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괴물
“크억……! 컥!”
심장이 관통당한 무인이 칼날을 맨손으로 움켜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십이 번 목패를 가진 조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일인이었다.
괴한들이 몸을 날린 순간 가장 먼저 호기롭게 맞서 칼을 뽑은 자이기도 했다.
촤아아악!
괴한이 검을 횡으로 그어버리자 심장에서부터 겨드랑이까지 그대로 갈라졌다.
쿠웅!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자는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는지 부릅뜬 눈을 감지도 못했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괴한을 상대한 무인의 목이 뎅겅 잘려 나가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툭, 데굴데굴……!
츄아아아!
무인 하나가 또 피분수를 터뜨리면서 절명했다.
“제길! 뭐 이딴 놈들이……!”
또 다른 무인은 괴한과 도검을 맞댄 채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앞서 다른 무인의 심장을 뚫었던 괴한이 그의 배후로 날아가더니 그대로 칼을 사선으로 후려쳤다.
촤아아악!
시퍼런 검기가 일어나면서 그대로 상반신이 갈라졌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른 무인이 그대로 쓰러지더니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다가 절명했다.
괴한을 상대한 네 명 중 세 명이 죽은 상황.
마지막까지 버틴 무인은 바로 대부를 든 그 거구였다.
“이 젠장할 새끼들! 무슨 힘이 이렇게나……!”
욕지거리를 뱉어낸 그가 발을 들어 올려 상대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쾅!
괴한이 주춤거리며 대여섯 걸음 물러나자 그제야 거구가 몸을 빼냈다.
하지만 이를 본 괴한 셋이 동시에 거구에게 몸을 날렸다.
찰나,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며 달려갔다.
“빠져!”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한 것인지 거구가 얼른 몸을 뒤로 굴렸다.
커다란 덩치가 몸을 둥글게 말면서 구르니 그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웃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해 보였기에.
거구가 서 있던 자리에 세 명의 괴한이 칼을 부리며 떨어져 내렸다.
콰가각!
검기가 그대로 바닥을 파헤치는 사이, 바람처럼 달려간 적비연이 평호추월 초식을 펼쳤다.
샤아아아악!
이번에도 어김없이 매끄러운 검기가 수평선을 그린다.
하지만 수평선 아래로 잠기는 것도, 수평선 위로 떠오른 것도 없다.
대신 수면 끝의 거대한 산처럼 버틴 괴한들이 타격음을 터뜨리며 튕겨 나간다.
따당! 따앙!
츠츠츠츳!
심사장 바닥에 그들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풀썩 피어올랐다.
적비연의 공력이 상당하다고 느꼈는지 괴한들이 주춤거렸다.
적비연이 가면 사내들을 훑어보았다.
‘틀림없다. 이자들…… 백발광인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동감이다.
극마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괴한들을 노려보았다.
정기도 사기도 아닌 모호한 기운이다.
그렇다고 마기도 아니다.
마기라면 진작 알아봤을 것이다.
적비연도 마공을 익혔고, 극마는 아예 마선까지 오른 몸이지 않은가?
분명한 건 위험하다는 것이다.
백발광인만큼 강한 것 같지는 않지만, 혼자서는 절대 이 넷을 감당할 수가 없다.
결국 이번 싸움은 힘을 합치는 게 중요하다.
살아남은 열다섯 명, 아니, 이제는 열두 명이 된 무인들끼리 의기투합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
다른 무인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최후의 일인으로 남은 열다섯이 아니었던가?
한데 단 일합도 견디지 못해 세 명이 죽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게다가 시종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거구마저 밀린다.
적비연이 슬쩍 귀빈석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는 다소 따분한 표정을 짓던 수뇌인사들이 이제야 흥미가 돋는지 눈빛을 반짝인다.
‘악취미가 따로 없군.’
-열받는데 확 부숴 버려라!
극마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쾅쾅 치며 소리쳤다.
적비연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흥! 구천혈마검을 사용하면 어찌 될지 알 수 없지!
‘아니. 구천혈마검을 사용해도 저 넷을 모두 상대하기엔 버거워.’
-나머지 열한 명은 주인이 싸우는 동안 놀고 있냐?
‘놀지는 않겠지만 똘똘 뭉치지도 않겠지.’
당연한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가 경쟁 상대였다.
운이 좋아서 같은 조에 묶이지 않았을 뿐, 자칫하면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힘을 합쳐서 뜻을 맞춘다?
물론 시도는 할 것이다.
하지만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갈 수는 없다.
그 결과는 뻔하다.
필패다.
문제는 또 있다.
여기서 구천혈마검을 쓰라니?
구천혈마검을 제대로 펼치려면 구천혈마공을 운기해야 한다.
그럼 마공을 사용하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는 셈이다.
그 후에는 어쩔 셈인가?
정파에서는 사마외도라고 부르며 사공과 마공을 한통속으로 보는 시선이 없지 않지만, 실제로 사파 무인들도 마공을 상당히 싫어한다.
칠괴의 기억과 반철룡의 몸에 들어오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역시 이 상황에서는…….
‘손발을 맞춰야 한다.’
-어떻게? 주인 말대로 저놈들은 전부 제멋대로일 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어떤 부류든 강한 통솔력을 가진 자가 단번에 분위기를 휘어잡는다면 불가능하진 않다.
-그러니까 단번에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
극마의 말은 마저 이어지지 못했다.
적비연이 순간적으로 바닥을 차면서 달려 나갔기 때문이다.
괴한 하나가 무인 한 명의 옆구리를 막 베어내는 순간이었다.
적비연이 그 무인의 뒷덜미를 덥석 잡고는 확 끌어당겼다.
“크업!”
옆구리가 살짝 찢어진 무인이 피를 뿌리며 뒤로 부웅 날아갔다.
대신 적비연은 그대로 검을 사선으로 후려쳤다.
단교잔설 초식!
하지만 괴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의식이 있다면 으레 멈칫했어야 할 그 순간에도 상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올려쳤다.
따아앙!
고막을 찢을 듯 금속성이 터져 나오면서 적비연이 휘청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괴한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적비연은 대신 다른 곳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갔다.
허공에서 괴한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가 노리는 자는 오 번 목패를 가진 무인.
하지만 적비연이 먼저 바닥을 강하게 찍으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순간 희뿌연 기운이 안개처럼 흩어지면서 주변을 에워싼다.
검기가 그대로 솟구쳐 오르니, 마치 쌍봉이 그려지는 듯하다.
투까앙!
가면 사내와 적비연의 도검이 서로 부딪치며 불꽃을 터뜨린다.
적비연이 그대로 혜성처럼 떨어져 내리며 또 다른 가면 사내의 어깨로 검을 강하게 내려쳤다.
투카아앙!
한 폭의 산수화를 닮은 쌍봉삽운 초식!
분명 공격은 먹혀들었다.
하지만 얕다.
아니다.
적비연의 내공이 꽤나 심후하다는 걸 고려한다면 지금 공격도 결코 얕은 게 아니다.
다만 상대의 철갑이 제 역할을 단단히 했다.
웬만한 검기로는 잘려 나가지 않는다.
내공을 아낌없이 퍼부어야 잘려 나갈 듯하다.
그래도 괴한이 공격하던 무인은 무사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칫! 조금 모자랐군.”
적비연이 혀를 차고는 바닥을 툭 찍어 차며 성큼성큼 물러났다.
“젠장! 이것들 뭐야?”
“웬 괴물 같은 것들이……!”
당황한 무인들이 욕지거리를 뱉어낸다.
최후의 일인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동시에 적비연의 무위에 놀랐다.
그건 괴한들도 마찬가지인지 섣불리 공격해 오지 않고 거리를 두었다.
잠깐의 소강상태.
적비연이 괴한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다들 잘 들어! 상황이 급하니 하대한다! 일, 이, 오, 육번! 동서남북 삼 장 간격으로 떨어져서 맡는다! 나머지는 그 뒤 일 장 정도 떨어져서 이인일조로 대기하면서 밀리는 쪽을 협공한다! 칠 번은 나와 함께 정중앙에 남아 밀리는 곳을 보강한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육 번 목패를 단 무인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고는 소리쳤다.
“어이!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명령질이야? 게다가 제일 안전한 안쪽에서 몸이나 사리겠다는 거냐?”
그의 거부 반응에 귀빈석에 앉아 있던 수뇌인사들이 흥미로운 시선을 던졌다.
파천신군 이자권도 희미하게 웃으며 지켜보았다.
하지만 적비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갑자기 명령을 내렸으니 순순히 따를 리가 있겠는가?
육 번의 말대로 동서남북을 각각 맡을 네 명이 가장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비연과 거구가 서 있을 안쪽은 안전할 순 있지만 가장 중요한 위치다.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 즉각적인 대응과 명령을 내려야 하기에.
이는 사실 강동칠괴가 사용했던 귀배진(龜背陳)을 응용한 것이다.
거북이가 목을 움츠리고 발을 오므린 모양으로 진을 짠 형국인데, 다수의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지금은 적이 많진 않지만 절대적인 무공 우위에 있었기에 귀배진을 펼친 것이다.
원래라면 강동칠괴는 일곱 명이었기에 네 사람이 사방을 맡고 가운데에서 세 사람이 밀리는 쪽을 보강한다.
하지만 적비연은 순간적으로 이를 보안해서 열두 명이 소화할 수 있도록 변형했다.
사람이 많은 만큼 더 단단한 방어진이 만들어진다.
물론, 모두가 합심을 해준다면.
다행히 적비연의 명에 바로 반응해준 자가 나타났다.
오 번이었다.
그는 말없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남쪽에 자리했다.
일 번과 이 번도 곧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앞서 적비연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진 자들이었다.
이미 한 번 진 빚이 있었기에 두말하지 않고 따랐다.
게다가 적비연의 무공 수위가 자신들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육 번은 여전히 투덜거린다.
그러자 칠 번 거구가 슬쩍 나선다.
“내가 육 번과 자리를 바꾸면 어떤가?”
적비연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다.
이미 적비연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균형이 맞지 않는다.”
칠 번은 기다란 대부를 이용한다.
접근전을 펼쳐야 하는 최전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대처 능력을 보면 중앙에 있는 게 맞다.
물론 이들 중 비도술을 사용하는 자가 있었다면 자신 옆에 있을 자는 거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십 번이 나선다.
“내가 육 번과 바꾸지.”
그는 쌍검을 사용하는 자였다.
나쁘지 않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십 번이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북쪽에 자리를 잡는다.
머쓱해진 육 번은 십일 번과 함께 일 장 정도 뒤에 자리를 잡았다.
몇 명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주니 다른 무인들 역시 별말 없이 따른다.
앞서 보여준 무위와 몇 사람을 구한 것이 도움이 됐다.
-제법이구나. 일부러 주인이 구한 놈들을 최전선에 배치한 거군.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이 센 녀석들일수록 진 빚을 갚으려는 속성이 있지.’
이제 진형이 완전히 갖춰졌다.
괴한들은 여전히 거리를 둔 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만약 그들에게 이성이 있었다면 이런 귀배진을 짤 시간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본능에만 충실했다.
그러다 보니 적비연의 무위에 잠깐 위축되어 웅크린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다시 살육의 본능이 피어오르리라.
슬금…… 슬금…….
’가면 쓴 괴한들이 귀배진을 짠 무인들을 훑어보며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귀빈석에서는 수뇌인사들이 분위기가 달라진 심사장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확실히 욕심이 생기는군.’
파천신군은 턱을 매만지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 귀문회주의 청탁을 들을 때만 해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빚진 걸 갚는 기분으로 들어주었다.
한데 이제 보니 저 반철룡은 물건이 아닌가?
확실히 탐난다.
그러는 사이, 가면 사내들은 귀배진을 짠 무인들의 탐색을 끝냈다.
그들의 본능이 알아차렸다.
귀배진을 짠 무인 개개인보다 자신들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마침내 그들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타다닷!
적비연이 소리쳤다.
“일 선, 안 되겠다 싶으면 빠져! 이 선에선 곧바로 보충! 뒤를 믿어라! 최후에는 내가 보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