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28화 (129/301)

128. 진급 심사

여추백은 확실히 일을 잘했다.

그는 흑천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걸핏하면 서호 주변에서 무인들을 잡아들였다.

약간의 수상한 점이라도 보이면 무조건 흑룡대 취조실로 잡아간 후 풀어주곤 했다.

그 바람에 앞서 하천웅을 사로잡은 일은 자연스럽게 묻혀갔다.

사람들은 그저 큰 행사를 앞두고 흑룡대가 치안을 강화하는 정도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진급 심사 당일이 됐다.

서호에 모여 있던 모든 무인들이 흑천련으로 모여들었다.

신분 검증 절차가 끝난 무인들은 외원에 새로 지어진 심사장으로 향했다.

적비연도 심사장으로 향했다.

심사장에서는 입련 희망자와 진급 희망자를 따로 분류했다.

그리고 진급 희망자는 다시 조장급, 대주급, 단주 이상급으로 나뉘었다.

적비연을 제외한 특임대는 모두 대주급으로 신청했다.

여추백도 마찬가지.

다섯 원주들의 수신위가 되려면 최소한 대주 이상이어야 했기에.

그리고 호법장을 맡을 적비연은 단주 이상급으로 신청했다.

각각의 대기실이 달랐기에 적비연은 홀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너른 대기실로 들어가니 온갖 험악한 인상의 무인들이 사기를 풀풀 풍기면서 서로를 의식했다.

단주 이상 지원자는 대략 백오십 명 정도.

실제 수요에 비해 열 배 이상 몰린 셈이다.

지원자 중에는 이미 단주로 활약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각주나 당주가 되기 위해서 심사를 치르는 것이리라.

대부분은 적비연처럼 대주의 지위였고, 이따금씩 조장이거나 평무인도 보였다.

그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지금껏 능력에 비해 낮은 직급에 머물러 있었거나, 욕심만 많아서 객기를 부리는 것이거나.

어쨌거나 이 중에서 구 할이 떨어진다고 봐야 한다.

수요보다 두 배수 이상을 뽑아 발령대기를 한다고 해도 팔 할이 떨어진다.

그때 적비연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마침 그도 적비연을 발견하고는 저벅저벅 걸어왔다.

“너 이 새끼, 여기서 보는구나.”

당장에라도 씹어 먹을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 자는 바로 혈성단주 마영후였다.

그의 전신에서는 사기가 아닌 살기가 느껴졌다.

만약 보는 사람만 없다면 당장 출수해서 적비연의 목을 쳐버릴 것만 같았다.

적비연의 시선이 오른손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보기 좋군.”

“뭐? 이 새끼가……!”

마영후가 게거품을 물 것처럼 흥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영후는 오른손 대신 칼이 달려 있었다.

손목에 고정된 칼이었다.

그의 오른손을 잘라낸 장본인이 바로 적비연이었으니 분노가 극에 치달을 수밖에.

쉬잇, 콰직!

눈 깜빡할 사이에 마영후가 검을 내질렀다.

손목에 달린 칼날이 적비연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더니 벽에 처박혔다.

주변의 무인들이 적비연과 마영후를 돌아보았다.

마영후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너 이 새끼, 운 좋게 날 베었다고 우쭐대지 마라. 제명대로 못 사는 수가 있다.”

마영후는 확신했다.

만약 자신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손목을 잃지 않았을 거라고.

그간 늘어난 것은 내공만이 아니었다.

실력도 분명히 늘었다.

한데 그날은 잠깐 착각하는 바람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 순간의 실수가 손목을 잃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는 몰랐다.

그 잠깐의 착각으로 인해 멈칫한 것이 단교잔설 초식의 묘리라는 것을.

그러다 보니 오로지 자신의 방심과 실수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적비연이 마영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떨어지지? 입 냄새 난다.”

“뭐? 이 개새끼……!”

“심사를 치르기도 전에 난동을 부리면 실격될 텐데.”

꽈득.

마영후가 어금니를 갈더니 이내 피식 웃고는 벽에서 칼을 쑥 뽑아냈다.

“언제까지 그 주둥이를 놀릴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너무 분하게 생각하지 마. 그 모습, 의외로 잘 어울리니까. 진짜 도신합일(刀身合一)이 되었잖아?”

“이익……!”

마영후가 다시 발끈했지만 마침 문이 열리면서 안내자가 들어왔다.

안내자는 각각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둥근 목패를 나눠주었다.

목패에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적비연과 마영후가 가진 목패는 같은 번호였다.

붉은 목패에 삼(三)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내자가 대기실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지금 나눠준 목패를 허리춤에 이런 방식으로 패용하시오.”

안내자가 자신의 허리춤을 보이며 말했다.

응시자들이 저마다 안내자를 따라서 목패를 패용했다.

잠시 후 안내자가 문을 열며 소리쳤다.

“그럼 이제 모두 입장해 주시오!”

말이 떨어지자 대기실의 무인들이 열린 문을 통해 심사장으로 걸어 나갔다.

“오오! 나온다!”

“드디어 마지막이구나!”

“오늘의 최대 관심사다!”

관람석을 꽉 채운 무인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열기였다.

방음이 잘된 탓인지 이러한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심사장은 대연무장만큼이나 넓었는데, 백오십여 명이 한 공간에 있음에도 전혀 좁다는 느낌이 없었다.

또 하나 특징은 이미 바닥에 핏자국이 흥건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한다는 점이다.

앞서 치른 조장급이나 대주급의 응시자들이 흘린 피일 것이다.

‘특임대랑 추백이 심사를 잘 치렀는지 모르겠군.’

-걱정 마라. 그래도 그놈들 하나같이 대주급은 될 실력들이었다. 뭐, 그중에서 여추백이 제일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극마가 이렇게 말한다면 조금 안심이 된다.

타인의 무공을 그만큼 까다롭게 평가하는 자도 없을 테니.

-그나저나 심사 방식이 뭐지?

‘곧 알게 되겠지.’

적비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한 남자의 음성이 장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일전에 적비연을 사로잡아서 가두었던 수라당주 진천규였다.

“본 심사는 단주급 이상의 직위를 뽑는 절차다. 너희들은 각각 목패를 하나씩 받았을 것이다. 목패의 종류는 모두 열다섯. 일 번부터 십오 번까지다. 대략 열 명이 한 조인 셈이다.”

응시자들이 수군거리면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각자의 목패를 확인하는 듯했다.

-한 조라면…… 같은 편이 되어서 다른 편이랑 싸우라는 건가?

‘글쎄……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

-반대……?

극마의 의문은 진천규가 풀어주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적비연의 예상이 적중한 셈이었다.

“심사가 시작되면 같은 번호를 가진 목패끼리 비무를 한다. 상대의 목패를 잘라내면 된다. 물론, 비무 중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본인의 책임이다. 그러니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진천규의 말끝에 참가자들이 키들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마치 생사결을 기다렸다는 듯이 혀로 비수를 핥으며 이죽거렸다.

몇몇은 당장에라도 피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눈치였다.

과연 생사결을 접하는 자세부터 정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긴장하거나 각오를 다지기보다는 오히려 기대하고 재미있어하는 분위기라니.

‘일단 그건 그렇고…… 하필이면…….’

적비연의 시선이 마영후에게 향했다.

마영후는 아까부터 적비연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목을 스윽 긋는 시늉을 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만약 번호가 다른 목패를 끊어버리거나 공격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즉시 실격이다.”

“언제까지 비무를 하는 겁니까?”

“각각 목패 종류별로 단 한 사람만 남을 때까지 진행한다.”

더 이상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진천규가 다른 질문이 없냐고 물었지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연신 사기를 풀풀 풍기면서 먹잇감을 찾는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과연 재미있는 방식의 심사군.

‘난잡한 전투가 될 것 같지만 철저하게 피아를 구분해야겠지.’

적비연의 말에 극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들의 경우 군대와 다르게 혼전 속에서는 어이없는 죽음이 많이 나온다.

군대는 복색이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적과 아군의 구별이 확실하다.

하지만 무인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물론 단체복을 맞춰 입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무복을 자유롭게 입는 경우도 많다.

그런 와중에 난투가 벌어지면 피아 구분을 확실히 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 시험은 무인으로서의 순발력과 눈썰미를 알아보는 것과 동시에 무공 수위까지 파악하겠다는 목적이다.

그리고…….

‘분위기로 봐선 목패를 끊으라는 건 의미가 없군.’

-클클클. 그러게. 이 녀석들 전부 죄다 죽여 버리겠다는 심산인데?

결국 생사결을 펼쳐야 한다.

상대는 죽자고 달려드는데, 혼자만 손속에 사정을 둔다는 건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

적비연은 관람석을 꽉 채운 자들을 둘러보았다.

한쪽 귀빈석에는 흑천련주와 총군사를 비롯해 수뇌인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교적 차분한 표정으로 관람하는 귀빈석과 달리 일반 관람석의 무인들은 연신 들뜬 표정이었다.

자신의 상관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의 난투를 보면서 저토록 흥분하다니.

사파 무인들의 심리는 참 재미있다.

-그저 남의 눈치를 안 본다는 거겠지. 정파 나부랭이들은 이래저래 체면을 따지고 예를 따지지만. 결국 목숨 건 전장에서는 강하면 다 해결된다.

‘뭐,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러는 사이 진천규가 내공을 실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심사를 시작한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동시에 관람석에 앉은 자들이 벌떡 일어나며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함성을 듣고 있으니 절로 가슴이 뛰고 피가 빨리 도는 것만 같다.

“흐아아압!”

이미 싸움은 시작됐다.

우렁찬 기합성을 터뜨리며 달려드는 자는 덩치가 황소만 한 거구의 사내였다.

그는 제 덩치만큼이나 큰 대부(大斧)를 휘둘러 왔는데 그 압도적인 크기만으로도 충분히 위압감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그를 보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찰나에 그의 목패를 확인한 탓이다.

그는 칠 번 목패였다.

아무나 죽이고 실격당해도 상관없는 미친놈이 아니라면 까닭 없이 자신을 공격하진 않을 테니.

아니나 다를까, 거구의 대부가 적비연을 스치더니 바로 뒤에 있던 사내의 머리통을 내려찍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깔끔하게 쪼개졌다.

피가 튀어오르면서 육신이 쓰러지자 뇌수가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끔찍한 풍경.

하지만 그럴수록 관람석의 무인들은 광분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우와아아앗! 굉장하다!”

“저 거구! 누구지? 평무인인 것 같은데?”

“저런 자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확실히 거구는 실력이 뛰어났다.

반철룡의 기억을 더듬어도 언뜻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 것을 보면 평무인이 분명한 듯했다.

그의 선공을 신호로 곳곳에서 피 튀기는 살육전이 펼쳐졌다.

당연히 적비연을 노리는 자도 나타났다.

제일 먼저 그를 향해 살기를 드러낸 사람은 당연히 마영후였다.

“이거 어쩌나? 공교롭게도 같은 조가 되어버렸네?”

“넌 항상 싸우기 전에 주둥이부터 나불대는구나.”

적비연이 차갑게 이르자 마영후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묘한 일이 일어났다.

스윽. 스슥.

삼 번 목패를 패용한 자들이 마영후 뒤에 포진하듯이 서는 것이 아닌가?

이내 마영후의 입가에 비소가 걸렸다.

“주둥이 나불거릴 기회라도 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 할 텐데. 네놈이 그리 강하다니까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거지?”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극마가 혀를 찼다.

-이 새끼들…… 짰군.

적비연도 같은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조작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단합이 잘 된다고?

적비연이 힐끗 시선을 돌려 진행자인 진천규를 보았다.

진천규는 짐짓 다른 곳을 보면서 모른 체했다.

귀빈석을 보니 사예린이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고, 파천신군 이자권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했다.

‘사예린은 날 죽일 생각일 테고…… 이자권은 날 시험해 보겠다는 건가?’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나오면 사예린이 손을 썼다는 걸 이자권도 모를 리는 없을 터.

아마 자신의 능력을 지켜보겠다는 심산이리라.

정 그렇다면…….

’스르르릉.

적비연이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뿜어졌다.

적비연이 마영후를 비롯한 열 명의 무인들을 노려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보여 드려야지. 나라는 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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