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세 가지 조건
미계수가 움찔거리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녹림…… 전체가 말이오?”
“그렇소. 어렵소?”
“나, 난 일개 구성원일 뿐이오. 한데 어떻게 내가 녹림 전체를 움직인단 말입니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
미계수가 망설이자 적비연이 말을 덧붙였다.
“거래에 응하지 않겠다면 난 돌아가겠소. 반 대주는 당신들을 련에 보고할 것이고 아마 즉시 처형될 것이오.”
말을 마친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동소유가 다급하게 외쳤다.
“알겠어요! 해요! 한다고요! 하면 되잖아요?”
“그건 그쪽이 답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 동소유가 미계수를 휙 돌아보고는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어떻게든 구슬리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언뜻 우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 행동이 내 눈에는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나?’
-클클. 사랑에 눈이 먼 게지.
‘재미있군. 천하의 악녀도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그게 인간이지.
한참을 고민하던 미계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알겠소. 내가 어떻게든 책임지고 녹림을 움직여 보겠소.”
“그 말을 어찌 믿지?”
“그건…… 대협을 설득할 자신이 없소. 그냥 나로서도 최선을 다해 총채주를 설득해 보겠다는 약속일 뿐이오. 이렇게밖에 할 수 없음을 이해해 준다면 나 역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겠소.”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불길한 생각을 떠올린 동소유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왜 웃죠? 하겠다는데?”
“믿을 수가 없어서.”
“속고만 살았어요?”
“난 속지 않았지만…… 하 가주가 속지 않았소? 그래서 십만 냥이나 털렸지.”
“그, 그건…….”
동소유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녀가 나서서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미계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일은 하 가주에게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내 목숨을 구한 사람까지 속일 생각은 없소.”
“흐음.”
“아, 답답해! 그렇게 못 믿을 거면 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거래는 대협이 먼저 하자고 제안한 것 아니었나요?”
동소유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좋소. 그럼 두 번째를 말하지.”
“뭔가요?”
“앞서와 마찬가지로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 어느 때든 한 번은 날 도와야 할 거요.”
미계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두 번을 협조하란 거요? 아무리 나라도 녹림 전체를 그리 자주 움직이는 건 무리…….”
“아니. 이번 요구는 소저에게 하는 것이오.”
“나요?”
동소유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소저 한 사람에게만 말하는 게 아니오. 수로채 전체가 움직여야만 한다는 뜻이오.”
“그건 정말 불가능해요. 난 이미 수로채를…….”
“나왔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소.”
“그걸 알면서도 그런 조건이라니. 차라리 십만 냥 탕감 조건을 빼고, 이 조건도 빼도록 해요.”
“아니, 무조건 세 가지가 동시에 이뤄져야 하오.”
“아무리 그래도……!”
“수황이 집 나간 자식까지 그리 각별히 신경을 쓴다는 건…… 보기 드문 일이 아니겠소?”
“그야…….”
동소유도 지금은 알고 있었다.
수황이 투왕에게 부탁해서 미계수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적비연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정도로 신경 쓴다면 소저의 말에도 꽤나 무게가 실릴 법하다고 보는데.”
“하지만 대협이 수황을 몰라서 그래요. 그는 내가 아무리 사정해도…….”
“사정해 본 적이 있소?”
“당연하죠! 이 팔이 보이지 않나요?”
동소유가 헐렁한 왼팔을 가리켰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팔 하나를 걸면 수황도 움직인다는 거군.”
“당신……!”
“나머지 팔 하나도 걸면 혹시 아오? 수황을 움직일 수 있을지.”
“……!”
“정 어렵다면 나는 그만 돌아…….”
“알았어요! 약속하죠! 약속하면 그만이잖아요!”
“흐음.”
“못 믿겠단 소리는 하지 마요! 당최 믿게 할 방법도 없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마지막은 뭐죠?”
“하 가주에게 더 이상 원한을 가지지 말고 은원관계를 청산하시오. 나는 그가 필요하니까.”
“불가!”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주먹을 꼭 말아 쥔 동소유가 어찌나 두 눈에 힘을 주고 있는지 충혈된 눈동자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 것만 같았다.
적비연도 이번만큼은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의 문제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는 것이 풀리지 않는다면 어떠한 논리를 들이대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극마가 휘파람을 불고는 말했다.
-대단한 거부반응인데? 이젠 어쩔 거냐?
‘감정은 감정으로 대응해야지.’
적비연이 짤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소유 대신 미계수를 보며 말했다.
“안타깝게 됐소. 그녀는 당신보다 복수를 선택했군. 그럼.”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지 조금의 미련도 없는 태도였다.
미계수는 쓴웃음만 짓고 있었다.
동소유는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정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주었던 기회를 다시 회수해 가려 한다.
잡아야 한다.
잡아야만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기회를 잡는 순간, 오라버니의 복수는 멀어진다.
적비연이 완전히 일어섰다.
몸을 돌리고 철문을 향해 걸어간다.
뚜벅뚜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어 가시처럼 박힌다.
잡아야 하는데…….
그때 오른손을 따뜻하게 감아쥐는 손길을 느낀 동소유가 흠칫거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옆에 앉은 미계수가 자신의 손을 잡고는 지그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 당신은 어째서 날 보고 매번 그렇게 웃기만 하나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다.
마치 미계수가 말하는 것 같다.
‘뭐든 당신 뜻대로 하시오. 나는 상관 말고.’
아, 어쩌면 미계수의 저 미소가 오라버니가 살아 있을 때 자신에게 보여준 미소와 닮은지도.
그래서 그가 이렇게 좋았던 것일까?
그런데 이 사람마저 잃는다면?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건 생지옥이리라.
적비연이 철문을 열었다.
찰나,
절그렁!
“잠깐!”
적비연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하지.”
적비연이 밖으로 나간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찰나, 동소유가 탁자를 짚고는 몸을 훌쩍 날렸다.
“거기 서!”
쉬이이잇!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쇠사슬에는 공진철이 섞여 있었기에 공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몸놀림은 벌처럼 빨랐다.
하지만 적비연은 더 빨랐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발차기를 날렸다.
쾅!
폭음 같은 소리에 이어 동소유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콰당탕!
탁자를 부수며 나뒹군 동소유에게 적비연의 신형이 순식간에 다가갔다.
적비연이 그대로 살기를 뿜어내며 단검으로 내려찍는데,
파밧!
그림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미계수였다.
그가 동소유를 등진 채로 눈을 부릅뜨고는 적비연을 올려다보았다.
“그만하시오. 더 이상 하면 나도 참지 않겠소.”
“참지 않으면?”
적비연이 감정이라곤 들어 있지 않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무슨 사람 얼굴이 이리도 차가운……!’
미계수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동 소저가 흥분해서 실수를 한 거요. 용서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날 죽이시오.”
적비연이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당신도 어지간히 불쌍하군. 저 여자는 당신의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닐 거요.”
미계수의 말에 뒤에 있던 동소유가 움찔 떠는 게 느껴졌다.
미계수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저 동 소저는 두 가지를 모두 이루고 싶은 욕심이 있을 뿐이오.”
“하나 주먹을 쥐고 있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법이지.”
“그야…… 차차 배워 나가지 않겠소?”
“그럴지도. 하지만 그땐 당신이 이 세상에 없을 테지.”
“원래 사람은 잃으며 배워가는 거라고 했소.”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잃고 나서는 차라리 배우지 않는 게 나을지도. 그래야 후회라도 하지 않을 테니.”
적비연이 걸음을 막 떼려는데, 동소유의 입에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게…….”
미계수가 흠칫거리고 돌아보았다.
“소저…….”
“나, 오라버니의 복수…… 포기할게요.”
“소저, 나는…….”
“분하지만…… 원통하지만…… 가가마저 잃을 수는 없어요.”
“소저…… 정말로 할 수 있겠소?”
“당신이 원하는 거잖아요. 내가 복수심을 버리고 앞을 보며 살아가는 것.”
“알고 있었소?”
“그래요. 얼굴에 다 써 있는걸요.”
“헉! 정말? 내 얼굴에? 독심술 같은 걸 익히신 거요?”
미계수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너스레를 떨자 동소유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오늘 가가가 몸을 던져가며 날 살렸잖아요. 이제 나는 가가를 위해 살겠어요.”
“소저…….”
미계수가 동소유의 손을 꼭 잡았다.
동소유가 적비연을 쏘아보았다.
“세 가지 모두 약속할게.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휙!
툭!
미계수와 동소유는 자신들 앞에 떨어진 열쇠를 보고는 다시 적비연을 보았다.
“믿어주지. 가라.”
“이, 이렇게 간단히?”
“항주를 벗어날 때까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고.”
“사, 사활침은…….”
동소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비연이 손을 뿌렸다.
쉬쉬쉬쉬쉭!
찰나지간 날아간 세침이 미계수의 요혈 곳곳에 적당한 깊이로 박혔다.
“커헉! 컥!”
“가가! 이게 무슨 짓이야?”
동소유가 깜짝 놀라서 소리치자,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해독침이다.”
“뭐?”
동소유가 어리둥절해하는데 미계수가 시커먼 피를 한 움쿰 토해내더니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확실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미계수가 동소유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활침이 풀린 것 같소.”
“아아……!”
동소유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 기분이었다.
적비연이 다가와 침을 뽑아내며 말했다.
“일각 주겠다. 그 안에 여길 벗어나도록.”
“당신 말대로 우리가 약속을 어기면 어쩌려고?”
“그땐 은인을 원수로 대했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겠지.”
“그뿐……?”
“더 필요한 게 있나?”
적비연의 말에 동소유는 입을 다물었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어쩔 건가?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들도 무인이라면 내가 오늘 베푼 게 얼마나 큰 것인지 알 테지. 아, 혹시 모르니 이 약조에 암어를 걸도록 하지. 암어는…… ‘흑룡의 은덕’이라고 하지.”
말을 마친 적비연이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복도로 나와서 걷자 극마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병 주고 약 주기군.
‘뭐, 저들은 내가 반철룡이자 하천웅이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
-클클. 그걸 알면 기가 막힐 노릇일 테지. 동소유에게 일격을 날릴 때도 일부러 그런 거냐?
‘뭘?’
-내 눈은 못 속이지. 일부러 미계수가 끼어들 찰나를 만든 것 아니냐?
‘뭐, 그건 그렇지.’
그랬다.
적비연은 동소유를 단검으로 내려찍을 때 일부러 틈을 두었다.
미계수가 분명 몸을 날려 막으려 들 것이기에.
그것이 동소유의 결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지는 모르겠지만, 영향이 없진 않았으리라.
-하여튼 약았다니까. 그나저나 정말 저 녀석들의 말을 믿는 거냐?
‘왜? 뒤통수 칠 것 같아서?’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사람 마음만큼 간사한 게 없으니.
‘뭐, 그래도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어차피 계속 가둬두고 있어봐야 처치 곤란이야. 시체라도 되면 어딘가에 갖다 버리기도 번거롭고.’
-하긴.
‘만약 저들이 약속을 모두 지킨다면 나는 세 가지를 얻는 거고.’
-모두 어긴다면?
‘한 가지를 얻겠지.’
-그 한 가지가 뭐냐?
‘하천웅의 죽음.’
-뭐?
‘사실 하천웅이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거든. 다만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대로 최대한 이용하는 거고. 죽으면 그의 죽음을 또 이용하면 그만이지.’
-그러고 보니 주인이 죽는 건 아니네. 죽어도 애꿎은 하천웅이 죽는 거군. 한마디로 밑져야 본전이구먼.
‘그런 셈이지. 만약 저들이 약조를 전부 지킨다면 뜻밖의 수확인 거고.’
-클클클. 주인은 확실히 약았다니까.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푸념처럼 말했다.
“그나저나 이젠 내 몸에서 독을 빼야 할 차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