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이변
정말이지 엄청난 이변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진급 심사에서 일지망자부터 삼지망자까지 모두 권왕계를 선택한 것이다.
진천규가 뺨을 파르르 떨었다.
본인이 화날 일은 분명히 아닌데 왜 이렇게 분한 마음이 드는 걸까?
아마도 너무 어이가 없기 때문이리라.
합격자들이 너무나 상식 밖의 선택을 하니까 괜히 짜증이 나는 것이리라.
아니면 그 자신이 월희계였으니까 왠지 모를 분함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십 번, 혈풍대주 한사는 투혈권왕의 우호법 자리를 선택했다.
그는 쌍검을 능숙하게 다뤄서 처음부터 투혈권왕이 조금 욕심을 냈던 자였다.
진천규가 이번에도 투혈권왕을 돌아보았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투혈권왕이 한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답했다.
“즐거웠습니다.”
“즐겁다?”
“저자와 싸우는 것이 흥분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투혈권왕이 한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상관없지 않은가?
자신을 지키는 것에 의미를 담겠다는 자와 그를 따르고 싶다는 거구.
그리고 그런 자들과 함께 싸우면 즐겁다는 한사.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만약 어떤 목적이 있거나 암계를 품고 접근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럴싸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투혈권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소.”
“권, 권왕전주님……!”
“왜? 문제라도 되오?”
“그, 그것이 아니라…… 수신호위를 그리 가볍게 여기시면 추후 신변에 위험이 될 수도…….”
말을 뱉던 진천규가 실언을 깨닫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참견이었습니다.”
그가 이토록 즉각 사과한 것은 뒤에서 냉랭한 시선을 던지는 파천신군 때문이었다.
파천신군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일렀다.
“당주께서 감히 훈수를 두는 것이오?”
“죄송합니다.”
진천규가 다시 한번 사과했다.
비록 후계의 자리를 다투는 사이였지만 파천신군은 사제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사제들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그 자신뿐.
자신이 아닌 그 누구도 사제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껏 고개를 조아린 진천규가 심사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호법장을 제외한 좌호법과 우호법은 단주 이하 직책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엽강호와 한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끄음.’
속으로 신음을 흘린 진천규가 한숨을 내쉬고는 다음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변은 마지막까지 계속됐다.
한사 이후로도 줄줄이 투혈권왕의 수신호위가 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심지어 심사 중에 적비연에게 반기를 들었던 육 번 응시자까지!
그들 대다수는 선택의 이유를 적비연 때문이라고 인정했다.
마지막 지망자가 적비연을 선택했을 때는 관람자들도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물론 적비연이 보여준 무위는 훌륭했다.
하지만 모든 응시자들이 적비연을 따라갈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하지만 그건 응시자들만 느낀 유대였다.
적비연은 딱히 강요하지 않았다.
육 번이 반발을 했을 때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부드러운 통솔력을 발휘했다.
그의 뜻이 흐르는 물처럼 응시자들 사이를 유유히 휘저었을 뿐이다.
응시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녹아들어 간 것이고.
연륜 때문이다.
응시자들을 부드럽게 이끄는 노련함 때문이다.
물론 그 노련함은 적비연의 숱한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따로 의식한 것도 아니었다.
여러 사람의 기억을 흡수하고 보니 사람마다 특성을 이해하기 쉬웠고, 그 특성을 아우르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행동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단지 내뱉는 단어와 말투만 다른 게 아니다.
눈빛, 호흡, 손짓, 걸음걸이 등 모든 것이 응시자들을 사로잡았다.
-공천지권위(孔天之權威)!
극마가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상고시대에 한 장군이 있었다.
공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인간계로 내려와 설쳐대는 신수(神獸)에 대항해서 병사들을 이끌고 싸웠다.
그의 말 한마디는 천명(天命).
모두가 그를 믿고 따르며 의지했다.
그는 단 한 명이었지만, 그의 그림자는 수백만에 달했다.
누구든 공천을 보면 홀린 듯 따랐다.
건장하고 고집 센 사내도 공천만 보면 마치 사랑에 빠진 여인처럼 눈이 뒤집혀 만사 제쳐두고 따랐다.
마선의 경지에 오른 극마에게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
누군가를 사로잡는 마력.
무공도 아니고, 사술도 아니다.
자연의 흐름 같은 것.
한때 그 능력을 공천지권위라고 불렀다.
다만 공천지권위는 같은 환경에 처한 사람들끼리 통한다.
때문에 관람자들은 응시자들의 이러한 집단행동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물론, 적비연이 정말 공천지권위를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극마의 추측일 뿐.
그리고 엽강호와 한사 같은 경우는 마력에 홀리기보단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지원한 것이다.
분명한 건 이런 현상을 적비연이 의도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적비연으로서도 당황스러웠다.
본의 아니게 이변의 중심에 서지 않았나?
‘돋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제대로 찍혔겠군.’
-킬킬. 그러게 왜 그렇게 난리를 쳤냐?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뭐, 그 가면 쓴 괴한들을 적당히 상대했다간 이쪽이 죽어나갔을 거고.’
-하긴. 크크크.
극마가 재미있다는 듯 연신 키들거렸다.
한편 진천규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음에도 연신 전주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렵게 마무리를 지었다.
“이, 이상…… 단주 이상급 진급 심사와 배정을 모두 마친다.”
* * *
특임대원들은 모두 제몫을 해주었다.
모두 대주급 이상 심사에서 통과했고, 그들 모두 투혈권왕의 호신위 자리를 선택했다.
오히려 그들은 의심을 별로 받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단주급 이상의 무인들이 모두 투혈권왕의 호신위가 된 게 더 큰 화제였기에.
덕분에 특임대 네 사람의 지원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분위기에 휩쓸려 천지분간 못하고 선택한 것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여추백은 당연히 상관을 따라서 이동한 줄로 알 테니 문제없었다.
어쨌거나 모든 심사와 배정이 끝나자 흑천련은 심사장 안에 탁자와 의자를 가득 채우고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정말이지 악취미라니까.’
적비연이 왁자하게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는 무인들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는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싸늘한 시체가 됐다.
한데 바로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다니.
저기서 웃고 있는 무인의 발밑에는 최후의 일인으로 남았다가 괴한에게 심장이 뚫려 죽은 십이 번의 시체가 있던 곳이다.
그리고 옆에서 고기를 뜯는 엽강호의 발치는 마영후의 시체가 누워 있던 곳.
아직도 혈흔이 보인다.
하지만 사망자에 대한 추모 따위는 없었다.
칠괴와 반철룡의 기억을 가진 적비연은 이러한 흑천련의 방식을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자아가 따로 있는 만큼 썩 내키지는 않았다.
반면 극마는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듯 킬킬거렸다.
-약한 무인은 언제든 죽게 마련이다. 약한 놈들이 죽을 때마다 추모를 하려면 평생을 낭비해도 모자란다.
‘그게 너희 사파 놈들의 방식이냐?’
-흥! 고상한 척하지 마라. 너희 정파 놈들도 마찬가지야. 너희들은 언제나 희생자를 추모하고 절대 잊지 않겠다며 다짐하지. 하지만 정말 그런가? 십 년? 아니, 오 년? 아니지, 일 년 만 지나도 네놈들은 희생자를 떠올리지 않지. 불편한 기억은 자꾸 되새겨 봐야 피곤하니까.
적비연의 표정이 조금은 씁쓸해졌다.
딱히 부정할 수는 없기에.
하지만 그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우리도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어느새 우리가 됐군.’
-사해는 동도다. 흐흐흐. 사공이나 마공이나. 뭐, 어쩌면 정공이나.
‘매한가지.’
-그렇지. 오늘은 마셔라! 그저 즐기는 거다.
‘마셔도 내가 마시는데 네가 왜 흥분하냐?’
-흥! 술을 맛으로 마시냐? 분위기로 마시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극마는 내심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러는 사이 여추백이 다가와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대주님…… 아니, 이젠 호법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편한 대로 불러. 뭐, 아직 정식 임명은 되지 않았지만.”
“저도 아직은 대주님이 익숙하지만 곧 적응해야 하니 호법장님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러든지.”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어딜 가나 호법장님 이변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맙소사, 단주 이상 통과자가 전부 호법장님을 따르다니. 상상도 못 했다고요.”
“나도 의도한 건 아냐.”
“와아, 의도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줄줄 따라왔다고요? 눈에 콩깍지라도 뒤집어씌운 게 아니고요?”
“아니라니까.”
“네네, 뭐 타고난 매력이라고 치죠. 그래도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내가 좀 볼매잖아.”
“볼매? 그건 또 뭡니까?”
“볼수록 매력덩어리.”
“…….”
“그렇게 썩는 표정 짓지 마라. 확 잘라 버린다.”
“엇! 너무하십니다! 좌호법 자리를 노렸던 저인데……! 이젠 제가 필요 없다는 겁니까?”
“굳이 필요할까?”
“헉! 진심 충격! 됐습니다! 전 술이나 마실 겁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냐?”
“아뇨!”
“그럼?”
“말 안 할래요.”
“맞을래?”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자 여추백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전음을 보냈다.
[그 두 연놈들이 난리도 아닙니다.]
[연놈들?]
[미계수와 동소유 말입니다.]
[아…….]
[자기들을 가둬두고 뭐 하는 짓이냐고 지금 마구 따지고 있습니다. 차라리 죽여 달라나요?]
대충 상상이 간다.
특히 동소유의 그 불같은 성격은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조금만 참으라고 해. 내가 가서 직접 말할 테니.]
[알겠습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처리하셔야 합니다. 빠르면 사흘 후부터 인수인계가 시작될 테니까요.]
[알았다.]
적비연의 대답을 들은 여추백이 돌아가자, 이번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한 남자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가 적비연과 눈을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아! 위대하고 강하신 반철룡 대주님! 이렇게 처. 음. 으. 로!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듣던 것보다 훨씬 잘생기셨습니다! 저는 매우 감동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주님을 오늘 이렇게 난. 생. 처. 음. 보았으니까요!”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마라. 도대체 네 연기력은 언제쯤 좋아지는 거냐?]
[헉! 이상했습니까? 이번만은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가주님을 처음 본 사람 같지 않았어요?]
[말을 말자.]
적비연에게 말을 걸어온 사내는 다름 아닌 인피면구를 쓴 단휘였다.
단휘가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전음으로 물어왔다.
[그런데 언제 저 녀석이랑 그렇게 친해진 겁니까?]
[누구? 여추백?]
[네! 아주 살가워 보이던데요?]
[그야 내 수하니까…… 너, 혹시 질투하냐?]
[질, 질투라뇨! 제가 그런 밴댕이 소갈딱지로 보입니까? 게다가 전 남자에게 질투는 느끼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이야?]
[누, 누가 과민 반응을 했다고 그러세요! 전, 전혀 과민하지 않았습니다! 흥!]
[그럼 됐고.]
[무슨 얘기 하신 겁니까? 그 녀석이랑!]
[그건 왜?]
[그, 그야 가주님의 오른팔로서 그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으니…….]
[네가 내 오른팔이었어? 언제부터?]
[하아, 됐습니다. 저 녀석이랑 잘 노십시오. 전 그만 가겠습니다.]
단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돌아갔다.
극마가 낄낄거렸다.
-재미있는 것들이네.
‘그런데 재미없는 것도 오는군.’
-아니지. 더 재미있는 거지.
극마와 적비연이 바라보는 곳에는 월희마녀 사예린이 술병을 든 채 생글생글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적비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축하해. 한 잔 받아.”
“감사합니다.”
적비연이 예를 갖추고는 사예린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본 련을 위하여.”
“그럼.”
적비연이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식도를 타고 화끈한 주기가 넘어가는 게 느껴진다.
사예린이 생긋 웃으며 툭 던지듯 말했다.
“잘 마시네? 그거 독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