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32화 (133/301)

132. 이변

묵직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심후한 공력은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

과연 현 강호를 양단한 자의 무위다웠다.

극마조차도 턱을 괴며 인정할 정도였으니.

‘제법이군.’

뭐, 표현은 좀 그래도 확실히 인정한 것이다.

어쨌거나 그 괴물을 단숨에 제압한 련주가 내공을 끌어올리자 바닥에 파묻혀 버둥거리던 녀석이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련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혈랑대, 정리하라.”

그러자 심사장 전체를 떨쳐 울리는 복명의 목소리.

“충(忠)!”

곧이어 관람석 곳곳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야조(野鳥)처럼 날아올랐다.

촤라라! 촤라라! 촤라라락!

그들은 일제히 금속 그물 같은 것을 펼치면서 괴한들을 덮쳐갔다.

괴한들과 함께 어울려 싸우던 무인들이 재빨리 바닥을 차면서 훌쩍훌쩍 물러났다.

샤아아아악!

그물이 세 명의 괴한들을 완전히 덮쳐 버리자, 가면 쓴 괴한들은 물 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보통 그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금속 성분 중에 내공을 억제하는 공진철이 섞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혈랑대가 그물을 거두어들이자 쓰러진 괴한들이 꿈틀거리면서 끌려갔다.

련주에게 사로잡힌 괴한은 혈랑대주가 다가와 직접 금속 수족갑을 채워서는 끌고 갔다.

그들이 철문을 통해 모두 빠져나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무인들이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래도 련주 앞에서 털썩 주저앉을 수야 없지 않나?

‘그래도 다리에 힘이 풀리긴 하네.’

-클클클. 그리 약해서야.

극마가 빈정거렸지만 적비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 괴한을 마주한 순간 정말이지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공포심이 올라왔다.

확실히 그 괴한 역시 초인의 영역에 있었다.

백발광인처럼.

어쩌면 반철룡의 기억이 되새겨져서 더한 공포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반철룡은 백발광인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으니까.

‘이왕이면 다른 자들 가면도 벗겨보고 싶은데…….’

-그랬다간 가만있지 않을 분위기인데?

그건 그렇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흑천련은 저 가면인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쩌면 가면을 벗겨봐야 지금처럼 엉망진창이 된 얼굴만 볼지도 모른다.

한편 심사장이 완전히 정리되자, 련주의 시선이 진행자인 진천규에게 향했다.

“수라당주, 선포하라.”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천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사이, 련주는 유유히 경공술을 펼쳐 귀빈석으로 돌아가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진천규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최, 최종 십이인! 합격!”

그러자 심사장을 가득 채운 관람자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우와아아아!”

“축하한다! 진짜 대단했다!”

“올해 치러진 심사가 제일 재미있었다!”

다행히 귀배진을 펼친 후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몇몇이 부상을 입긴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어쨌든 목적한 바는 이루었군.

극마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생각보다 많은 걸 보여주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실력을 숨기려고 했지만, 그 가면인들을 상대로 여력을 남겨둘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련주는 결코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련주가 나선 이유는 하나다.

이만하면 응시자들의 수준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모두 합격을 시켜줘도 무난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가면을 벗기고 금제 장치마저 제거해 버릴 줄은 몰랐으리라.

하지만 우왕좌왕하다가 당하기만 했다면 응시자들이 전멸을 하더라도 련주는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사파다.

흑천련의 방식이다.

자신들이 던진 시험에서 살아남을 재주도 없는 자들이라면 죽어도 무관하다.

어찌 보면 냉혹하기 짝이 없지만, 시종 생사를 넘나드는 강호에서 사파의 길을 걷는 무인이라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남은 건 선택지인가?’

적비연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수라당주 진천규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단주 이상급의 원하는 직책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너희들도 알다시피 단주 이상급에서의 빈자리는 모두 여섯. 너희 중 절반은 현직에서 대기하거나, 발령대기 상태로 시일이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열두 명의 무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지망 순서는 성적 우수자 순이다.

그리고 단주 이상급부터 지망을 하게 되고, 그다음 대주 이상, 마지막으로 조장 이상이다.

그래야 빈자리가 최종 확정되기 때문이다.

진천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비연을 슬쩍 돌아보았다.

“크흠. 그럼 본심에서 가장 먼저 최후의 일인으로 남은 삼 번!”

“흑룡대주, 반철룡입니다.”

적비연이 한 걸음 나서며 신분을 밝혔다.

진천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빤히 보았다.

“원하는 직책은 무엇인가?”

그의 물음에 그 넓은 심사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보나마나 파천계가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성적 최우수자는 대부분 파천계나 월희계를 선택해 왔다.

일 공자가 있는 파천계를 두고도 월희계를 선택하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월희마녀의 아름다움이 한몫을 했다.

그만큼 그녀의 미모는 대단했으니까.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표현은 딱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적비연은 월희계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소문이 퍼졌다.

그가 월희계의 혈성단주 손목을 잘랐다는 것이.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진급 심사에서는 같은 조에 속해서 혈성단주를 죽여 버리지 않았나?

그러니 월희계보다는 자연히 파천계를 선택하리라.

이런 생각은 파천신군 역시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뇌옥에서 빼내준 사람이 자신이지 않은가?

은혜를 안다면…… 아니, 그냥 당연한 이유로 자신을 선택하리라.

모처럼 찾아온 인재다.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주리라.

물론 지금은 흑철단주(黑鐵團主) 자리가 비어 있긴 하다.

하지만 흑철단은 파천계에 속한 조직 중에서도 가장 하급에 속한다.

지금 보인 무위라면 그 이상의 자리도 만들어주어야 할 판이다.

상관없다.

어차피 흑천련에서는 힘이 곧 권능이다.

누구라도 적비연보다 못하다면 흑철단으로 강등시키면 그만.

파천신군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적비연을 가만히 보았다.

‘환영한다, 반 대주.’

하지만 어찌 알았을까?

그 생각이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마침내 적비연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발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 공자님의 호법장을 맡고 싶습니다.”

“……!”

순간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적비연이 입을 열기 전보다 더욱 조용해졌다.

정말이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

그 잠깐의 침묵이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야?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아냐. 나도 이상한 소릴 들었어.”

“사 공자님의 호법장이라니? 허!”

“왜 저러는 거지? 탄탄대로를 앞두고 저런 선택이라니?”

당황한 건 진천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파천신군을 힐끗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파천신군의 표정이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다.

반면 월희마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참을 끔뻑이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렸다.

사 공자, 투혈권왕은 어떤가?

그 역시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그로서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그는 십 번 무인 정도로 낙점하고 있었다.

쌍검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민첩하면서도 부드러운 움직임.

호법장으로 괜찮을 것 같았다.

다만 그 역시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에 세 번째로 지망권이 있었다.

과연 자신을 선택해 줄지 의문이었다.

한데 대뜸 첫 번째 지망자가 자신을 선택하다니?

진천규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사 공자님의 호법장이 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의 진천규가 이번에는 련주를 힐끔 보았다.

하지만 면사로 가려진 련주의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천규가 사 공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커흠. 권왕전주(圈王殿主)님은 지망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권왕전주는 사 공자의 공식 직책이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사 공자에게 향했다.

권각술을 익힌 만큼 비교적 큰 덩치지만 어딘지 순박해 보이는 얼굴.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적비연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내 호위를 자청하는가? 이유가 있는가?”

일종의 면접 심사다.

적비연은 최대한 반철룡다운 대답을 했다.

“제 검에 의미를 담고 싶었을 뿐입니다.”

-캬아, 너야말로 진정한 연기자다.

극마가 탄성을 터뜨렸다.

어딘지 비꼬는 투였지만 적비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사실 적비연 내면에 잠재된 타아였기에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 공자 투혈권왕이 어딘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곧 진천규를 돌아보며 답했다.

“받아들이겠소.”

그의 말이 떨어지자 관람석이 일제히 떠들썩해졌다.

“와아, 대박 사건이다! 첫 번째 지망자가 권왕계로 갔다!”

“정말 놀랄 일이군!”

“어이, 괜히 호들갑 떨지 말라고. 그래 봐야 이제 막 계열을 탄 신입이야. 판도가 바뀔 정도는 아니야.”

“뭐, 그건 그렇지.”

각양각색의 반응이 이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천규가 목을 가다듬고는 두 번째로 최후의 일인이 된 거구를 불렀다.

“그다음, 칠 번!”

“평무인, 엽강호(葉姜浩)입니다.”

“원하는 직책은 무엇인가?”

엽강호가 씨익 웃으면서 귀빈석을 훑었다.

이번에는 파천신군과 월희마녀가 동시에 탐나는 눈빛을 보내왔다.

전주 중에서는 유일하게 사 공자인 투혈권왕만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적비연을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매우 흡족한 상태였다.

마침 엽강호가 히죽 웃더니 우렁차게 외쳤다.

“사 공자님의 좌호법이 되고 싶습니다!”

“뭐, 뭣……?”

진천규가 저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진행자로서 철저하게 감정을 절제해야 했지만 너무나 뜬금없는 소리였기에.

다행히 관람자들이 더욱 격한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그의 반문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이제 파천신군의 표정은 똥을 씹은 게 아니라, 거의 삼킨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월희마녀 역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

하지만 그녀는 곧 무슨 생각인지 배를 쥐고 웃었다.

언뜻 경박스러운 웃음소리였지만, 그녀였기에 그 모습마저 매우 고혹적이었다.

“재미있네, 재미있어. 오늘 너무 흥미진진한걸? 그렇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파천신군이 길게 숨을 내쉬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구나.”

그의 반응에 월희마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라니까.’

일 공자가 이토록 당황해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좀 놀려보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이 자극하자마자 일 공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심을 찾은 것이다.

그나저나 저것들이 정말…….

자존심이 구겨졌다.

차라리 파천신군에게 빼앗긴 인재라면 이렇게 황당하진 않으리라.

진천규가 이번에도 사 공자를 돌아보았다.

“권, 권왕전주님은 지망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투혈권왕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는 어째서 좌호법을 원하는가?”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됩니까?”

엽강호가 거침없이 물었다.

투혈권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자 때문입니다.”

엽강호가 옆에 선 적비연을 가리켰다.

적비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엽강호를 돌아보았다.

아니, 가만있는 날 왜?

엽강호가 대답이라도 해주듯 말을 이었다.

“제 성격상 무리를 이끄는 건 좀 골 아플 것 같고. 이만한 자가 제 머리 위에 있다면 믿고 따를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습니다.”

그러자 진천규가 버럭 소리쳤다.

“무엄하다! 호법으로서 몸 바쳐 지켜야 할 대상이 분명하거늘! 네놈은 대체 누굴 믿고 따른다는 것이냐! 제 주인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그만.”

뜻밖에도 투혈권왕이 손을 들고는 제지했다.

그가 엽강호를 보며 말을 이었다.

“몸 바쳐 나를 지키되, 호법장을 믿고 따르면 될 것 아니겠소?”

“권, 권왕전주님!”

“내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그림자처럼 따를 호법이오. 허울 좋은 거짓보단 진솔한 자가 좋을 터. 저자를 받아들이겠소.”

그러자 다시 한번 장내가 술렁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이변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왠지 농락당하는 기분이라도 느낀 것일까?

진천규가 조금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다, 다음! 십 번!”

“혈풍대주(血風隊主), 한사(韓師)입니다.”

“원하는 직책은 무엇인가?”

“제가 원하는 직책은…… 사 공자님의 우호법입니다.”

장내가 또 한 번 술렁였다.

극마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낄낄거렸고 적비연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아니, 다들 왜 이래? 이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