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재회(再會)
단휘와 예홍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 사람이 서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전음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듯했다.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검을 내렸다.
“내가…….”
찰나,
파앗!
“어디서 개수작을!”
단휘가 먼저 살기를 일으키며 몸을 날려 왔다.
적비연이 움찔거리고는 반사적으로 검을 올려쳤다.
차아앙!
단휘와 적비연이 동시에 반동에 의해 튕겨져 나갔다.
그 틈을 타고 예홍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죽엇!”
쉬팟!
예홍은 눈 깜빡할 사이에 적비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검을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이번에 새로 창안한 서호검법의 초식, 단교잔설!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던 검이 일순간 사라진다.
검을 내질러 가던 예홍이 멈칫하는 사이, 적비연의 검은 그대로 그녀의 가슴을 가른다.
원래라면 그렇게 예홍을 베어야 했다.
하지만 검신이 예홍의 왼쪽 어깨에 닿는 순간 적비연이 멈칫거리고는 힘을 뺐다.
반사적으로 단교잔설 초식을 사용했지만 정말로 수하를 벨 수는 없지 않나?
대신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 들고는 곧장 내질러오는 예홍의 검봉을 막아냈다.
따앙!
불꽃이 튀면서 청명한 금속성이 일어났다.
“으아아아!”
예홍의 표정이 울분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대로 달려오는 힘을 이용해서 적비연을 떠밀었다.
그 바람에 적비연의 몸이 붕 떠오르면서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콰당!
적비연의 가슴에 올라탄 예홍이 다시 검을 치켜들고는 힘껏 내려쳤다.
까앙!
다시 한번 단검과 장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정신 차려! 홍!”
“이익……!”
입술을 질끈 씹은 예홍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다.
‘눈물……?’
마침 예홍의 입이 열리면서 울분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주님을 어떻게 했지?”
“내가…….”
“네놈이 가주님을 잡아간 사실을 모를 줄 알아!”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적비연이 피식 실소를 하고 말았다.
그 실소에 눈이 뒤집힌 예홍이 다시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그래도 다행이다. 기운이 팔팔해서.”
“……!”
“말했잖느냐? 내가 적비연이라고.”
말을 마친 적비연이 자신의 가슴 앞섶을 잡고 부욱 찢어냈다.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 가슴 언저리에 박힌 세 개의 붉은 점.
그제야 단휘와 예홍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점의 위치와 모양이 똑같다.
뒤늦게 예홍이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가주…… 님?”
“그렇대도.”
“어떻게……?”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월희마녀의 공격을 받았다. 그때 의식을 잃었고, 지금은 보다시피.”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이자, 예홍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저, 저는 가주님이 흑천련에 사로잡히신 줄만 알고…….”
“미안해. 걱정시켰구나.”
두 사람 뒤에 서 있던 단휘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그는 또 다른 걱정을 했다.
‘야단났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우려했던 상황이 바로 이어졌다.
적비연은 눈물을 글썽이는 예홍을 올려다보며, ‘이제 좀 비켜줄래?’ 하고 물었고, 뒤늦게 지금의 상태를 눈치챈 예홍이 화들짝 일어나서는 바닥에 이마를 찧기 시작한 것이다.
쿵! 쿵! 쿵!
“가주님께 칼을 겨눈 것도 모자라 몸에 올라탄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부디 죽여주세요!”
쿵! 쿵……!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진정해.”
“아닙니다! 가주님의 검을 더럽히기 싫으시다면 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죗값을 치르……!”
팍! 휘릭, 푹!
어김없이 단휘가 나타나 검을 걷어찼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용서하신대잖냐? 그러게 가주님도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냐? 내가 말했는데 너희들이 믿지 않았으면서.”
“가주님의 말씀을 불신한 죄, 죽음으로…….”
예홍이 다시 단검을 뽑아 들자, 역시나 단휘가 발로 걷어차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는 마치 이런 대처가 밥숟가락으로 밥을 떠먹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그였다.
“처음에 가주님 실종 소식이 들렸을 때, 제가 얼마나 힘들었던 줄 아세요? 얘가 자꾸 죽네, 사네 하는 통에 하마터면 임무고 나발이고 장사로 돌아갈 뻔했습니다.”
적비연이 피식 웃어 버렸다.
왠지 보지 않아도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듯하다.
단휘가 그동안 쌓인 한을 풀어놓듯 말을 이어갔다.
“오죽하면 제가 가주님 실종 소식을 듣자마자 이 녀석부터 찾아갔을까요? 혹시 할복이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했다고요.”
“네가 고생 많았다.”
“당연하죠. 그리고 너, 이 정도 되면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이다. 알겠냐?”
“은인은 개뿔.”
예홍의 차디찬 대꾸에 단휘가 눈이 뒤집히려고 했지만, 적비연이 먼저 말을 가로지르며 물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날 공격한 이유가 뭐냐?”
“그야 하천웅이 흑룡대에 잡혀가는 걸 봤으니까요.”
“내가 하천웅을 사로잡은 걸 알고 있었던 거냐?”
적비연이 뜻밖이라는 듯 묻자, 단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하천웅이 흑룡대에 잡혀간 걸 아는 건 저희뿐이니까요.”
“어떻게 안 거지? 하천웅은 전혀 다른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을 텐데.”
“운이 좋았죠.”
단휘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 * *
단휘와 예홍이 서호에 도착한 것은 닷새 전이었다.
두 사람은 원래 계획보다도 훨씬 일찍 서호에 도착했다.
적비연의 소식 때문이었다.
인피면구를 쓰고 다시 나타난 하천웅이 기적적으로 흑검단을 전멸시킨 후 실종됐다.
이 소식을 접한 단휘와 예홍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체가 발각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특임대원들이 각각 별동대처럼 행동했기에 다른 자들의 신상까지 털릴 염려는 없었다.
문제는 하천웅의 실종이다.
만약 죽은 것이라면 다른 누군가로 환생하겠거니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실종이라니.
그 말인 즉슨 적비연의 생사가 불투명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때부터 예홍이 죽네, 사네 하며 난동 아닌 난동을 부렸다.
단휘는 그런 예홍을 데리고 거의 날다시피 서호까지 왔다.
두 사람은 만약을 대비해서 보석객잔 바로 맞은편의 춘광객잔(春光客棧)에 머물다가 때가 되면 보석객잔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데, 유난히 시선을 잡아끄는 세 사람이 보였다.
남자 둘과 여자 한 명.
셋 모두 허리춤에 칼을 찬 무인이었다.
사실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춘광객잔에 머물기 시작할 때부터, 그 세 사람이 이따금씩 보석객잔에서 들락거리는 걸 보았으니까.
이상할 건 없었다.
조만간 치를 진급 심사 때문에 많은 무인들이 서호 주변의 객잔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서호객점처럼 유명한 곳은 진즉 손님이 꽉 차 있었다.
다만 단휘가 그날따라 그들을 예의주시한 이유는 여인의 왼팔 때문이었다.
오른팔과 달리 그녀의 왼팔이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 탓이다.
단휘는 해변에서 흑검대를 전멸시킨 용의자가 두 사람이라는 걸 상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팔 하나가 부자연스러운 여인을 보자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것이다.
미계수와 동소유.
두 사람이라면 적비연을 반드시 살려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팔 하나가 없는 여인과 남자는 정인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사내 한 명.
그러고 보니 뭔가 조합이 묘했다.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어쩌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날부터 단휘와 예홍은 그 이상한 조합을 은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 * *
“그러다가 보고 말았죠. 그 세 사람이 인피면구를 벗어버리는 걸.”
단휘의 말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거군.”
“말도 마십쇼. 그걸 보자마자 저 녀석이 당장에라도 달려갈 것처럼 굴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단 진정시키고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죠. 일단은 남은 특임대를 만나야 하니 보석객잔으로 자리도 옮겼고요. 저희 둘은 그 두 사람의 상대가 안 될 테니까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미계수와 동소유는 강하다.
특히 동소유는 초절정의 중단에 이른 고수였다.
비록 한 팔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덮어놓고 달려들다간 명을 재촉하게 된다.
“그렇게 지켜보던 중에 갑자기 흑룡대가 그들을 포박해 가는 걸 봤던 겁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군.”
그랬으니 예홍이 눈을 뒤집고 달려들 만도 하지.
결과적으로 오해가 생기긴 했지만 제법 신속하게 파악한 단휘와 예홍이 대견하기도 했다.
단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가주님이야말로 어떻게 된 거예요? 하천웅이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어째서 반철룡 몸에 들어가신 겁니까?”
적비연이 그간의 사정을 대략이나마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단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특히 교패가 이곳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교패라는 작자 정말 무섭네요.”
“확실히 쉬운 상대는 아냐. 사예린도 그렇고.”
“하면 저희도 이번 진급 심사에서 권왕계를 선택하면 될까요?”
“그래야지. 너희도 나와 같이 사 공자의 호위를 하는 편이 좋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다가 우뚝 멈췄다.
“누구요?”
단휘가 소리쳐 묻자 밖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은편 방에 묵고 있는데 서로 인사나 나누죠?”
곧 세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휘가 문을 열어주자 예상대로 임송화와 현청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에요.”
“다시 뵙습니다.”
임송화와 현청이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들어섰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적비연을 보고는 흠칫 굳어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검에 손을 가져가려는데, 단휘가 얼른 말했다.
“반 대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분입니다!”
“예?”
“뭐라고요?”
임송화와 현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적비연이 나섰다.
“하 대협은 현재 본대에서 보호하고 있는 중이오. 현재 본 련이 하 대협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소. 그런 까닭에 하 대협 대신 내가 직접 왔소.”
현청과 임송화가 멍한 표정으로 단휘를 보았다.
설명을 바라는 눈치.
단휘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렇게 자신을 본다고 해서 반철룡의 변심을 갑자기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마침내 임송화가 적비연을 보며 물었다.
“정말 당신이 우리를 돕는단 말인가요?”
“그렇소.”
“흑천련을 배신할 수도 있는 일인데?”
“상관없소.”
“역시 하 대협이 당신을 설득한 거군요?”
임송화의 눈이 빛을 반짝 뿜었다.
그 모습을 보는 예홍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이제 더 이상 예홍은 임송화가 하천웅에게 관심을 던지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날 설득한 사람은 따로 있소.”
“그게 누구죠?”
임송화가 미간을 구기고는 묻자, 적비연이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 위대하고도 찬란하신 분은 바로 벽력적가주님이시오. 그분이 내게 새로운 길로 인도하셨소. 난 그분을 진정한 강호영웅이라고 생각하오.”
그런 적비연을 보면서 단휘는 입을 척 벌렸다.
‘역시 저건…… 배워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