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괴물
까아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무인 한 명이 신음을 터뜨리며 뒤로 튕겨 나갔다.
“크읍!”
괴한은 무인이 대처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그대로 몸을 날려 칼을 내려찍었다.
쉬이이익!
“헉!”
최후를 직감한 무인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괴한을 노려보았다.
나름의 저항이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섭게 떨어져 내리던 칼날이 바로 코앞에서 불꽃을 터뜨리며 튕겨 나갔다.
카아아앙!
간발의 차로 얼굴을 가린 것은 대부였다.
날이 온통 검은 대부.
휘릭.
순간, 대부의 날이 방향을 바꿔 위로 향하더니 부웅 날아올랐다.
“으라찻!”
거구의 기합성과 함께 날아간 대부는 괴한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떨어졌다.
하지만 괴한 역시 만만치 않았다.
투까앙!
어느새 칼을 끌어당긴 괴한이 묵직한 대부의 칼날을 받아낸 것이다.
불꽃과 함께 괴한의 무릎이 털썩 꺾였다.
거구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옳지! 꿇어야지! 그것이 네놈들과 나의 격차다!”
거구가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다시 대부를 세차게 휘둘렀다.
부우우웅!
부기(斧氣)가 강하게 일어나면서 무자비한 파도를 만들어낸다.
파도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난파되고 말리라.
쉬이이잇!
순간 가면을 쓴 괴한이 몸을 빠르게 회전했다.
검은 철갑이 몸을 둘렀기 때문인지 얼핏 보면 마치 시커먼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타아아앙!
부기와 도기가 부딪치면서 푸른 불꽃이 일어난다.
“칫!”
거구가 혀를 차면서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하지만 이 정도로 쓰러지는 건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악착같이 왼발을 뻗어내며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다.
콰아악!
왼발이 심사장 바닥에 깊이 파묻히면서 중심을 잡았다.
그럼에도 도기에 튕긴 탓에 몸은 쓰러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대부를 거꾸로 내려찍어 지팡이 삼아 버텼다.
쿠웅!
마치 진각을 밟은 것처럼 바닥에 그물 같은 균열이 쩌적 생겨났다.
거구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빈틈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쓰러졌다면 괴한은 곧바로 공격을 해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괴한이 그대로 뒷발을 차면서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쒸에에에엑!
섬뜩한 파공성에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하나 거구는 방어하지 않았다.
대신 희미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넌 걸렸다, 이 새끼야.’
찰나, 뭔가 잘못된 것을 느낀 괴한이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좌우에서 팔 번과 십삼 번 무인이 벼락같이 몸을 날려온다.
팔 번은 창(槍)을 다루는 창사다.
십삼 번의 주무기는 구절편(九節鞭)이다.
왼쪽에서는 팔 번이 창기를 머금은 채 떨어져 내렸고, 오른쪽에서는 구절편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뻗어왔다.
쒸이이잇!
치킥치킥치킥……!
괴한이 괴성 같은 기합성을 지르며 바닥을 툭 찍어 찼다.
“쿠아아아!”
휘리리리릭!
그의 몸이 다시 검은 회오리바람이 되어 솟구쳐 오른다.
투까강!
장창과 구절편이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표적이 되었던 거구는 다시 정비를 끝내고 검은 돌풍이 된 괴한에게 대부를 올려쳤다.
“뒈져라! 이 괴물 같은 놈아!”
후우우우웅!
정말이지 무식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부기가 용오름이 되어 솟아오른다.
검은 돌풍과 이제 막 솟구친 용오름이 허공에서 격돌한다.
투카아아앙!
불꽃이 번쩍이더니 뭔가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칼날이다!”
관람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의 눈은 정확했다.
허공에 튕겨 오른 것은 괴한이 들고 있던 칼날이다.
거구의 부기를 이겨내지 못한 괴한의 칼날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탁!
거구가 할 일을 끝내고 바닥에 착지하자, 괴한도 훌쩍 물러난 곳 바닥에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촤아악!
괴한은 부러진 칼로 바닥을 짚었다.
이번만큼은 괴한도 협공을 감당하기 버거운 모양이었다.
연이어 네댓 번의 강공이 이어졌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도 공격의 끝은 아니었다.
“어딜 보냐!”
괴한의 등 뒤에서 다시 우렁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처음에 그를 상대했던 이 번 무인이었다.
그는 주먹을 쓰는 권사(拳士)였다.
후우우우웅!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주먹이 웬만한 어른 머리통보다도 커졌다.
권기(拳氣)가 발현된 탓도 있었고, 그가 익힌 권법의 특성이기도 했다.
괴한이 반사적으로 부러진 칼을 던졌다.
하지만 급히 던진 칼날은 권사에게 어떠한 상처도 주지 못했다.
투캉!
오히려 권기에 맞고 튕겨 나갔다.
어쩔 수 없이 괴한이 쌍장을 뻗었다.
퍼퍼어엉!
요란한 소리가 들렸지만 확실히 힘에 부친 건 괴한 쪽.
계속 이어지는 공격 탓에 제대로 대처할 시간이 부족한 듯했다.
그래도 정말이지 무서운 실력이다.
초절정 초단에 이른 자들이 합공을 퍼붓는데도 단신으로 이렇게까지 버티다니.
타다다닷!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중심을 잡는 괴한.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적비연.
다행히 동남북의 다른 괴한들을 맡은 자들이 차륜술을 써가면서 잘 버텨주고 있었다.
애초에 적비연은 거구를 비롯해서 서쪽을 맡은 무인들에게만 전음을 보냈다.
우선 이 한 명을 먼저 잡자고.
굳이 서쪽의 괴한을 먼저 지목한 이유는 그가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생각보다는 강했지만 무인들이 잘 싸워주었다.
거구를 비롯한 무인들 역시 희망을 보았다.
적비연의 지시대로 움직이니 틈이 생겼고 승산이 보인다.
이제 적비연이 나설 차례!
적비연이 곧장 바닥을 차고 날아가면서 그 틈을 파고들었다.
쒸에에에엑!
적비연의 신형이 몇 개의 그림자를 이끌며 부드러우면서도 빠르게 날아간다.
마치 버들가지가 흩날리는 것처럼 그의 신형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삐리리리!
검신이 공명하며 꾀꼬리 울음 같은 소리를 내지른다.
검신은 연신 수양버들가지처럼 낭창거리고, 검신을 떠받든 검기는 찰랑이는 물결이 된다.
촤촤촤촤아악!
물결 위에서 흔들리는 버들가지가 괴한의 전신을 에워싸며 부드럽게 훑었다.
그러나 귓가에 들리는 것은 섬뜩한 파육음.
서호검법의 초식 중 제오초, 유랑문앵(柳狼聞鶯)이다.
역시나 서호 동쪽에 위치한 서호십경을 본떠 만든 초식이다.
피츗, 피츗, 촤아앗!
핏줄기가 튀어오르더니 전신에서 피가 마구 터져 나온다.
지켜보던 무인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됐다!’
정말이지 적비연의 공격은 환상적이었다.
일말의 의심을 품던 자들마저 홀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치명상은 아니다.
전신을 철갑으로 둘렀기에 철갑이 미치지 않은 빈곳을 베었을 뿐이다.
피를 보자 괴한이 광분하여 소리쳤다.
“크와아아아아!”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관람석에 있던 무인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고통스러워했다.
“크윽!”
“제길, 무슨 목청이……!”
물론 단순히 목청으로 낸 소리가 아니다.
괴한이 내지른 건 내공을 실은 사자후(獅子吼)였다.
그러다 보니 공력이 약한 몇몇 관람자들은 각혈을 하면서 주저앉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잔뜩 화가 난 괴한은 눈이 뒤집힌 것인지 적비연에게 다짜고짜 몸을 날려 왔다.
팡! 파팡! 펑!
칼이 없으니 권각을 뻗었는데, 하나하나의 동작이 매섭기 짝이 없다.
만약 스치기라도 한다면 반드시 피를 보리라.
적비연이 뒤로 훌쩍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합공!”
명령이나 다름없는 투였지만, 무인들은 일절 불만을 토하지 않고 동시에 달려들었다.
적비연의 방식이 통한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으라차찻!”
“뒈져!”
“흐아압!”
네 명의 무인이 동시에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쇄도했다.
사방에서 무인들이 달려들자 괴한이 다시 괴성을 지르더니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크아아아!”
투카카카앙!
네 사람의 공격이 괴한의 몸에 닿기도 전에 불꽃을 터뜨리며 튕겨 나갔다.
적비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호신강기(護身罡氣)……?’
맙소사.
호신강기라니.
도대체 얼마나 강하단 소린가?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틈이 없다.
기회는 지금이다!
네 명의 무인이 경악하며 튕겨 나가는 이 순간!
합격술을 막아내고 호신강기가 사라진 지금!
파앗!
적비연이 그 틈을 노려 매섭게 파고들어갔다.
쒜에에엑!
괴한은 이제 막을 방도가 없다.
굳이 막아낸다면…….
‘저 팔목에 찬 철갑 정도겠지!’
아니나 다를까, 괴한이 팔목을 열십자(十)로 교체하면서 적비연의 검봉을 막았다.
따다아앙!
마치 맑은 종소리 같은 청명한 금속성이 울린다.
이토록 맑은 소리가 전투 중에 울린 것이 맞나 하는 착각마저 든다.
하나 그것은 남병만종(南屛晩鐘) 초식을 알리는 신호다.
남병만종 초식을 정면으로 받게 되면 상대의 검신은 종신(鐘身)이 된다.
그 떨림은 그대로 검파로 전해져 마치 종의 용뉴(龍鈕)처럼 공명하면서 진동을 손으로 전한다.
하지만 그 공명에는 적비연의 내공이 실려 있다.
공명은 상대의 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아차 하는 순간 검을 놓치고 만다.
그때는 이미 흩뿌려지는 핏방울이 석양을 만든 후다.
서호 남병산(南屛山) 정자사(淨慈寺)의 종소리와 석양을 아울러 이름 지은 남병만종.
마찬가지로 서호십경 중 하나다.
어쨌거나 검을 통해서도 이럴진대, 팔목에 찬 철갑으로 막았으니 그 효과는 오히려 극대화되고 말았다.
촤촤촤아아악!
공명으로 인해 괴한이 멈칫거리는 사이, 적비연의 검신은 피를 보았다.
촤아아앗!
괴한을 스쳐 지나간 적비연이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멈춰 섰다.
-훌륭했다.
모처럼 극마의 칭찬.
적비연 스스로 생각해도 흠잡을 데가 없는 한 수였다.
양팔을 교차한 상태로 동상처럼 서 있는 괴한은 움직임이 없다.
관람자들은 물론 적비연과 함께 싸우던 무인들도 입을 딱 벌렸다.
이번에는 귀빈석의 수뇌인사들도 두 눈에 힘을 주고는 적비연과 괴한을 번갈아보았다.
잠시 후.
철컥, 철컥, 털썩, 털썩!
괴한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철갑들이 잘려 나가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스르르…… 털썩!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 역시 정확히 세로로 쪼개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앗!”
반대편의 관람자들이 괴한의 얼굴을 보고는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한편 괴한의 등을 바라보는 무인들은 입매를 비틀었다.
드디어 놈의 약점을 꽁꽁 숨긴 철갑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온통 상처투성이의 등.
단단해 보이는 피부지만 그래도 철갑보다는 나을…… 진대?
이상하다.
뭔가 느낌이 묘하다.
왠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적비연도 느꼈다.
그 느낌의 발로는…….
‘저 괴한……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잖아?’
그랬다.
거듭된 공격으로 엄청난 기운을 소진했을 터인데 오히려 강렬한 기운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뭐 저런 괴물이……?’
정말이지 이건 괴물이라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괴한이 스윽 돌아섰다.
그제야 적비연을 비롯한 무인들은 반대쪽 관람자들이 왜 비명을 질렀는지 깨달았다.
괴한의 얼굴은 완전히 녹아내린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당한 것인지 피부가 허물어져 눈코입이 제 기능을 하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
“역겹군.”
웬만하면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거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말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괴한의 몰골은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크하하하하!”
괴한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순간 관람석의 수많은 무인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크으윽!”
“아악!”
엄청난 내공!
적비연 역시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두 다리로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그 불길한 생각이 극마의 입에서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저놈…… 철갑이 방어구가 아니었어.
‘금제 장치였던가?’
적비연이 짐작한 바를 떠올리자 극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건…… 죽었다가 깨어나도 지금 주인이 이길 수가 없다.
인정한다.
이건 진법 같은 것으로 어찌 극복할 수준이 아니다.
격차가 너무 크다.
이자가 이렇다면 다른 괴한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철갑이 보호구가 아니라 더 강한 기운을 내뿜지 못하게 하는 금제 장치였다니!
도대체 저런 놈을 상대로 어찌 싸우란 말인가?
다음 순간, 괴한이 씨익 입매를 틀어 올렸다.
파앗!
곧이어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찰나,
콰아아앙!
허공에서 폭음 같은 소리가 터지더니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 괴한을 한손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닌가?
쿠다아앙!
괴한을 바닥에 파묻어 버릴 듯 거세게 내려찍으며 나타난 자는 놀랍게도 흑천련주 태청강이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그가 괴한의 뒷목을 한손으로 찍어 누른 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심사는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