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원수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까득.
엄지손톱이 이에 물려 부러져 나갔다.
그럼에도 동소유는 더욱 바짝 엄지손톱을 이로 물어뜯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미계수가 넌지시 일렀다.
“소저, 자꾸 그렇게 손톱을 물어뜯으면 병에 걸릴 수 있소.”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동소유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면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겼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었기에 그녀의 움직임은 유난히 부산스러워 보였다.
창문도 하나 없는 방.
뇌옥은 아니다.
흑룡대가 사용하는 취조실이다.
한데 이곳에는 미계수와 동소유밖에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미계수의 말에 동소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도요! 어떻게 우리를 알아본 걸까요?”
“아니,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어째서요? 우린 인피면구도 쓰고 완벽하게 변장했잖아요.”
“그러기엔…….”
미계수의 시선이 동소유의 왼팔로 향했다.
동소유가 혀를 차고는 왼쪽 어깨를 어루만졌다.
“칫, 강호에서 왼팔 잃은 무인이 어디 한둘인가요?”
“한둘은 아니지만, 그리 흔하지도 않지.”
“그럼 가가는 뭐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자의 실력이오.”
“실력? 반 대주 말인가요?”
“그렇소.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소?”
동소유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겨우 손 한 번 섞어본 게 전부니까요.”
“하긴. 채찍은 검과 달리 상대의 기감을 좀 더 확실히 잡아내기 어렵지.”
“흥! 지금 제 무기를 무시하는 건가요?”
“에이, 그런 뜻은 아니오.”
미계수가 손을 휘젓고는 생각에 잠겼다.
“흐음. 내가 반 대주의 실력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
하긴.
반철룡과 검을 섞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강한 내공을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사절단을 안내할 때만 해도 그가 이렇게 강한 자일 줄은 몰랐으니까.
동소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거나 우린 이제 큰일 났어요. 흑천련 전체가 지금 하천웅과 조력자를 찾느라 혈안이에요. 그런데 호랑이 굴에 제 발로 찾아와 잡힌 격이 되었다고요.”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봅시다.”
“지금쯤 하천웅의 정체가 들켰겠죠?”
“글쎄……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겠소?”
미계수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흑룡대는 자신과 동소유를 같은 취조실에 가둬두고는 하천웅만 따로 불러냈다.
만약 그의 정체가 발각되면 흑천련이 발칵 뒤집히리라.
해변에서 그 난리를 친 하천웅이니 아마 살아서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그럼 사활침의 해법을 찾지 못한 미계수 역시 살아남을 수 없게 될 테고.
하긴.
그렇게 되면 그 전에 이미 흑천련에서 참수당할지도 모른다.
흑천련의 원수나 다름없는 하천웅을 구해준 게 들켰으니.
‘골 아프네. 정말.’
언제나 긍정적이던 미계수도 이번만큼은 눈앞이 캄캄했다.
* * *
어두컴컴한 방안에 횃불 하나만 일렁였다.
방 가운데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앞에 앉은 하천웅이 연신 손가락으로 입술을 뜯고 있었다.
실제로 입술 일부분이 뜯어져 나갔는데 피는 나지 않았다.
진짜 피부가 아니라 인피면구가 뜯긴 것이라서 그랬다.
방 한쪽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적비연이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의자를 꺼내 소리 나도록 내려두었다.
쿵!
하천웅이 어깨를 움츠리며 화들짝 놀랐다.
그가 적비연의 눈치를 연신 살폈다.
“모, 모든 걸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적비연이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저자에게 침을 놓았고, 저자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을 구했다?”
“그,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기억을 잃었고?”
“그, 그렇습니다.”
“너는 저들에게서 네 업적에 대해 들었다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
“그 업적 중에는 본 련을 능멸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아는가?”
“……!”
하천웅이 벌떡 일어나서는 그 자리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듣긴 했습니다! 하지만 소인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용서한다고 될 일이 아닌데.”
“그, 그런……! 하면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제발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하천웅이 울상이 되었다.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빤히 바라보았다.
‘기억이 안 나는 건 진짜 같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찌질함은 그대로지만 뭔가 좀 더 순수해진 느낌이군.
‘기억을 잃어도 찌질함이 그대로 남는 걸 보면…… 타고난 천성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럴지도.
‘찌질함이 타고나는 거라면 악한 본성도 타고나는 걸까?’
-그건 본좌도 모르겠다. 하지만…… 타고난 것을 후천적 노력으로 극복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반대로 뿌리부터 뽑아 버릴 수도 있지.’
-혹시…… 이 녀석을 여기서 죽일 생각이냐?
‘고민 중이야.’
적비연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천웅을 살려두는 것이 과연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해가 될 것인가?
만약 해가 될 존재라면 뿌리부터 뽑아 버리는 게 낫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득이 될 가능성도 크다.
물론 당장 하천웅을 흑천련에 넘기면 포상을 받을 수도 있다.
어쩌면 특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진급은 심사를 통해서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하천웅을 살려두고 잘 이용한다면?
실제로 하천웅은 지금 벽력적가주를 은인처럼 여기고 있지 않은가?
만검세가주가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하천웅이 죽으면 더 이상 만검세가는 벽력적가를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내분도 일어날 수 있고.
역시 그렇다면…… 굳이 지금 죽일 이유가 없다.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진 써먹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행인 건 하천웅이 흑룡대에게 잡혔다는 사실을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흑룡대원들조차 그저 수상한 자를 생포한 것으로만 간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하천웅을 빼돌리는 걸 혼자 할 순 없을 것 같고…….’
역시 부대주의 협조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한 적비연이 하천웅을 빤히 보며 말했다.
“잘 들으시오. 그들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오. 당신은 비록 본 련의 원수가 되었지만, 난 당신의 의협심을 높이 사고 있소. 그리고 나 또한 벽력적가주를 존경해 마다하지 않소. 내 비록 사파에 몸을 담고 있으나, 벽력적가주는 정사를 막론하고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라고 생각하오.”
-또 시작됐구나. 넌 이런 말할 때마다 낯간지럽지도 않냐? 어째 좀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적비연은 극마의 빈정거림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하 대협께만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사실 하 대협을 사로잡은 어제저녁에 벽력적가주의 전갈을 받았소.”
그러자 하천웅이 두 눈을 부릅떴다.
“벽, 벽력적가주님이요?”
“그렇소. 나는 그분을 강호영웅처럼 생각하고 있소. 한데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길, 하 대협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고 하셨소.”
“아아, 세상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천웅은 정말로 감격한 듯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게 감사할 일은 아니오. 이 모든 게 벽력적가주님의 뜻이오. 적 대협께 감사하시오.”
“물, 물론입니다! 벽력적가주님은 제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하여, 나는 은밀하게 하 대협을 만검세가로 보내 드릴 작정이오. 이는 위험 부담이 매우 큰일이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제게 정말 그런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
“그만!”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자, 하천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았다.
“제, 제가 무슨 실수라도……?”
“당연히 실수했지! 내가 아니라 벽력적가주께 감사하래도!”
“아……!”
“이 모든 건 벽력적가주님의 안배란 말이오!”
“아,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천웅이 연신 고개를 숙였고, 극마는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적비연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 일은 위험 부담이 크오. 게다가 나는 지금 본 련의 수뇌인사들에게 다소간의 의심을 사고 있소. 그래서 이 일을 빠르게 진행할 순 없소. 하지만 이곳에 당신이 계속 갇혀 있어도 문제가 되겠지.”
“하면……?”
“나만 아는 장소에 당신을 가둬둘 생각이오. 만에 하나 당신이 천지분간 못하고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내가 곤란하니 어쩔 수 없이 가둬둘 수밖에 없소. 하지만 분명 장사로 돌려보내 드리겠소. 그러니 믿고 기다리시오.”
“아무렴요! 당연히 믿고 기다려야지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천웅이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하면…… 그 미친년…… 아니, 동소유라는 여인과 미계수라는 무인은 어찌……?”
“그들은 당분간 이곳에 갇혀 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할 거요. 당신을 그들로부터 떼어놓을 작정이오.”
“아, 감사합니다!”
하천웅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짐을 벗어던진 기분이었다.
그때 마침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대주님, 추백입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여추백이 안으로 들어섰다.
“절 찾으셨다고.”
“너는 하 대협을 어찌 생각하느냐?”
적비연이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자, 잠깐 멈칫거린 여추백이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했다.
“글쎄요. 본 련의 원수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말씀드리자면, 나쁘진 않습니다.”
“만약 하 대협과 마주치는 일이 생기면 어쩔 생각이냐?”
“으음. 난감하네요.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솔직하게.”
“모른 척하겠습니다. 대주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이미 하 대협께 약조한 바가 있어서 말입니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여추백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
근본 없는 녀석 같으면서도, 자신이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녀석이다.
그 기녀에게 자신을 끝까지 소개시킨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널 불렀다.”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왜 하 대협을…….”
말을 꺼내던 여추백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하천웅을 힐끔 보았다.
물론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기에 외모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눈빛과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릇에 담긴 혼이 다르니, 어찌 같은 느낌일까?
여추백이 지나친 상상을 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한데 적비연의 입에서는 웃지 못할 말이 튀어나왔다.
“그 약조를 지킬 때가 온 것 같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아니죠? 에이,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데…… 아니죠?”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지. 벗으시오.”
적비연이 하천웅을 향해 턱짓을 했다.
하천웅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목 부위의 피부를 잡아 뜯기 시작했다.
마침내 얇은 살가죽이 벗겨지는가 싶더니 그 아래로 진짜 하천웅의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다.
여추백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어…… 어, 어……?”
“하 대협을 내가 사는 집 지하로 옮길 생각이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진행해야 할 거다. 맡겨도 되겠냐?”
“안, 안 될 건 없지만…… 이, 이게 어떻게 된……?”
“자세한 건 나중에 따지자. 복잡한 사정이 있으신 것 같으니.”
“하아…… 좆됐네.”
여추백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흑천련 무인들이 혈안이 되어서 찾고 있는 하천웅이 흑룡대 취조실에 있다니!
게다가 이제부터 그를 숨겨야 한다고?
‘하아, 이래서 엄마가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고 한 거구나.’
여추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집무실을 나온 적비연은 그 길로 보석객잔으로 향했다.
사실 어제 낮에 보석객잔을 찾은 이유도 그곳이 바로 특임대의 접선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접선을 하기도 전에 뜻밖에도 미계수와 동소유, 하천웅과 맞닥뜨린 것이다.
어젯밤에 따로 찾아가 보았지만 도착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아마 늦어도 오늘 저녁에는 도착하리라.
적비연은 네 사람의 가짜 신분을 모두 알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 네 사람은 날 보면 경계부터 하겠지만.’
그렇게 서호 주변의 저잣거리를 지나서 조금 한적한 골목으로 막 접어들었을 때였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적비연이 어느 순간 우뚝 멈췄다.
사방이 고요하다.
하지만 이 고요함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무공 수위가 초절정 사 단에 이르면서 기감이 한층 예민해졌다.
“내게 볼일이 있으면 나서는 게 어떤가?”
적비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슈슈슈슈슉!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싼 복면인들이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살기는 없다.
마침 저만치 골목 사이의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오.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소?”
적비연이 입매를 틀어 올렸다.
“그렇잖아도 기다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