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34화 (135/301)

134. 덫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주변이 침묵에 휩싸였다.

적비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움찔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적비연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사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침 근처에 있다가 사예린의 목소리를 들은 투혈권왕이 벌떡 일어나더니 다가왔다.

“사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야. 방금 내가 따라준 술, 독이 들어 있어.”

“진심입니까?”

투혈권왕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적비연을 비롯한 단주 이상급에서 통과한 자들이 모두 자신을 선택했다.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오리라 생각했다.

특히 월희마녀라면 그 반응이 더욱 빠를 것이라 여겼다.

한데 오늘 이렇게 나올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사예린은 그런 투혈권왕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시험은 해봐야 하잖아?”

“시험이라니…….”

“앞으로 네 수족이 될 자야. 그것도 널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네 신변을 지켜야 할 자지. 수신위들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신중해야 해. 경거망동하다간 주인이 어찌 되기도 전에 본인들이 먼저 죽어 나자빠질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남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면 되겠어?”

“하지만 사저니까…….”

“아무리 나라도.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다는 걸 모르는 거야?”

천진난만한 눈동자로 물어온다.

그 커다란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요염함과 청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얼굴이다.

불같이 일어나던 화도 그 얼굴을 보면 어쩐지 식어버린다.

하지만 여기에 넘어가면 안 된다.

사술이다.

섭혼미공(攝魂美功)!

그렇잖아도 아름다운 여인이 혼을 쏙 빨아들일 것만 같은 미혼술을 써버리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직접적으로 당하지 않은 인근 무인들조차 넋을 놓을 정도.

하지만 투혈권왕 역시 흑천련주의 제자다.

그가 잠시 숨을 멈추고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사예린의 눈동자에서 요기(妖氣)가 느껴졌을 때 곧바로 호흡부터 참았다.

사예린이 뿜어내는 모든 기운을 차단한 것이다.

“그 말은 사저가 제 적이라는 말입니까?”

“어쩌면?”

사예린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주변 반응은 달랐다.

모두 술렁거리면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후계자들의 다툼은 제법 오래되긴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한데 사예린은 거침이 없다.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여자.

투혈권왕이 눈살을 찌푸리자 사예린이 느닷없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뭘 그리 정색을 하고 그러니?”

“사저, 농담이 지나치…….”

“약 오르잖아. 사제에 비해서 나도 부족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심사에 통과한 인재들을 사제가 다 쓸어 담으니까. 그래서 좀 짓궂은 장난을 쳐봤어.”

“하면 독은…….”

“없는 게 당연하잖아? 설마 사제의 호법장에게 독을 쓰겠어?”

말을 마친 그녀가 술병을 들어 나발을 불었다.

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의미 없는 행동이긴 했다.

술에 독을 탔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따로 해독제를 준비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짝 술이 오른 표정의 사예린을 보면 누구도 그녀가 꼼수를 쓴다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한 떨기 꽃처럼 청초한 아름다움에는 그런 치졸한 수법이 절대 어울리지 않으니까.

눈이 살짝 풀린 사예린이 조금 꼬인 혀로 말을 흘렸다.

“사제, 그러니까 오늘은 한 번 봐줄 거지?”

꿀꺽.

투혈권왕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며 마른침을 삼켰다.

내공을 끌어올려 섭혼미공을 막았음에도 사예린이 취한 모습은 남심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사실 그녀에게 섭혼미공 따위는 불필요한 사술인지도 모른다.

그녀 존재 자체가 그 어떠한 미공보다도 강렬하니까.

“에이, 그렇게 딱딱하게 보지 말라니까.”

정말이지 팔색조가 따로 없다.

결국 투혈권왕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저도 다시는 이런 질 나쁜 농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와아, 역시 우리 사제가 최고야.”

사예린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근처의 무인들이 모두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투혈권왕을 바라보았다.

투혈권왕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들 마라. 너희들은 모른다. 저 아름다움 속에 얼마나 날카로운 가시가 숨었는지.’

사예린이 걸어가자, 투혈권왕이 다가왔다.

“놀랐다면 미안하네.”

“주군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적비연이 깍듯한 태도로 대꾸하자 투혈권왕이 조금 흡족한 것인지 빙그레 웃었다.

덩치가 제법 큰데도 불구하고 어딘지 순박한 모습이다.

“하지만 사저의 장난을 내가 미리 막지 못한 것은 책임이 있지. 그래도 이해해 주니 고맙군.”

“월희전주님의 말씀도 틀린 건 아닙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리 딱딱하게 생각할 건 없네. 어차피 자네는 아직 정식 내 호법장이 아니잖은가? 오늘만큼은 느슨해져도 되네. 단, 정식 임명이 되면 잘 부탁하지.”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투혈권왕이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적비연의 어깨를 토닥여 주곤 돌아갔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단휘와 예홍, 여추백이 얼른 달려왔다.

세 사람이 서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사정을 모르는 여추백으로서는 단휘와 예홍이 왜 갑자기 다가오는지 이해할 수 없으리라.

결국 단휘와 예홍이 슬쩍 한 걸음 물러나자 여추백이 얼른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다.”

“진짜 간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앞으로 굉장히 피곤해질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아. 그러니까 네가 이 공녀 좀 잘 구슬려 봐.”

“제가 구슬려지긴 하겠죠. 저런 미인 앞이라면…….”

“쓸모없는 놈.”

“아무튼 다행입니다. 왠지 월희전주면 정말로 독을 탔어도 이상할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죠.”

여추백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걸어가자, 그제야 단휘와 예홍이 다가왔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단휘의 물음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일단이라는 말씀은…….”

“독을 탔다는 건 농담이 아냐.”

“뭐라고요?”

단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옆에 서 있던 예홍은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바닥을 단단히 딛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두 눈은 당장에라도 월희마녀를 쫓아가 죽일 것처럼 이글거렸다.

적비연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경거망동하지 마. 괜찮으니까.”

“중독되셨다는 얘기 아니었나요?”

예홍이 돌아보며 묻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

“그런데 심각한 건 아냐. 치료할 수 있어.”

“아, 해독제가 있으시군요?”

단휘의 말에 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중독되었다고 해서 꼭 해독제가 필요한 건 아니지.”

“하면 어쩌시려고…….”

“독기를 빼내면 돼. 할 수 있어.”

단휘가 재차 질문을 던지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적비연이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으리라.

지금껏 그래왔으니.

게다가 적비연에게는 아상의 기억이 있지 않던가?

사실 적비연이 이렇게 호언장담한 것도 아상의 기억 때문이었다.

사예린이 술에 독이 들었다는 말을 한 직후, 적비연은 재빨리 내기를 일주천 해보았다.

전신의 세맥을 꼼꼼히 살펴보니 확실히 독기가 있었다.

매우 미세한 기운이다.

그때 아상의 기억이 도움이 됐다.

적비연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체내에 주입된 독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았다.

자신에게는 신의로 지내던 시절 무수한 사람을 살린 기억이 있다.

그중에는 독에 당한 자도 한둘이 아니다.

당장 무림맹주만 해도 수차례 독공에 당하지 않았던가?

무림맹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숱한 독을 봐왔다.

그리고 지금 몸에 들어온 그 독도 마찬가지.

‘확실히 겪은 적이 있었지.’

과거 무림맹 천풍단주(天風團主)가 당한 독과 같았다.

그 당시에는 처음 보는 독이었다.

독에 대해 빠삭한 당가의 협조도 받았다.

결국 어떤 독인지 알아내긴 했다.

월성고독(月成蠱毒).

월성고라는 독충이 있다.

녀석의 몸에 들어 있는 독액은 아주 미세한 양이다.

치명적이지도 않다.

꿀벌이 침을 쏘면 죽듯이 월성고도 독을 쏟아내면 바로 죽어 버린다.

이때의 독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면 월성고가 쏟아낸 독의 기운이 최고로 강성해진다.

독성의 잠복기가 딱 한 달인 것이다.

당시 천풍단주도 처음에는 미약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과 함께 죽어버렸다.

아상과 당 가주는 뒤늦게 월성고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다.

월성고가 흔한 벌레는 아니었기에.

아니, 이제는 볼 수 없는 벌레였다.

수백 년 전에 멸종한 벌레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월성고독에 당한 것이다.

누군가 월성고를 다루고 있다는 뜻.

그리고 지금 적비연은 그게 바로 월희계 괴독당주(怪毒堂主) 괴독자(怪毒者)라는 사실을 알았다.

옷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쓴 자.

음침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풀풀 휘날리는 자다.

평범한 여인이 잠깐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면, 비명을 지르지 않고서는 못 견디리라.

귓구멍으로, 콧구멍으로, 입으로 연신 기어다니는 벌레들 때문이다.

시뻘건 지네가 목 언저리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가고, 실지렁이 같은 것이 귓구멍으로 들어갔다가 콧구멍으로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얄팍한 피부 아래쪽으로는 뭔가 가늘고 기다란 것이 연신 꿈틀거리며 이동하는 게 보인다.

월희마녀에게 월성고독을 준 자는 바로 저 괴독자리라.

하지만 월성고독이라는 걸 안 이상 제거할 수 있다.

문제는 월희마녀가 과연 자신만을 노릴 것인가다.

그게 아니라면…….

‘좀 귀찮을지도.’

* * *

사예린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조로 걸어갔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를 보면서 몸에 걸친 옷자락을 하나씩 흘려 내렸다.

사락. 사라락.

부드러운 살결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옷자락이 애간장을 녹이는 듯하다.

뭇 사내들이 이곳에 있었다면 내일을 생각지 않고 몸부터 던지고 보았으리라.

참방.

그녀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제나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목욕이다.

딱히 몸이 더러워서 씻는 건 아니다.

그저 그녀가 씻어내는 건 기분이다.

더불어 하루 온종일 자신에게 달라붙었던 갖가지 시선들을 씻어내는 것이다.

달빛 비친 물로 옥처럼 매끄럽고 아름다운 피부를 씻어낸다.

그렇게 마음도 씻어낸다.

“월혼.”

그녀의 입이 무심히 열렸다.

그러자 욕조 곁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수신위다.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생각해?”

“반철룡이 중독으로 사망하면 련주께서 탐탁찮게 여기실 겁니다.”

“그건 걱정 마. 계획이 있으니까. 난 그걸 묻는 게 아냐.”

“하면……?”

“거기 있던 자들 중에서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대주급 심사에서 통과한 녀석들이 있었어.”

월혼은 정확히 누굴 지목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연회 자리에는 심사에서 통과한 자들이 모두 있었기에.

사예린이 달빛만큼이나 시린 미소를 짓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재미있단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반철룡에게 독잔이라고 말했을 때, 근처에 있던 그 남자와 여자의 반응.”

“아…….”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다.

오로지 반철룡과 주변 반응만 신경 쓰고 있었다.

사예린이 월혼을 힐끗 보았다.

“넌 오늘 처음 본 상관이 핍박받는다고 내게 적개심을 드러낼 수 있겠어?”

“불가능합니다.”

월혼은 단호했다.

사예린을 향해서 적개심을 드러낸다니.

엄청난 유대가 있지 않고서야.

아니, 그런 유대가 있어도 그녀를 보고 변심하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그런데…….

“나를 보고 적개심을 드러냈단 말이지. 그 연놈들이.”

사예린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두 인물은 바로 단휘와 예홍이었다.

아주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둘의 반응을 확실히 인지한 것이다.

사예린이 입매를 틀었다.

“이참에 다 날려 버리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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