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37화 (138/301)

137. 해독

적비연은 반철룡의 집으로 향했다.

자신의 몸에서 독을 빼내기 전에 한 가지 해둬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하천웅에 관련된 것이다.

언제까지 하천웅을 반철룡의 집 지하에 묶어둘 순 없었다.

그나마 집에 비밀스러운 지하가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반철룡이 만든 건 아니다.

애초에 반철룡이 이 집을 살 때부터 지하가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전의 주인이 파놓은 지하이리라.

하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정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 주인이 흑천련의 무인이라면, 이런 비상 대피 장소를 하나쯤은 마련해 둘 만도 하다.

그 때문인지 지하에서는 뒷산으로 이어져 있는 출구도 따로 있었다.

물론 적비연은 그 출구를 자물쇠로 잠가놓았다.

혹여나 천지분간 못 하는 하천웅이 그 길로 달아나려다가 흑천련 무인들에게 걸리면 죽도 밥도 안 되기에.

뚜벅뚜벅.

적비연은 지하 계단을 내려가서는 철창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낡은 쇳소리가 고막을 자극한다.

적비연이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곳에서 잠을 자던 하천웅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적비연이 벽에 걸린 홰에 불을 붙이자 일순 지하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천웅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빛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그가 미간을 구기고는 물었다.

“누구…… 시오?”

어딘지 긴장한 채 경계하는 표정.

그도 그럴 것이 하천웅은 기억을 잃었으니 모든 상황이 낯설 수밖에.

아마도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리라.

적비연은 대답을 하는 대신 한쪽 구석에 쌓인 밥그릇을 보았다.

그래도 여추백이 굶기진 않았던 모양이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여추백은 하천웅을 이곳으로 옮긴 후 틈만 나면 자신에게 질문을 퍼부어댔다.

정말 하천웅이 그 하천웅이 맞냐고.

사람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고.

그럴 수밖에.

지금의 하천웅은 그때의 하천웅이 아니니까.

그래도 방 한쪽 구석에 침상이 있고, 의자도 두 개 놓여 있어서 제법 사람대우는 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침상은 원래 놓여 있던 것이지만, 의자는 여추백이 갖다놓은 듯했다.

“몸은 좀 어떤가?”

대뜸 반말을 하자 하천웅이 움찔거리고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괜, 괜찮소만. 누구신지……?”

“기억을 잃었다더니 정말인 모양이군. 쯧쯧.”

적비연이 더 없이 안타깝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하천웅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어버렸다.

전신이 노곤해질 정도로 따뜻한 눈길이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봐 온 할아버지를 대하는 것만 같다.

적비연이 다시 말했다.

“반 대주에게 자네를 각별히 대하라고 일렀거늘.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군.”

“반, 반 대주님은 절 구해주신 분입니다. 저에게 딱히 잘못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천웅이 얼른 대꾸했다.

사실이었다.

그 미친년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분리시켜 준 사람이 반철룡이 아니던가?

혹여나 이자가 반철룡을 크게 나무랄까 봐 걱정이 됐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한데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나?”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기억을 잃어서…….”

“그 소리는 들었어.”

“예, 죄송합니다.”

하천웅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나, 적비연이다. 벽력가주.”

“벽, 벽력적가주!”

하천웅이 반색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구보다 가장 만나고 싶었던 자가 아니던가?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자신은 벽력적가주를 정말 존경하고 있었다고.

벽력적가주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며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벽력적가주가 눈앞에 있다니!

“위대하고 강하신 벽력적가주님이셨군요!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하천웅이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에 이마를 쿵 찧으며 절을 올렸다.

적비연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그동안 하천웅이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 절은 수만 번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천웅을 만나기 전, 미계수와 동소유를 만났다.

그래도 그들은 사랑을 얻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천웅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모르고 자랐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왠지 그의 인생이 덧없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방금 미계수와 동소유를 만나고 왔다.”

“그, 그자들을……!”

“그들에게 더 이상 은원관계를 따지지 말라고 일렀어. 물론 자네가 놓은 사활침은 내가 풀어주었고.”

“그, 그자들이 그러겠다고 하던가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이상 너에게 원한을 품진 않을 거야.”

“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자네를 풀어줄 생각이야.”

“하면 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이대로는 자네가 나간다고 해도 곧바로 흑천련 무인들에게 잡힐 가능성이 있어. 그래서 자네를 안내해 줄 사람이 있어.”

“그, 그게 누굽니까?”

적비연이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불렀다.

“들어와라.”

“예, 가주님.”

대답과 함께 지하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단휘였다.

“자네를 항주 부둣가로 데려가서 배에 태워줄 사람이네. 해가 뜨기 전에 여길 뜨는 게 좋을 걸세. 오늘은 연회가 열렸던 만큼 경계가 평소보다는 삼엄하지 않을 테니.”

“아아,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제가 은인으로 모실 만한 분이셨군요.”

“자네가 날 얼마나 존경하고 따르는지는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나도 이렇게 돕는 거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천웅이 연신 굽실거렸다.

“자, 이걸 받아.”

“이건……?”

적비연이 건넨 건 검 한 자루였다.

“그래도 흑천련 권역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긴장을 풀 수 없지. 그 검을 들고 나를 공격해 봐.”

“제, 제가 어떻게 감히……!”

“실력을 알아보자는 뜻이야. 사양 말고 공격해라.”

적비연이 자리에 일어나서 바른 자세로 섰다.

검을 들진 않았다.

그는 정말로 하천웅의 무위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궁금했다.

자신이 그의 몸에 머물고 있을 때와 비슷한 수준인지, 아니면 원래 하천웅의 수준으로 돌아와 있는 건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천웅이 검을 잡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기억을 잃었지만 몸이 알고 있는 것일까?

하천웅이 취한 자세는 만검세가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화룡만검법의 기수식이었다.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하천웅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와라.”

“하앗!”

탓!

기합성과 함께 하천웅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쉬이이이잇!

한 줄기 바람이 된 하천웅이 검을 곧게 내질러 왔다.

천검합일인가?

하지만 다음 순간 적비연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만검합일!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적비연이 재빨리 벽력활보를 펼치지 않았더라면 하천웅의 검이 벌써 심장을 뚫었을 것이다.

촤앗!

하천웅의 검신이 그대로 적비연의 앞섶을 찢으며 지나쳤다.

풀럭!

적비연의 경장이 휘날리면서 탄탄한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적비연이 그대로 하천웅의 배후를 노리며 일장을 뻗자,

파밧!

하천웅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게 숙이더니 곧바로 검을 부드럽게 올려쳤다.

반월을 그린 검신이 적비연의 턱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솟구쳤다.

‘이건……!’

-구천단혼전이다!

극마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랬다.

하천웅은 구천혈마검법의 제이초식인 구천단혼전을 펼치고 있었다.

다만 마공을 사용하진 못하는지 정순한 기운만 느껴졌다.

적비연이 성큼 물러나자 이번에는 하천웅이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하더니 그대로 검을 빠르게 내질러 왔다.

슈슈슈슉!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검격이 빨라지더니 이내 굉음을 터뜨렸다.

짜르르릉!

콰콰콰쾅!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검격이 쏟아지면서 지하방이 통째로 흔들렸다.

푸스스스스!

천장에서 흙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하! 이번에는 뇌우비검을?’

뇌우비검 초식은 벽력적가의 비전절기다.

한데 하천웅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한 가지 확실히 깨달았다.

하천웅은 자신이 사용했던 모든 무공을 몸으로 익힌 것이다.

내공도 만만치 않을 걸 보면 그 기운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긴 지난번에 아기의 몸에서 빠져나왔을 때도 그랬다.

자신이 늘려놓은 선천지기 덕분에 아기도 질식사를 피할 수 있지 않았던가?

-클클 이 정도 되면 주인이 진짜 저놈의 은인인데?

부인하지 않는다.

비록 하천웅 몸으로 온갖 짓을 다 했다지만, 이만한 걸 선물했으면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타앗!

하천웅이 이번에는 바닥을 차고는 그대로 튕기듯 적비연에게 날아들었다.

쉬이이이잇!

‘미치겠군. 이번에는 섬전보잖아?’

어딘지 어설프지만 분명 섬전보다.

기억을 잃었다지만 몸에 배여 있는 것이리라.

하천웅은 빛이 되었다.

슈우우욱!

하지만 적비연은 하천웅보다 한 수 위였다.

모든 걸 기억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원래 하천웅이 가진 경험과 내공, 노련함에서 반철룡의 경험과 내공, 노련함이 더해지지 않았나?

적비연은 지금 하천웅이 펼치는 것이 섬전파검이라는 것을 알았다.

검봉에 닿는 것이 무엇이든 깨트려 버린다는 무시무시한 검공!

휘리리릭!

적비연은 팽이처럼 몸을 회전하며 마치 찔러오는 검신을 타고 이동하듯 했다.

파앙!

적비연이 일장을 쳐내자, 허공을 내질렀던 하천웅이 비명을 내지르며 검을 놓치고 말았다.

“앗!”

휘리릭, 푹!

그대로 하늘로 솟구친 검은 천장에 수직으로 꽂혀 버렸다.

적비연이 그대로 다시 왼손을 뻗었다.

쉬이이잇!

수도가 비수처럼 날아든다.

“허업!”

하천웅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숨을 삼켰다.

살기가 없음에도 어찌나 매서운 공격인지 전신의 솜털이 쭈뼛 곤두선다.

탁.

적비연의 손이 아슬아슬한 차이로 멈췄다.

하천웅은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꿀꺽.

“역, 역시 대단하십니다!”

하천웅이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이마를 찧었다.

적비연이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도 내가 가르쳐 준 무공을 잘 쓸 수 있어서 다행이군.”

“역, 역시 대협께서 절 가르쳐 주셨군요?”

“그랬지. 그러지 않았다면 어째서 자네가 벽력가문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겠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적 가주님이야말로 저의 진정한 은인이십니다! 저의 사부님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잖아도 자네가 날 사부로 모시겠다고 한 걸 내가 거절했지. 자네도 어쨌든 한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 수장이 아닌가?”

“그랬군요!”

하천웅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극마가 혀를 내둘렀다.

-이쯤 되면 주인은 직업을 바꿔야겠다.

‘뭐로?’

-글쎄. 사기…… 꾼?

‘그것도 직업이냐?’

-클클. 그나저나 쟤는 순진한 거냐? 멍청한 거냐?

‘둘 다지. 원래 순진하면서도 멍청했으니까.’

-주인은 확실히 약았고.

‘똑똑한 거야.’

-흥! 누구 말대로 자기 포장은 확실히 잘하는구나.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정도면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거다. 무사히 장사로 돌아가서 무림맹에 이곳 사정을 알리도록. 그게 자네에게 주는 임무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반드시 전할 사항은…… 교패가 교패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 교패가 교패가 아니라는 게 무슨…….”

“그리 전하면 총군사는 알아들을 터.”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내가 빌려준 물건은 돌려받도록 하지.”

“무슨……?”

적비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하천웅에게 다가가서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얇은 장갑을 벗겨냈다.

귀수갑이었다.

하천웅은 자신의 손에 귀수갑이 착용되어 있었던 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꺼 다시 가져가는 거니까.”

“아, 네…….”

적비연이 단휘를 보고는 턱짓했다.

단휘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또 다른 통로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제 따라오시오.”

“예? 아, 예! 그럼 적 대협, 부디 존체 보존하시어 대업을 이루시길 빌겠습니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자 다시 한 사람이 지하로 내려왔다.

예홍이었다.

“출발했군요. 잘 도착하겠죠?”

“내 능력을 거의 흡수한 상황이야. 아직은 돼지 목의 진주지만. 익숙해지면 잘 사용하겠지.”

“다행이네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홍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이제 진짜 내 몸에서 독을 제거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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