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23화 (124/301)

123. 원수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드디어 자유군.’

-축하한다. 주인.

적비연이 내원 정문을 나서면서 계단 아래 외원 밖으로 펼쳐진 서호의 전경을 보았다.

서호검법을 탄생시킨 장소여서 그런지 여느 때보다도 더 친숙한 경치 같다.

그런데 한쪽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돌려보니 크고 둥근 건물 한 채가 막 지어지는 것이 보였다.

신축 건물이었는데, 건물 안쪽으로 인부들이 연신 잡기들을 나르고 있었다.

아마도 마무리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대략 전각 대여섯 채를 합친 정도의 크기였기에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큰 건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적비연이 내원의 수문지기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짓는 것이 무엇인가?”

“이번에 진급 심사를 치를 곳이라고 합니다.”

“심사 방식은 공표되었는가?”

“아직입니다. 심사 당일에 발표할 것으로 보입니다.”

“잘 알겠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부터 뭘 할 거냐?

‘글쎄.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

-그 여자를 찾아가 봐야 하지 않겠냐? 그 여자가 말하는 분위기를 보면 뭔가 있던 모양인데. 그게 뭔지 알아보자.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극마를 돌아보았다.

‘그건 정말 순수한 궁금증인가?’

-그, 그럼 순수한 궁금증 이외에 뭐가 있단 말이냐!

‘그런데 왜 말을 더듬지?’

-누, 누가 말을 더듬었다고 그래? 설마 내가 아직도 주인과 그 아이가 하룻밤을 보내는 걸 기대하고 있을 줄 아느냐! 이젠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누가 뭐랬어? 점점 더 수상해.’

-흥! 내가 말을 말지!

극마가 팔짱을 끼고는 휙 돌아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극마의 말대로 확실히 그녀는 뭔가 있다.

‘좋은 인연만큼 강한 무기도 없다는 건가…….’

과연 그녀가 가진 무기라는 게 무엇일까?

어떻게 이토록 간단히 자신을 뇌옥에서 빼냈을까?

마영후의 손목을 자른 직후 화령은 적비연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시)“대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반드시 별 탈 없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잠시만 참으세요.”#(회끝)

그 말을 건네는 그녀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단지 위로하기 위해서 의미 없이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적비연은 그 눈빛에 담긴 의지를 믿은 것이다.

근거가 없다면 결코 그런 눈빛을 보일 수 없으니까.

하지만…….

‘거긴 찾아가지 않을 거야.’

-뭐? 왜? 어째서? 칠주야나 굶주렸으면 당연히 기루부터 찾아야 하거늘! 그것도 눈 빠지게 기다리는 너의 여인이…….

‘것 봐. 역시 넌 그쪽이었어.’

-커흠! 농, 농담이다! 아무튼 왜 안 찾아가겠다는 거냐? 넌 궁금하지도 않냐?

‘궁금하긴 하지만…… 그쪽은 내가 찾지 않아도 먼저 찾아올 테니까.’

-쳇, 목석같은 인간. 그럼 이제 뭘 할 거냐?

‘동료들을 찾아봐야지. 지금쯤이면 항주에 도착했을 테니까.’

단휘와 예홍, 그리고 임송화와 현청이 흑천련에 도착할 때가 됐다.

특히 예홍이 하천웅의 실종 소식을 접하고 제대로 버티고 있을지 모르겠다.

-임송화와 현청에게는 뭐라고 말할 거냐? 네 비밀을 알려줄 거냐?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자고로 비밀이란 최소한의 인원만 알고 있어야 하는 법.

우선 단휘와 예홍에게만 사실을 알릴 생각이다.

‘내가 반철룡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긴 하네.’

* * *

내원 동남쪽에 위치한 월희전.

이 층 창가에서 저만치 계단을 내려가는 적비연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검은색 칼날을 부채처럼 펼치고 살랑살랑 젓는 여인.

바로 월희마녀 사예린이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대사형이 나섰다고?”

“예, 아가씨. 어떻게든 진급 심사 때까지는 버텨보려고 했으나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이…… 죄송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사내는 바로 수라당주 진천규(眞天奎)였다.

화항관어에서 소란이 있었을 때, 제일 먼저 나섰다가 적비연을 뇌옥에 가둔 자이기도 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큰일도 아니니 그만 풀어주라고 하였으나, 왠지 반 대주를 영입하려는 의도가 보였습니다.”

“그렇겠지. 상징이 될 테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본 계의 단주가 대주급 지위에게 개박살이 났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손모가지를 잃었지. 하극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직속 상하관계가 아닌 만큼 유야무야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고. 그런 자를 대사형이 영입하면 본 계의 위상이 추락하는 건 당연지사. 반 대주는 자신을 구해준 자가 대사형이라는 걸 알면…… 그쪽 줄을 잡으려고 할 거고.”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하지만 조금 이해가 안 되긴 해.”

“어떤 점이…….”

“대사형은 이렇게 작은 일로 나설 사람이 아냐. 굵직한 한 방을 노리는 성격이지. 어딘지…… 대사형과 어울리지 않다고나 할까?”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그래. 하지만…….”

사예린이 싱긋 웃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어차피 반 대주는 진급 심사에서 벽을 넘지 못할 테니까. 안 그래? 마 단주?”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뒤에는 부복한 채 머리를 조아리는 마영후가 있었다.

잘려 나간 오른손 대신 기다란 칼이 손목에서부터 이어져 있었다.

그가 바닥에 머리를 쿵 찧으며 소리쳤다.

“물론입니다! 전주님! 이번만은 절대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실수가 없어야지. 이번에 실수하면 죽는걸?”

“명심하겠습니다!”

쿵!

마영후가 다시 한번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사예린이 그의 손에 이어져 있는 칼날을 보며 말했다.

“그래, 기대할게. 모처럼 교 선생께서 그렇게 멋진 선물을 주셨으니 잘 써먹어야지?”

* * *

보석객잔(寶石客棧).

적비연은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걸신들린 듯 먹어치웠다.

칠주야를 물도 마시지 않고 버텼더니 뒤늦게 허기가 몰려온 탓이다.

어찌나 정신없이 먹었는지 주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점소이는 연신 음식을 날랐고, 적비연이 앉은 탁자 위에는 빈 접시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적비연이 부른 배를 두드리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마주 앉은 여추백이 울상이 되어서는 탁자 위에 수북하게 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요즘 뇌옥에서는 밥도 안 줍디까?”

“주더라. 그래도 대주라고 제법 찬거리도 갖춰서 주더라.”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처먹…… 아니, 드시는 겁니까?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으십니까?”

여추백은 이제 거의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석방 기념으로 자신이 한턱 쏘겠다고 큰소리를 친 탓이다.

많이 먹어봐야 평소 좋아하던 동파육이나 두어 접시 시킬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래서야 거의 두어 달 치 봉급이 순식간에 사라진 셈이 아닌가?

적비연이 여추백을 보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억하심정 있지.”

“저한테요? 왜요?”

“너 때문에 내가 뇌옥에 갇혔잖냐?”

“그건 그 쓰레기 같은 마 단주가……!”

발끈해서 소리치던 여추백이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마 단주 때문이잖아요.”

“널 만나러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그런 일도 없었겠지.”

“네에, 네. 그렇지요.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때려죽일 놈이지요.”

“뭐, 때려죽일 정도까지는 아니고.”

“허!”

여추백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 일에 대한 책임감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턱 쏘겠다고 한 것이고.

그런데 이렇게까지 처먹…… 드실 줄은 몰랐다.

“하아. 오늘은 제가 쏘지요. 다음부터는 대주님이 두 달간 쏘십시오.”

“이런 걸 사 주고도 욕먹는다고 하는 거다.”

“지난번에도 사 주고 욕먹고, 이번에도 사 주고 욕먹고, 제 팔자가 그런 가봅니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여추백은 값을 조금이라도 더 깎기 위해서 점소이와 한참이나 실랑이를 하던 끝에 겨우 계산을 마쳤다.

여추백이 적비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나저나 대공자께서 이 기회에 대주님을 영입하려는 것 같습니다.”

“대공자? 파천신군(破天新君)?”

파천신군은 일 공자의 별호였다.

“예, 대공자님이 압력을 행사해서 대주님이 풀려났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렇게 된 거군.”

적비연의 대답에 극마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그 아이가 파천신군을 움직였단 말이냐? 어디서 그런 수완이 난 거지?

‘글쎄, 그건 차차 알게 될 거라니까. 서두르지 마라. 뭐라 해도 네가 원하는 일은 안 일어난다.’

-쳇!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네네, 그러시겠지요.’

-크익!

극마가 이를 빠득빠득 가는 사이, 여추백이 질문을 이었다.

“이 기회에 파천계 쪽으로 가시죠?”

“넌?”

“저는 대주님만 따를 겁니다.”

“왜? 대주 자리가 빌 텐데. 그 자리를 한번 노려보지.”

“대주님 없으면 심심해서 싫습니다.”

피식.

적비연이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정파에 알려지길 사파는 그저 피와 살육만을 즐기는 괴물 집단처럼 묘사되었는데, 이럴 때보면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지 않은가?

오히려 명문정파일수록 비열하고 치졸한 암계를 많이 쓰는 것 같단 생각마저 든다.

-그걸 이제야 알았냐? 원래 명분을 중시하는 것들이 더 비열한 법이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그 명분과 반대되거든. 한데 욕망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명분을 만들기는 쉽지.

어느 정도 인정하는 말이었기에 적비연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보석객잔을 막 나섰을 때였다.

마침 객잔 안으로 들어오려던 일행과 여추백이 어깨를 부딪쳤다.

그렇잖아도 목돈이 순식간에 날아간 여추백이 괜한 심술로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며 돌아섰다.

“어이! 부딪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것 아냐?”

멈칫.

객잔 안으로 들어가려던 세 사람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죽립을 깊이 눌러쓴 자들이었는데, 여추백과 어깨를 부딪친 사람은 체구가 조금 왜소한 것이 여인인 듯했다.

죽립을 쓴 남자가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살짝 숙여 보였다.

“미안하오.”

“자네가 왜 미안하나? 부딪친 건 이쪽인데? 여자면 잘못을 해도 사과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도 되나?”

여추백이 손을 뻗어 여인의 어깨를 잡았다.

순간 여인이 돌아서면서 여추백의 손을 쳐냈다.

탁!

여추백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 팔이…….”

여인이 발끈해서 나서려는 것을 남자 죽립인이 얼른 막아서며 말했다.

“누이가 장애가 있어서 좀 예민하오. 형장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좀 해주시오.”

“쳇!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이해해 줘서 고맙소.”

남자 죽립인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잠깐.”

적비연이 그들을 불러세웠다.

다시 멈칫거린 세 사람이 돌아섰다.

저벅저벅.

적비연이 천천히 다가가 검집을 내밀어 죽립을 들어 올렸다.

“이곳 사람이 아니군.”

반철룡은 평생을 서호에서 살았다.

그의 기억을 이용해서 이 세 사람이 외지인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유랑 중이오.”

“유랑이라. 좋군.”

“이제…… 그만 가봐도 되겠소?”

죽립인의 물음에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어딜 가려고 그러나?”

“오늘은 이곳에서 묵을 생각이오.”

“한데 묘한 조합이군. 남자 둘에 여자 하나. 둘은 오누이라치고. 저쪽은 뭐지?”

적비연이 죽립을 쓴 남은 사내를 가리켰다.

“시종이오.”

“시종이 무공을 익혔군.”

“누이의 호위 임무를 맡고 있소.”

“장강의 거머리에게도 호위가 필요한가?”

“……!”

“산야에 묻혀 지내야 할 처지에 어찌 이런 번잡스러운 곳까지 왕림하셨을까?”

순간 죽립을 쓴 여인이 혀를 찼다.

“칫!”

찰나,

취리리리릿!

여인의 손에서 붉은 채찍이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차아앙!

적비연이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채찍이 튕겨 나갔다.

쉬이이이잇!

이번에는 죽립 쓴 사내가 그대로 검을 뽑으며 횡으로 그어왔다.

적비연이 얼른 사선으로 검을 내려치며 막았다.

따아앙!

촤아아앗!

미끄러지듯 물러난 죽립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 이런……!”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왜? 못 본 사이에 내 무공이 좀 나아진 것 같나? 미계수.]

“……!”

다음 순간,

슈슈슈슈슉!

세 명의 죽립인을 에워싸며 시커먼 그림자들이 소낙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차차차차앙!

그들 모두 시퍼런 검신을 뽑아 들고는 죽립인들을 겨눴다.

적비연이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순순히 따라오지 그래? 여기가 어딘지 안다면 본대를 전부 상대할 객기는 부리지 않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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