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25화 (126/301)

125. 귀문회(鬼聞會)

딸깍.

검은색 바둑알이 바둑판 위에 놓였다.

바둑알을 놓은 사람은 반듯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는데, 회색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것이 특징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오뚝한 코,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왠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냉정해 보였다.

그가 바로 흑천련주의 첫 번째 제자, 파천신군 이자권(李字權)이었다.

그리고 이자권을 마주 보며 앉아서 바둑을 두는 노인, 그는 바로 장로회주인 유형백(柳亨佰)이었다.

현재 장로회는 후계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의 입장이었다.

장로회가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순간 균형의 추가 눈에 띄게 기울 것이 분명하기에.

그런 만큼 흑천련주 역시 장로회가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입을 다물고 있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유형백이 이렇게 파천신군과 바둑을 두는 것은 그저 단순한 취미 생활에 지나지 않았다.

이자권이 어려서부터 유형백과 함께 바둑을 두곤 했기 때문이다.

유형백이 흰색 바둑알을 내려두며 말했다.

“흑룡대주를 석방시키는 데 압력을 넣었다고 들었네.”

“오지랖 좀 부려보았습니다.”

이자권이 담담하게 대꾸하면서 바둑판만 내려다보았다.

유형백이 그런 이자권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던가?”

“하하.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제법 되지 않습니까?”

“내게는 아이일세.”

“하긴. 회주님이 보시기엔 저도 아이겠지요.”

유형백은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물론 무공을 본다면 결코 아이라고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그저 정서적인 느낌이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봐오지 않았던가?

정식 사부는 아니지만, 련주 못지않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파천신군이 한때 파천신궁(破天神弓)으로 불린 것 또한 자신이 가르친 궁술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에야 궁뿐만 아니라 도검창을 고루 잘 다루는 괴물이 되어버렸지만.

유형백이 백돌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흑룡대주, 그 아이를 포섭한 건가?”

이자권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는 유형백을 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이제야 유형백이 진짜 궁금해하는 걸 알아챈 것이다.

유형백의 질문을 정확히 번역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자네가 그 아이를 이용해서 월희계의 혈성단주 손모가지를 자르도록 했나?’

만약 그런 것이라면 월희계에서 볼 때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정사가 대립하는 이 중대한 시기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걸 장로회는 원치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유형백은 자신에게 자중하길 권고하려고 이 자리를 만든 것이리라.

이자권이 흑돌을 놓으며 답했다.

“회주님이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후사정이 바뀌었습니다. 흑룡대주와 혈성단주 사이에 작은 불화가 있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제가 사람 욕심을 좀 내보았습니다.”

유형백이 한참이나 이자권의 눈을 응시하다가 이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자네가 그렇게 공격할 성격은 아니지.”

칭찬인 듯 아닌 듯 모호한 말투.

이자권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어릴 적 바둑을 처음 배울 때는 상대의 돌을 빼앗는 것만 집착했었지요.”

“그래, 맞아. 그랬지. 아주 오래된 일이구먼.”

“그때마다 회주님이 절 야단치시면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뭐라고 했나?”

“눈앞에 놓인 돌 하나를 보지 말고, 멀리 내다보라고. 결국 바둑은 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 집을 짓는 것이라고요.”

“그랬군. 틀린 말은 아니구먼.”

유형백이 껄껄 웃으며 백돌을 내려두었다.

이자권이 유형백을 보며 말했다.

“그때부터 저는…… 먼저 찌르는 것보다는 제 집을 쌓는 것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이자권이 흑돌을 내려두려는 순간,

흠칫!

이자권이 유형백을 보았다.

유형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긴 안 되네.”

이자권이 빙그레 웃었다.

이번에 놓는 한 수가 바로 신의 한 수였다.

이 바둑판은 흑돌의 승리가 되리라.

“늦었습니다.”

이자권이 다시 흑돌을 내려두려고 하자,

구오오오오……!

어마어마한 공력이 쏟아져 나오면서 바둑판의 돌들이 다르르 떨기 시작했다.

무형의 기운이 이자권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놓아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자권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이자권이 내력을 운기하면서 바둑알을 옮겼다.

고오오오오……!

두 사람의 내력이 허공에서 매섭게 격돌했다.

만약 이 자리에 범인이 있었더라면 두 사람이 뿜어내는 강맹한 기운에 진즉 질식사하고 말았으리라.

그럼에도 바둑알은 떨리기만 할 뿐 제자리를 지켰다.

바둑알이 하나하나 떠오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만큼 두 사람이 섬세하게 내력을 조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강하지만 거칠진 않다.

무자비하지만 막무가내는 아니다.

바둑판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데, 바로 옆의 창문은 기풍을 이겨내지 못해 연신 덜컹거렸다.

이러다가 창문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쳇!”

유형백이 혀를 차고는 기운을 거두었다.

딸깍.

결국 이자권이 흑돌을 원하는 지점에 내려놓았다.

잠시간의 내공 격돌이었음에도 유형백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과연 이자권은 초절정 상단에 이른 고수다웠다.

그런 이자권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계가(計家)하실까요?”

“새삼 헤아릴 게 뭐 있나? 내가 졌네.”

“한 수 배웠습니다.”

“하나만 물어보세.”

“말씀하시지요.”

“자네가 짓는 집의 한 기둥이 될 만한 인재라고 보는가? 그 흑룡대주가.”

이자권이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턱을 매만졌다.

“글쎄요. 기대는 걸고 있습니다.”

* * *

“기대하실 만하지 않습니까?”

며칠 전 이자권을 찾아온 면사의 여인이 한 말이었다.

검은색 면사로 얼굴을 가린 중년의 여인은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였다.

그녀를 호위하는 그림자는 무기가 없는 상태임에도 은밀하면서도 강인한 기도가 여실히 느껴졌다.

“기대라…….”

이자권이 찻잔을 어루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여인이 나직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혈성단주의 손목을 자른 자입니다. 월희계의 단주를 무계열의 대주가 꺾은 것입니다. 그런 자를 영입하신다면 여러모로 상징이 될 겁니다. 월희계를 견제하기에는 훌륭한 소재지요.”

탁.

이자권이 찻잔을 내려두고는 여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복잡한 소리 돌려 하지 말고 솔직해지는 게 어떤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째서 귀문회주(鬼聞會主), 당신이 흑룡대주에게 그리 관심을 가지는 건가?”

만약 이 자리에 제삼자가 있었다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리라.

귀문회주라니!

귀문회.

강호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정보에 밝은 개방이나 하오문이 있지만, 귀문회가 그 둘보다 나은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그들은 중원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개방은 주로 강서 지역의 정보에 밝다.

개방 자체가 정도이기 때문이다.

반면 하오문은 강동 지역의 정보에 밝다.

하오문이 사파의 계열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문회는 정사지간이다.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점조직 형태로 어디에나 속해 있다.

그러다 보니 정보의 신뢰도가 다소 떨어질 수는 있을지언정 어지간한 정보는 모두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한데 그 귀문회의 주인이 이자권과 독대하고 있다니.

그것도 흑룡대주를 풀어달라는 청탁을 하기 위해서.

귀문회주라 불린 여인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사적인 이유라고만 말씀드리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대공자님과는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귀문회주가 그리 말한다면 사실이겠지.”

“일전에 삼 공자가 이 공녀에게 합류한다는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청탁 하나를 어떤 것이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지금 사용하지요. 그리고 제 말대로 하신다면 대공자께도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일 겁니다. 장기에서 이기려면 좋은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말이라.”

찻잔을 매만지던 이자권이 이내 차를 들이켜고는 말했다.

“좋아. 이걸로 지난 빚은 청산한 것으로 하지.”

어차피 이자권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럼 대공자께도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자가 정말 좋은 말이 될 거라고 확신하나?”

“글쎄요. 적어도 손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면 그자가 정말 내 말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귀문회주가 찻잔을 들며 대꾸했다.

“자신을 풀어준 사람이 대공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텐데 어느 누가 복을 걷어차겠습니까?”

이자권이 피식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 * *

마음에 안 든다.

왜 하필.

귀문회주 목단향(木丹香)은 앞에 앉은 남자를 찬찬히 뜯어 살폈다.

면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다른 사람을 볼 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살피고 또 살펴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흑룡대주에 대해서는 빠삭하다.

명색이 정보 단체의 수장이 아닌가?

화령에게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에 대한 모든 조사를 완벽하게 끝내놓았다.

물론 화령이 어렸을 때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일까지 파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목석같은 남자가 그리 좋더냐?’

내심 혀를 찬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미 들었겠지만 당신을 뇌옥에서 꺼내준 사람은 대공자입니다.”

“알고 있소.”

“그 대공자를 움직인 사람은…….”

“당신이겠지.”

“눈치가 빠르시군요.”

“왜 날 도와주었소? 화령과 관계가 있소?”

“화령은 내가 아끼는 아이입니다.”

“한데?”

목단향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시종일관 무뚝뚝한 태도에 은근히 화가 난다.

최소한 감사한 마음 정도는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령아만 아니었어도.’

그녀에게 있어서 화령은 단지 아끼는 아이 정도가 아니었다.

화령은 총명했다.

물론 이번 일은 다소 실망스럽긴 했지만, 이 정도 실수로 내치기에는 너무나 똑똑한 아이.

자신의 후계를 이을 아이였다.

대대로 귀문회주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인이 자리를 이어왔다.

대신 호위들이 손발처럼 따른다.

회주는 그저 정보를 분석하고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재능만 뛰어나면 된다.

그리고 그 정보의 가치를 꿰뚫는 능력도 필요하다.

화령은 그런 쪽으로 완벽했다.

누가 봐도 후계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화령은 끝까지 거절했다.

결국 거듭된 설득 끝에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이…….

‘겨우 이런 남자 때문이라니.’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다.

철벽같은 자신을 이렇게 무르게 만든 것도 화령의 능력이니까.

화령은 이런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앞으로도 원하는 정보들을 차곡차곡 얻어갈 것이다.

“령아의 부탁으로 세 가지 도움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미 사용한 셈이지요.”

뇌옥에서 꺼내준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하면 아직 두 번이 남았군.”

“그렇습니다.”

“당신이 어떤 식으로 날 도울 수 있단 거요?”

“귀문회주로서 약속하지요. 대주께서 원하는 정보를 두 가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적비연이 흠칫거렸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여인이 어디서 그런 수완이 생겼나 했더니…….

‘귀문회였나?’

이건 정말 대단한 인연이다.

화령이 그렇게 자신 있게 무기가 되어주겠다고 할 만하다.

뒷골목에서 나타난 무인들의 수준이 만만치 않다 싶었더니 이런 배후가 있었던 건가?

귀문회의 정보를 돈 주고 사려면 그 가치에 따라 상단 하나를 통째로 넘겨야 할 수도 있다.

매일 같이 피 터지는 무림에서는 그 정도로 정보가 중요하다.

목단향이 조곤조곤 질문을 이었다.

“혹, 얻고 싶은 정보가 있습니까?”

“무엇이든 가능하오?”

“본 회가 가진 정보라면 가능합니다.”

적비연이 생각에 잠겼다.

-하기룡의 행방을 물어봐라. 아니지, 어차피 진급 심사에서 통과하면 얻게 될 정보일 수도 있으니 다른 걸 묻는 게 좋겠군.

극마의 수다를 들으며 잠시 생각하던 적비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백발 광인에 대해서 알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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