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진급 심사
마영후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게 정말…… 그 반철룡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나?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그날 자신의 손목이 잘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단순한 방심 때문이 아니란 말인가?
머릿속이 온통 의문투성이다.
한데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내릴 수가 없다.
쉬이잇, 푹!
“컥!”
까앙! 푹! 푹! 푹!
“컥! 으윽……!”
순식간에 다시 두 명이 쓰러졌다.
적비연의 장검이 달려들던 적의 심장을 거침없이 관통해 버렸고, 배후를 노리던 자는 단검에 단전, 가슴, 목이 차례로 찔리면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주춤.
마영후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뿐만 아니라, 적비연을 공격하려던 자들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주춤거렸다.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둘이 죽었다.
그중 하나는 목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다.
핏발 선 그의 눈동자가 후회로 물들고 있었다.
상대를 잘못 본 것이다.
마영후가 자신만만하기에 이번에 줄 한 번 잘 대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는 이 자리에 누워 있는 대신 적비연을 제거한 후 마영후와 적당히 어울리는 척하다가 목패가 끊어져 탈락하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 몇 년간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터였다.
한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누가 알았겠나?
회한에 사무친 듯한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그러는 사이 적비연은 자신을 둘러 싼 일곱 명의 무인들을 보았다.
네 명을 제거했다.
삼 번 목패를 받은 자들은 모두 열한 명이었다.
적비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영후를 가만히 응시하며 물었다.
“뭐 하나?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지 않았나?”
“너…….”
꿀꺽.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 하지?
왜 이렇게 강해졌냐고?
아니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그럼?
무슨 꼼수를 썼냐고 몰아붙여야 하나?
아니다.
벌써 마음이 지고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간을 끌고 싶다는 욕망이 아닌가?
게다가 저 검술은 대체 뭔가?
흑룡대에 있을 때 반철룡의 검술을 많이 봤다.
하지만 저렇게 깔끔하고 세련된 검술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검법이다.
조심해야 한다.
까딱하면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전신을 음습해 온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영후는 오히려 심신이 차분해졌다.
지금까지는 일말의 방심과 자만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총력을 다해 싸움에 임해야겠다는 각오가 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가만히 지켜볼 적비연이 아니었다.
적비연이 마영후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툭 내뱉었다.
“쫄았냐?”
“……!”
마영후의 미간이 순간 팍 일그러졌다.
애초에 마영후는 차분한 성격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단순한 격장지계에도 쉽게 무너진다.
그 미약한 동요를 틈타 적비연이 먼저 치고 들어갔다.
팟!
쉬이이잇!
적비연의 신형이 귀신처럼 마영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헛!”
마영후가 헛바람을 삼키면서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올려쳤다.
손목에 달린 칼날이 적비연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쳐냈다.
투까앙!
불꽃이 일어나면서 적비연의 자세가 흔들리자,
“흐아아압!”
“이여업!”
좌우에서 다른 무인 두 명이 동시에 달려든다.
잠시의 틈이라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이제 적비연을 두고 방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저마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적비연 역시 마찬가지.
그 어느 때보다도 검식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았다.
적비연은 그대로 허리를 젖히면서 좌우에서 뻗어오는 칼날을 피했다.
동시에 몸을 빠르게 회전하면서 검을 횡으로 그었다.
샤아아악!
숫돌로 벼른 칼날만큼이나 예리한 검기가 시커먼 호수의 수면을 그린다.
검기는 잔잔하고 고요하다.
하나 검기가 그린 호수의 수평선 아래는 완전히 잠겨 버리고, 그 위에 남은 것들은 허공으로 떠오른다.
튕기듯 휘돌아가는 상반신들이 어지러운 그림자를 만들고, 퍼져 나가는 핏방울은 어둠의 기운을 더욱 짙게 만든다.
검기가 만든 수평선 위에서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는 저물어가는 목숨들.
포위당했을 때 특히 빛을 발하는 이 초식은 바로 평호추월이다.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아름다운 검초였지만 적비연은 만족할 틈이 없었다.
“뒈져라!”
등 뒤에서 소리치며 달려드는 또 하나의 인영!
적비연이 그대로 발끝을 툭 찍어 차면서 검신과 함께 빠르게 솟구쳐 올랐다.
쉬이이잇!
파공성에 이어 희뿌연 검기가 자욱한 안개를 만든다.
촤아악!
허공에서 살을 베는 섬뜩한 소리가 들린다.
일순 퍼진 검기 때문에 형상을 바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곧이어 적비연이 혜성처럼 떨어져 내린다.
마치 검기로 하나의 거대한 산을 만들어내는 것만 같다.
촤아악!
적비연의 검은 이번에도 떨어져 내리면서 한 명의 적을 베어냈다.
검로에 걸린 것들이 피를 뿌리자 검기와 어우러져 노을빛 구름을 만들어낸다.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라고나 할까?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그러나 더 없이 무정한.
서호검법 제삼초, 쌍봉삽운(雙峰揷雲)이다.
털썩! 쿠웅!
다시 두 사람이 쓰러졌다.
주변을 채웠던 검기가 흩어지듯 사라지자 바닥에 쓰러진 자들이 보인다.
순식간에 네 사람이 또 목숨을 잃었다.
“이럴 수가……!”
마영후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곧이어 뒷골이 쭈뼛 설 만큼이나 굉장한 함성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우와아아아아!”
“멋지다! 저 사람 누구지?”
“모르겠냐? 반철룡 대주잖아! 그나저나 반 대주가 저렇게 강했나?”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에겐 그저 흥미 넘치는 유흥거리.
한데 관람자들의 이목만 집중된 게 아니다.
심사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다른 무인들조차 적비연의 검술에 넋을 놓았다.
서로 칼끝을 겨누던 자들도 적비연의 검술에 취한 듯 바라보기만 했다.
확실히 적비연의 검술은 아름다웠다.
겉보기에 화려한 것이 아닌데 워낙 잘 다듬어진 검식이기에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차분하면서도 뭐라 형용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
그렇다.
적비연의 검술은 확실히 서호를 닮았다.
그리고 그 서호를 닮은 아름다움이 상대에게는 공포로 다가간다.
마영후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처음 반철룡을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그다음에는 당혹감.
하지만 지금은 공포에 가까워지고 있다.
힐끔 귀빈석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을 바라보는 사예린의 표정이 냉담하기 이를 데 없다.
웃음기는 이제 찾을 수 없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실패하면?
끝이다. 다음은 없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그래, 그렇다면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하지 않겠나?
그때, 잠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버럭 소리치며 누군가에게 달려갔다.
“어딜 멍청하게 보고 있는 것이냐! 네놈 상대는 이 몸이다!”
부웅!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거구는 날렵했다.
그가 대부를 그대로 내려찍었다.
촤아아악!
놀랍게도 그의 대부가 상대를 정확히 세로로 쪼개 버렸다.
그 무자비한 공격에 관람석이 다시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와아아아! 덩치도 대단하다!”
“좋아! 죽여라! 다 죽여 버려라! 난 너한테 전 재산을 걸었다!”
관람자들의 열광 때문에 마영후도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놈을 죽여야 내가 산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그가 양쪽에 선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
파앗!
“끝이다!”
“반드시 죽인다!”
“흐아앗!”
세 사람이 동시에 살기를 터뜨리면서 적비연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적비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마영후를 지켜볼 뿐.
마영후는 착각했다.
‘놈! 기력이 다했구나!’
짧은 시간 그런 상승 무공을 보였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헛!”
놀랍게도 적비연이 뻗어내는 검이 세 개로 쪼개지는 것이 아닌가.
세 줄기의 검기가 시린 달빛을 뿜어내며 세 사람에게 각각 날아갔다.
쉬이이잇, 쉬이잇! 쉬쉿!
촤촤촤아악!
세 사람과 적비연이 서로를 지나쳤다.
장내가 침묵에 휩싸였다.
모든 관람자들의 시선이 적비연에게만 집중이 되어 있었던 탓이다.
사예린 곁에서 지켜보던 삼 공자 종권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예린은 결과를 짐작한 것인지 가만히 눈을 내려 감고 고개를 저었다.
마침내,
핏, 피츗! 츄아아아!
적비연을 지나친 세 사람의 앞섶이 찢어져 나가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털썩!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세 사람.
마영후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초승달 모양의 상처를 보았다.
“쓰벌…… 삼담인월(三潭印越)……!”
그의 입에서 알려주지도 않은 적비연의 초식명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서호 석롱등 석탑의 조명은 밤에 배를 띄우고 바라보면 세 개의 달로 보인다.
이를 사람들은 삼담인월이라 하였다.
역시 서호십경 중 하나였고 적비연의 열 가지 초식 중 하나였다.
서호검법을 대성하게 되면 적의 가슴에 새겨지는 상처는 초승달이 아니라 보름달이 되리라.
쿠쿵, 쿠웅!
세 사람이 동시에 고꾸라졌다.
침묵 끝에 터져 나온 함성!
“우와아아아!”
관람석은 그야말로 광분의 도가니가 됐다.
귀빈석의 사예린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이었고, 파천신군은 제법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권왕계의 투혈권왕은 그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긴.
이런 자리에서 두각을 보이는 자가 자신을 선택할 리가 없다고 여길 것이다.
흑천련은 전통적으로 심사 성적이 우수한 자부터 우선 지망권이 있었기에.
-클클. 꽤나 쓸 만한 검법을 만들어냈구나.
극마가 웃었다.
이 정도면 최고의 칭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선의 경지가 인정한 셈이니.
적비연이 쓰러진 자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괜찮은 검법을 창안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경험치와 반철룡의 고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실전으로는 처음 사용해 봤는데 꽤나 흡족하다.
비록 네 초식만 사용했지만.
앞으로 잘 체화시킨다면 벽력검법, 구천혈마검과 더불어 훌륭한 무기가 될 듯하다.
조금 있자니 다시 사람들의 함성이 장내에 가득 차올랐다.
거구의 사내가 같은 조 들을 모두 처리하고 홀로 남은 것이다.
이후로는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다.
싸움이 진행되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무인들이 스스로 목패를 끊어내고 기권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열다섯 명의 무인들이 추려졌다.
진행자인 수라당주 진천규가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럼 지금부터 최종심을 치르겠다.”
그러자 열다섯 명의 무인들이 수군거리며 서로를 보았다.
거구의 사내가 불만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최종심 아니었습니까?”
진천규가 싸늘한 웃음을 그렸다.
“진짜는 지금부터지.”
말을 마친 그가 턱짓을 했다.
그러자 심사장 동서남북에 위치한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철문 안쪽은 시커먼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관람자들도 몰랐던 것인지 흥미로운 시선으로 네 개의 철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저벅저벅……!
곧 철문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적비연이 미간을 구기고는 빤히 보았다.
느껴지는 기운이 벌써부터 범상치가 않다.
잠시 후.
시커먼 어둠 속에서 가죽 가면에 철갑을 착용한 자들이 각각 모습을 드러냈다.
그그그그…… 쿠웅!
철문이 다시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뭐지? 이자들은?’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데,
땅! 땅! 땅!
진천규가 목봉으로 난간을 내리쳤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가죽 가면을 쓴 네 사람이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
그들은 하나같이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순간,
파밧!
네 명의 괴한들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왔다.
동시에 적비연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자들의 기감이…… 백발광인과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