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35화 (136/301)

135. 세 가지 조건

“크으읍! 끄으으윽!”

미계수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헉, 헉, 헉……!”

잠시 숨을 몰아쉬던 미계수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는 축 늘어졌다.

살짝 선잠이 들었던 동소유는 미계수의 거친 호흡 소리에 눈을 떴다.

“맙소사…….”

그녀가 깜짝 놀라서는 미계수에게 다가갔다.

미계수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가가, 괜찮아요?”

“지금은…… 괜찮소.”

미계수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동소유의 가녀린 손을 잡았다.

이렇게 가녀린 손에서 그토록 무시무시한 살수가 뻗어져 나간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나 적어도 자신을 대할 때만큼은 그저 부드럽고 따뜻한 여인의 손이다.

미계수의 시선이 동소유의 왼쪽 어깨에 머물렀다.

“아프지 않소?”

동소유는 잠깐 멈칫거렸다가 뒤늦게 말뜻을 알아듣고는 울컥거렸다.

“바보같이……! 벌써 한참이나 지난 얘기를 왜…… 그보다 지금은 가가의 상태가 중요해요.”

“나는 당신의 왼쪽 팔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데.”

“난 괜찮아요. 괜한 소리 말아요.”

“휴우, 그러게 성질 좀 죽이지 그랬소?”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오라버니의 복수를 할 수 없었으니까요.”

“복수라…… 그것이 그리 중하오?”

“당연하죠!”

“하나, 나는 당신이 중하오.”

“아아…….”

동소유는 다시 한번 울컥거렸다.

자신을 끔찍하게도 여기던 오라버니를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일까?

이토록 자신을 아껴주는 미계수를 보니 마음에서 격랑이 일어난다.

동소유가 미계수의 너른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가가. 아프지 말아요. 당신이 아프면…… 난 살아갈 낙이 더 이상 없어요.”

“나도 아프긴 싫은데…… 크읍……!”

말을 꺼내던 미계수가 다시 복부를 쥐고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이지 날카로운 도신이 전신의 뼈마디를 잘게 썰어내는 것만 같다.

“끄으으읍! 으아아악!”

결국은 참다못한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동소유는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가가! 이것 봐! 여기 아무도 없어? 사람이 죽게 생겼단 말이야!”

동소유가 철창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가 철창을 다시 치려고 하자 미계수가 손을 저었다.

“소, 소저……! 크읍……! 헉, 헉……! 이제 괜찮소. 그럴 필요 없소.”

“하지만……!”

“우리가 안달복달해 봐야 저들은 그저 즐길 뿐이오. 이젠 괜찮으니 이리 오시오. 좀 기대고 싶소.”

“가가…….”

동소유가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다가와서 미계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정말이지 이럴 때 보면 어린 소녀 같다.

입술을 질끈 씹은 채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니 보호본능이 절로 일어난다.

미계수가 동소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소저는 내가 왜 그리 좋소?”

“누, 누가 좋다고 그래요?”

“에이, 얼굴에 다 써 있는데.”

“무, 무슨 소리를!”

동소유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대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당신이 그냥 좋은걸.’

그러자 미계수가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물었다.

“내가 그냥 좋소?”

“누, 누가 그래요?”

“당신 마음의 소리가.”

“헉! 정말 마음의 소리가 들려요? 혹시 독심술 같은 걸 익혔나요?”

동소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미계수가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정말 이렇게 순진한 소저가 어찌 그리 악명을 떨치는지 이해할 수 없다니까.”

“뭐, 뭐예요? 지금 날 놀리는 거예요?”

“그렇소.”

“이 사람이 정말!”

동소유가 발끈해서 노려보았지만, 그 시선에는 미움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도 이렇게 농담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닌가?

동소유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말했다.

“가가의 통증이 점점 잦아지고 있어요. 빨리 해독침을 맞지 않으면…….”

“그러게 말이오. 곧 한 달이 되겠군.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복수는 생각지 말고 행복하게 사시오.”

“싫어요! 그런 소리 듣기 싫어요! 가가는 죽지 않을 거예요! 내가 어떻게든 살릴 테니까!”

“든든하군.”

“정말이에요.”

미계수가 빙그레 웃었다.

“고맙소.”

정말이지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남자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려나 싶을 정도로.

“당, 당연한 걸요. 뭐.”

동소유가 다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때 마침 철창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 보니 적비연이 철창밖에 서서 냉랭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 대주! 이제 그만 우릴 풀어줘!”

동소유가 악에 받친 표정으로 외쳤다.

하지만 적비연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은 본 련의 공적이라는 걸 모르는가? 당장에라도 련주께 고해서 사지육신을 찢어도 모자라지.”

그러자 미계수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왜 망설이고 있소?”

“망설이긴 누가?”

“우릴 지금까지 잡아두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았단 뜻일 텐데.”

“눈치가 없진 않구나.”

“목적이 뭐지?”

미계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적비연이 그런 미계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너희들을 만나고자 하는 분이 계신다.”

“우릴 만나고자 하는 분?”

“그래. 그분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진작 련주께 고했겠지.”

“그분이 누구기에…….”

“일전에 개인적으로 은혜를 입은 분이다. 너희들은 감히 얼굴조차 보기 힘든 분이시지. 따라와라.”

철컹, 끼이익……!

적비연이 뇌옥의 문을 열어주었다.

미계수와 동소유가 서로를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으드득…… 우둑……!

적비연의 외모가 꿈틀거리면서 변형됐다.

마침내 적비연의 체형이 원래 자신과 거의 똑같아졌다.

적비연은 품에서 인피면구를 꺼내 얼굴에 밀착시켰다.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니 곧 자기 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달라붙었다.

정말이지 다면선사의 솜씨는 늘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이 얇은 가죽을 덮어썼다고 외모가 그리 감쪽같이 바뀌다니.

그야말로 신기에 가깝지 않은가?

한차례 심호흡을 한 적비연이 취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아까부터 눈이 빠지도록 자신을 기다리는 미계수와 동소유가 앉아 있었다.

손과 다리가 각각 쇠사슬로 이어진 두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그들은 적비연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강동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누구……?”

미계수가 넌지시 질문을 던지자 적비연이 대답 대신 무뚝뚝하게 걸어가서 의자에 턱 걸터앉았다.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그럴수록 미계수와 동소유는 의아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자신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한 사람.

바로 이 사람이다.

물론, 그들은 반철룡과 지금 눈앞의 사람이 결국 같은 적비연이라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로서는 반철룡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 긴장을 한 채 적비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누굴까?

련 내의 수뇌부 중 한 명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자신들을 은밀히 만나려는 것일까?

자신들의 목숨을 빌미로 거래를 할 생각일까?

아니면 자신들을 도구로 삼겠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자는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미계수는 어차피 앞으로 며칠 살지 못한다.

그리고 미계수가 죽는다면 동소유 역시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런 두 사람에게 거래를 제안한다면 그야말로 입만 아픈 짓.

그랬기에 두 사람은 차분했다.

그 어떤 제안을 해와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적비연의 대답을 듣는 순간, 두 사람은 그 결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적비연이 두 사람을 차분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벽력가주 적비연이오.”

“……!”

미계수는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고, 동소유는 몸이 움찔 떨릴 정도로 동요했다.

미계수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벽력적가주…… 라고 했소?”

“그렇소. 듣자 하니 나만 당신들을 보고 싶어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다.

가장 만나고 싶었던 자가 바로 적비연이다.

미계수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유일한 사람!

동소유가 벌떡 일어나며 탁자를 한 손으로 짚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손과 발목을 잇고 있는 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당신이 이 사람의 사활침을 해독해줄 수 있나요?”

적비연은 가만히 동소유를 보았다.

조금 놀라웠다.

한 여자의 모습이 이리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

하천웅의 몸으로 지낼 때는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길만 마주했다.

지독한 살기가 어린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간절함을 넘어 애절함을 담고 있다.

존댓말은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사랑이 사람을 이렇게도 바뀌게 만드는 것인가?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순간 동소유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희망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출구라곤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혈을 걷는 기분이었다.

한데 드디어 빛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이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탁!

동소유가 탁자를 짚으며 소리쳤다.

“부탁해요! 이 사람에게 해독침을 놔주세요!”

“…….”

적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동소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바심이 생긴 동소유가 다그쳤다.

“내 말 못 들었어요? 이 사람에게 해독침을 놔달라고요. 할 수 있다면서요?”

“……내가 왜?”

“뭐, 뭐라고요?”

“내가 왜 그래야 하오?”

“그, 그건…… 아! 당신도 우리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건 이유가 있는 거겠죠? 그게 뭐든 이 사람을 살려준다면 당신에게 진 신세를 갚을게요.”

적비연이 다시 뜸을 들이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진심이오?”

“그래요.”

애초에 상대가 누구든 거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비연만은 다르다.

미계수를 살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

그라면 무슨 거래든 못할까?

적비연이 다시 물었다.

“어떤 요구라도?”

“그래요. 어떤 요구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소.”

“좋아요, 뭐죠?”

“그리 서두를 일은 아니오.”

적비연이 다시 뜸을 들이자 동소유는 애간장이 타들어가서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고통으로 힘들어……!”

“내 조건은 세 가지.”

“세 가지……?”

“그렇소. 대신 나도 당신들에게 세 가지를 줄 수 있소.”

“그게 뭐죠?”

“첫째, 당신들을 여기서 풀어줄 수 있소.”

“정말인가요?”

“그렇소. 반 대주는 내게 신세를 졌으니 반드시 내 요구를 들어줄 것이오.”

“대체 어떤 신세를…….”

“내가 거기까지 말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알겠어요. 그럼 또 뭐죠?”

“미 공자가 하 가주에게 진 빚이 있다고 들었소.”

“빚이라니…….”

“십만 냥을 빚졌다고 그러던데. 반 대주에게 들었소만.”

“아…….”

그제야 미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하천웅을 만났을 때 상단의 소단주 역할을 하느라 십만 냥의 몸값을 받아내지 않았던가?

그때 반철룡도 함께 있었으니,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리라.

동소유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럼 마지막은…….”

“미 공자의 사활침을 해독해 드리겠소. 그것도 완전히.”

“완전히라는 것은 한 달마다 해독침을 맞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적비연의 대답에 동소유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좋아요! 그럼 적 대협의 요구 조건은 무엇인가요?”

호칭이 당신에서 대협으로 변했다.

적비연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첫째,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 어느 때든 한 번은 날 도와야 할 거요.”

“좋아요.”

“알겠소.”

미계수와 동소유가 동시에 말했다.

하지만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이해했소. 대협은 내 생명의 은인이니 언제든 날 부르면…….”

순간 적비연이 미계수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당신 혼자 달려오란 뜻이 아니오.”

“하면……?”

“녹림 전체가 움직여야 한단 뜻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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