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26화 (127/301)

126. 귀문회(鬼聞會)

무림에서 정보는 중요하다.

물론 평생을 삼류 무사로 살다 가면 정보 따위야 아무렴 어떤가?

하지만 무림의 정점을 노리는 자들은 다르다.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무림에서 정보는 그야말로 신병이기와 같은 것이다.

적비연이 백발광인에 대해 물어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백발광인의 정체가 범상치 않을 것이란 짐작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무림맹주와 버금갈 정도가 아닐까 짐작된다.

더 무서운 것은 그가 오랫동안 갇혀 지낸 자라는 점이다.

공진철로 구속이 되어 있었던 만큼 기력이 많이 쇠했을 텐데도 그만한 신위를 보였다.

당대 무림의 한 획을 그을 만한 고수가 광인이 되어 사로잡혔다니.

어떤 식으로든 강호 정세에 영향을 줄 만한 인물이니 당연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둘째, 그의 정체에 따라 앞으로 취할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정파의 인물이라면 이 사실을 어떻게든 무림맹에 전할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공로를 적비연에게 돌릴 생각이다.

무림맹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고, 자신의 위상은 더욱 올라갈 게 뻔하다.

반대로 사파의 인물이라면?

거기에는 분명 사연이 있을 터. 그 사연을 비집고 들어간다면 흑천련의 흠결을 찾아낼 수도 있을 터다.

가령 반란이나 내분을 일으키다가 뇌옥에 갇힌 자라면, 그 사실을 잘 이용해서 흑천련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릴 수도 있지 않겠나?

물론 이 경우에도 모든 계획이 성공하면 그 공로를 벽력적가주인 자신에게로 돌린다.

어느 모로 보나 하기룡보다는 그가 당대 무림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그러니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정보였다.

마지막으로 순수한 호기심이다.

대체 그렇게 강한 자가 어찌 사로잡힌 것인지?

무공 수위는 대략 얼마나 되는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등등.

반면 목단향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백발광인에 대한 정보를……?’

생각지도 못했다.

흑룡대주를 얕잡아본 건 사실이다.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그리 비중 없는 대주 직에 머무는 그였다.

이미 무공으로 뭔가를 대성하기에는 한참 늦은 나이.

그래서 그가 질문을 한다면 기껏해야 앞으로 있을 진급 심사 방식에 대한 질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한 흑룡대주는 딱 그 정도의 그릇이었다.

한데 다짜고짜 백발광인에 대한 정보를 묻다니?

좋게 해석하면 생각보다 그릇이 크다.

강호 정세의 흐름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대응하려는 자세가 칭찬해 줄 만하다.

하지만 나쁘게 보면 오지랖이 넓다. 그도 아니면 허세가 가득하다.

제까짓 게 백발광인에 대해 알면 뭐 하겠는가?

기껏 해봐야 호기심 해결밖에 더 되겠나?

그게 아니면 자신을 죽일 뻔한 자에게 복수라도 하려고?

그럴 리가.

흑룡대주의 수준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복수할 수 없다.

뭐, 강호일통을 꿈꾸는 무림 초고수라면 모르겠다.

그토록 포부가 큰 자라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변수가 될 상대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으니까.

한데 고작 흑룡대주가 아닌가?

강호명숙들 사이에서는 명패를 내밀기도 애매한…….

그래도 약속은 약속.

원하는 정보가 그렇다면 줘야 한다.

“의외군요. 백발광인이라. 당신을 부상 입힌 그자를 말하는 것 맞죠?”

“안 될 것 있소?”

“그럴 리가요. 약속은 지킵니다.”

“하면 말해주시오. 그자의 정체에 대해서.”

“백발광인. 본명은 설규(薛揆). 별호는 한때 냉혼신검(冷魂神劍)이라 불렸죠.”

“냉혼신검……!”

적비연이 깜짝 놀라서 그 별호를 중얼거리자, 목단향이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역시 들어보셨군요?”

“물론이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자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별호가 아니던가?

냉혼신검 설규.

그는 정사지간의 무림고수다.

한때는 무림맹주와도 자웅을 겨룰 정도로 대단히 유명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잊혀가는 존재.

그 이유는 그가 대략 십여 년 전에 강호에서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다.

한데 백발광인이 바로 냉혼신검이라니!

아상의 기억을 가진 적비연은 냉혼신검의 별호가 낯설지 않았다.

실제로 무림맹주가 십여 년 전에 냉혼신검과 대결을 펼친 후 부상을 입고 아상에게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당시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맹주가 냉혼신검의 검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냉혼신검 역시 맹주의 무위에 놀라 그 길로 수양을 위해 은거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한데 그 냉혼신검이 흑천련 뇌옥에 갇혀 있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가?

적비연의 의문을 풀어주겠다는 듯 목단향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세간에서는 냉혼신검이 십여 년 전에 무림맹주와 비무를 한 후 계속 은 거에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딱 한 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어요.”

“그게 언제요?”

“칠혈방(七血幇)에 대해선 아시겠지요?”

“그렇소.”

적비연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칠혈방은 사파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방파였다.

물론 흑천련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었는데,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몰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는 한밤중에 장원을 덮친 산사태 때문이었다.

대략 칠 년 전, 비가 기록적으로 퍼붓던 날 칠혈방 장원의 뒷산이 무너지면서 화를 당하고 만 것이다.

제아무리 무림고수라고 할지라도 자연의 위엄 앞에서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칠혈방은 어이없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적어도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졌지요.”

“하면 아니란 말이오?”

적비연의 말에 목단향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산사태가 일어나기 전, 칠혈방주를 비롯한 수뇌인사들은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어째서?”

“냉혼신검이 그들을 몰살시켰으니까요.”

“그런……!”

적비연이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냉혼신검에 대해 말하다가 왜 갑자기 칠혈방 이야기가 나오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나?

하지만 정사지간의 고수가 왜 굳이 칠혈방을 찾아가서 멸문지화를 일으켰단 말인가?

목단향이 적비연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그가 왜 칠혈방을 멸문시켰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소문은 무성하지요. 개인적인 원한이라는 설도 있고,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설도 있지요. 어쨌거나 흑천련은 단 한 사람에게 칠혈방이 멸문당했다는 사실을 대외비로 부쳤어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이해는 된다.

정파와 사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파를 대표하는 한 문파가 단 한 명에게 멸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을 테니.

“산사태가 휩쓴 장원에서 냉혼신검이 발견되었을 때는 그 역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요.”

“하면 그때 본 련에서 그를 사로잡았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련주 직속 정예 타격대인 혈랑대(血浪隊)가 그를 사로잡았죠.”

혈랑대는 련주 직속 타격대로,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다.

특히 그들의 모든 임무는 대외비에 부쳐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어떤 임무를 도맡아서 하는지 알려진 것 또한 거의 없다.

목단향이 적비연을 빤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 후로는 아시다시피 며칠 전 냉혼신검이 탈옥에 성공했고 어디론가 사라졌죠.”

“하면 지금 그는 어디에 있소?”

“아직 항주에 있을 확률이 구 할 이상입니다.”

적비연은 또 한 번 놀랐다.

백발광인이 그대로 어디론가 멀리 떠났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이 근방 어딘가에 있단 소리가 아닌가?

백발광인이 냉혼신검이라는 것을 안 이상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니다.

무림맹주급의 고수가 광인이 되어 근방을 배회하고 있다.

언제 어떤 식으로 터질지 모를 폭탄이 주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세우든 이 변수를 감안해야 하리라.

“백발광인에 대한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답변이 되었는지요?”

“일단은. 정보의 신뢰도는 어느 정도요?”

적비연의 물음에 목단향이 희미하게 웃었다.

“본 회에서 다루는 정보에는 신뢰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요. 정보는 사실이거나 거짓. 둘 중 하나지요. 어느 정도의 확률이라는 건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뢰도라는 말 대신 ‘심도(深度)’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정보의 깊이라.”

“모든 정보에는 깊이가 있죠. 제일 얕은 깊이가 떠도는 소문 수준이라면,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사건의 내막, 음모, 욕망, 그리고 감정까지 알 수 있게 되겠죠.”

과연.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가 된다.

적비연이 목단향을 보며 다시 물었다.

“하면 백발광인에 대한 정보의 심도는 얼마나 되오?”

“팔 할 정도로 봅니다. 전해 드린 정보는 모두 사실입니다. 다만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갈 부분이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잘 알겠소.”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자, 목단향이 올려다보았다.

“아직 하나의 도움을 더 드릴 수 있어요.”

“그건 다음에 이용하겠소. 오늘은 그걸로 충분하오.”

잠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은 목단향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지요.”

“다만 그 기회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소. 그래서 암어를 정하고 싶소만.”

“대주님이 상관없다면 저희도 무관합니다. 암어는 ‘화령의 은공’으로 하지요.”

“알겠소. 고맙소.”

“별말씀을. 참, 이번 진급 심사에서는 당연히 파천계를 선택하시겠죠?”

“글쎄.”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돌아섰다.

적비연이 실내를 빠져나가자 다른 쪽 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바로 화령이었다.

목단향은 여전히 적비연이 나간 문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사내구나.”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그리하지 않았다면 너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을 테지. 그 또한 너의 능력일 테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한 목단향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구나. 한데 이 바람이 저 사내를 중심으로 부는 것 같은 기분은 왜일까?”

* * *

귀문회주를 만나고 나온 적비연은 그 길로 곧장 보석객잔으로 향했다.

보석객잔 주인장에게는 진작 단휘와 예홍의 인피면구 인상착의를 대략 알려주었다.

흑천련 흑룡대주의 지위가 있는 만큼 주인장은 꽤나 협조적이었다.

마침 보석객잔에 도착한 적비연이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장이 얼른 다가와 귀띔을 했다.

“말씀하신 두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이 층 복도 끝에 각각 하나씩 방을 잡았습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이 층으로 올라갔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방문을 두드렸다.

한데 기척이 없다.

고개를 갸웃거린 적비연이 문을 열어보자 뜻밖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 여인이 피를 토한 채 방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얼굴은 틀림없이 예홍이 덮어썼던 인피면구였다.

깜짝 놀란 적비연이 얼른 달려가 예홍의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런데 그 순간,

팟!

쉬이이잇!

등 뒤에서 한 줄기 미풍이 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예기가 날아드는 게 아닌가?

파밧!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돌아서면서 검을 뽑았다.

채앵!

금속성과 함께 검이 튕겨 나갔다.

“웬……!”

하지만 그가 말을 마저 뱉기도 전에 쓰러진 줄만 알았던 예홍이 벌떡 일어나면서 검을 내질러 왔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게다가 그 공격에는 반드시 상대를 죽이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적비연이 얼른 허리를 젖히자, 예홍의 연검이 아랫배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하아아앗!”

뒤이어 기합성과 함께 먼저 공격을 해왔던 시커먼 그림자가 검을 내려찍었다.

찰나의 순간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적비연이 소리쳤다.

“나다! 단휘! 멈춰!”

상대가 멈칫하는 사이, 적비연이 얼른 쌍장을 뻗어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퍼펑!

“큿!”

“읏!”

단휘와 예홍이 비척거리면서 물러나다가 적비연을 쳐다보았다.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진정해. 나, 적비연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