올랐던 자답게 극마는 단교잔설 초식의 요점을 제대로 파악했다.
그랬다.
단교잔설 초식은 새하얀 눈처럼이나 극음의 기운으로 펼치게 된다.
하지만 검로 중간에 양의 기운을 일순간 불어넣는다.
물론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적비연은 여러 사람의 일생을 살면서 저절로 습득한 무공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극양의 기운과 극음의 기운을 그때그때 변환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사기와 정기를 뒤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상대방 입장에서는 검신이 일순간 사라진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극음으로 치고 오는 상대에게 모든 정신을 집중했는데, 그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지니 당황할 수밖에.
그러나 검로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일종의 착시 현상 같은 것이다.
그렇게 상대가 멈칫거리는 사이, 적비연의 검신은 반 박자 빠르게 적을 베는 것이다.
적의 입장에서는 마치 적비연의 검신이 중간에 사라졌다가 자신의 검신을 통과하면서 그대로 손목을 잘라낸 것처럼 보이리라.
-훌륭하군.
웬일로 극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하긴.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면 다른 초식은?
‘아직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어.’
-검법 이름은 정했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호검법(西湖劍法).’
-과연. 서호를 보고 영감을 받아 지었다는 것인가?
‘그중에서도 서호십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지.’
그렇다.
서호검법은 서호십경의 영향을 받은 검법이다.
모두 열 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호십경의 이름과 똑같다.
사실 우연히 단교잔설을 사용하고 나서는 나머지 아홉 개의 초식이 저절로 떠올랐다.
마치 그간 고뇌하면서 고여 있던 깨달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기분이었다.
-제대로 무공을 창안한 모양이군. 하지만 그래 봐야 소용이 없어졌잖아. 지금 이렇게 갇힌 꼴이니.
‘오히려 잘된 거지. 이 기회에 폐관 수련한다고 생각하면 돼. 뭐, 네가 옆에서 짖지만 않으면 딱이겠지만.’
-짖, 짖다니! 말이 심하다, 주인!
‘그럼 내가 집중할 수 있도록 이제 입 좀 다물어.’
-쳇, 알겠다. 그 전에 하나만 묻자.
‘뭔데?’
-폐관 수련을 해도 진급 심사를 볼 수 없으면 무소용이 아니냐?
‘진급 심사는 볼 거다.’
-확신하는 거냐?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당연하지.’
-왜 그렇게 믿는 거지?
극마의 질문에 적비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내공 한 푼 없는 여인이었지. 그녀가 마지막에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야.’
-흐음. 주인 예상이 맞길 바란다. 그래야 주인과 그 여인이 달콤한 하룻밤…….
‘단언컨대 네가 상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쳇! 꽉 막힌 주인 같으니라고!
극마가 팔짱을 끼고서는 휙 돌아앉았다.
적비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았다.
깨달음이 오려고 할 때 잘 잡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무공을 창안 하는 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극마도 더 이상은 적비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 * *
꼬박 칠주야가 흘렀다.
적비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슈우우우우.
그의 주변으로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던 기운이 전신으로 갈무리됐다.
꼬박 이레가 지나는 동안 적비연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좌선수양만 했다.
그리고 이제야 눈을 뜬 것이다.
용케도 극마는 지금까지 침묵을 지켜주었다.
-완성됐냐?
극마가 툭 던진 물음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비연이 가상의 검을 쥐고 기수식을 취했다.
극마는 옆으로 물러나서 말없이 지켜보았다.
타앗!
순간 적비연이 바닥을 차며 쏘아져 나갔다.
서호검법의 첫 초식, 단교잔설!
그 뒤를 이어 두 번째 초식인 평호추월(平湖秋月), 그다음에는 쌍봉삽운(雙峰揷雲)이 차례대로 펼쳐졌다.
쉬이잇! 쉭쉭쉭! 쒸에엑!
비록 진짜 검을 든 것은 아니지만, 극마의 눈에는 그 무형의 검이 보이는 듯했다.
이윽고 마지막 초식 화항관어가 펼쳐졌다.
모란꽃이 흐드러지게 핀 듯 전신에서 붉은 기운이 퍼져 나갔고, 적비연의 검신은 수십, 수백 개로 쪼개지면서 헤엄치는 비단잉어 떼를 만들어냈다.
촤아아아앗!
마지막 검초를 끝낸 적비연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뚝……!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극마가 씨익 웃었다.
-초절정 사 단에 올라섰구나.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확실히 무공 성과가 있었다.
뇌옥에 갇힌 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이제 나갈 때가 됐는데…….’
마치 적비연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뇌옥을 지키는 간수였다.
그는 모처럼 눈을 뜨고 서 있는 적비연을 보고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루 종일 정좌한 채로 식음을 전폐하기에 걱정했는데, 지금 보니 오히려 더 기운이 넘쳐나 보인다.
간수가 문을 열며 말했다.
“석방입니다.”
극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간단히?
‘내가 뭐랬나? 풀려날 거라고 했지?’
-대체 그 아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월희마녀가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뭐,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이제 차차 알아보면 될 일이지.’
적비연이 씨익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럼 이제 계획을 진행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