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38화 (139/301)

138. 해독

구오오오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부좌를 틀고 앉은 적비연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기운이 올라왔다.

아지랑이는 푸른빛을 머금었다가 어느 때는 붉은빛으로, 또 어느 때는 검은빛으로 변하곤 했다.

적비연의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내공의 종류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는 정공이, 또 어느 순간에는 사공, 그리고 마공이 뒤섞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이 언뜻 오색찬란하게 어우러진다.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이 기묘한 현상에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 못했으리라.

지금 예홍이 그랬다.

그녀는 적비연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이 오묘한 기운에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아름답다.

온통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 찬 그녀의 머릿속에도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한 사람이 내뿜는 기운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예홍은 심호흡을 하고는 적비연이 한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적비연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원래 적비연은 두 번 말하는 것도 번거롭게 여긴다.

한데 세 번이나 알려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우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잘 들어. 네가 잘못 놓게 되면 최악의 경우 나는 즉사할 수 있어.”

적비연이 한 말이었다.

만약 옆에서 단휘가 들었다면 대체 어쩌자고 그런 소리를 예홍에게 하냐고 난리쳤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듣자마자 예홍은 울음을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자신은 하지 못할 거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틀렸어. 내가 해낼 리가 없어. 차라리 단휘가 남았어야 해. 난 결국 못할 거야.”

예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적비연의 몸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기운을 도취된 듯 바라보았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다.

‘머리와 등은 가주님이 직접 놓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내가 할 수밖에 없어. 정신 차려, 홍!’

지금이라도 다시 적비연이 해준 말을 되새겨야 한다.

그런데 뭐였더라?

예홍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물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툭. 툭……!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손등 위로 떨어진다.

이 감각.

그래, 언젠가 느껴보았던 이 감각.

순간 예홍은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그때의 기억 속으로 잠겨들었다.

* * *

“뭐 하고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장대처럼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정확히 예홍의 귀를 파고들었다.

툭. 투둑……!

굵은 빗방울이 손등을 때린다.

이제 겨우 열두 살이 된 예홍의 손에는 대못이 들려 있었다.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홍…… 해야 해…….”

눈앞에서 쓰러져 피를 흘리는 장용(張用)이 말했다.

장용은 작년에 이곳 사혈곡으로 끌려온 친구였다.

친구.

바보같이.

여기서는 친구가 없다는 것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건만.

그럼에도 너무 마음이 잘 맞아서 친구를 사귀고 말았다.

장용과 함께 있으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두 사람은 잘 통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 계집년이 빨리 처리하지 못해!”

예홍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다그치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쭈?”

퍼억!

“끄윽!”

예홍이 복부를 쥐고는 헛구역질을 했다.

오장육부가 뒤틀린 채로 입 밖으로 넘어올 것만 같다.

사내가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네년은 말로 해선 잘 안 듣지? 잘 들어라. 이 사혈곡에서는 독하고 악하고 강해야만 살아남는다. 이곳을 벗어나면? 마찬가지다. 세상은 더 큰 사혈곡일 뿐이다!”

말을 마친 그가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한쪽에 도열해서 선 아이들 중 하나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선(善)아!”

예홍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아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이름은 ‘선’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내는 히죽 웃는 것과 동시에 아이의 목을 그어버렸다.

“언니……!”

츄아아아아!

피를 뿜어낸 선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핏물이 빗물과 섞여 혼탁하게 흐려져 갔다.

사내가 한쪽 입매를 치켜 올렸다.

“자, 네년이 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녀석들이 하나씩 죽어간다. 어떤가? 화가 나나? 하지만 그게 세상이다. 이 사혈곡만 그렇다고 착각하지 마라. 네년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 어디도 이와 같다. 죽여라. 네 눈앞에 있는 녀석을! 사혈(死穴)을 찔러라!”

예홍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사내에게 달려들어 살수를 뻗고 싶다.

지금껏 배운 모든 것을 쏟아내 그를 죽여 버리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쏴아아아아.

하늘은 무심하게 비만 퍼부었다.

그렇다.

하늘은 늘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했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사혈곡에 끌려온 그날부터 자신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결을 시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저 악독한 인간들은 자신을 기어이 살려냈다.

그리고 다시 죽이도록 했다.

함께 먹고 자며 지낸 동료를. 친구를. 동생들을!

“할 수 없군. 네년 때문에 이 애들이 죽는 거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말을 뱉어낸 사내가 다시 한 아이의 팔을 끌어당겼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비를 뚫으며 남자의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홍! 날 찔러! 배운 대로 사혈을 찔러!”

장용이었다.

장용의 두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그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홍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사내와 장용이 동시에 소리쳤다.

“어서! 해야만 해!”

“네가 또 한 명을 죽이는 거다!”

“누나아아! 살려줘! 으아앙!”

쏴아아아아아!

빗줄기 소리는 점점 굵어졌다.

어느 순간 떨림이 잦아들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빗속에 잠겨 버린 것처럼 고요하다.

예홍은 천천히 대못을 움켜쥐었다.

빗방울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느릿하게 보인다.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릴 듯 천천히 흐르는 듯하다.

침을 튀기며 고함 지르는 사내, 핏발 선 눈으로 애절하게 외치는 장용, 울부짖으며 간절하게 바라보는 아이.

‘용아. 왜 난 널 죽여만 할까?’

장용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저 한순간의 실수로 비무에서 졌을 뿐이다.

무려 반나절 가까이 이어진 비무였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자, 사혈곡에서는 시간을 제한했다.

제한 시간 내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두 사람을 모두 죽이겠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과 같은 방에서 지내는 아이들 모두 죽이겠노라 했다.

어쩔 수 없이 승부를 봐야 했다.

그리고 제한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쯤 장용은 실수를 했다.

바위 끝에서 발을 헛디뎌 빈틈을 보이고 만 것이다.

패배의 대가는 죽음이다.

만약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들이 몰살당할 수 있다.

이미 선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예홍을 올려다보고 있다.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 사이로 차갑게 쏘아져 오는 선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 서글픔이 뼛속까지 치미도록 생생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장용을 보았다.

장용이 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귀에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에서 이미 그 뜻이 전신으로 박혀든다.

자신을 죽이라는!

그래야만 모두가 살 수 있다고!

쏴아아아아아!

다시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한 순간!

파앗!

예홍의 신형이 날았다.

푹!

마침내 대못이 장용의 사혈을 찔렀다.

“잘…… 했어.”

장용이 입가에 선혈을 흘리며 희미하게 웃는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그의 피를 말끔히 씻어냈다.

장용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예홍의 뺨을 쓰다듬는다.

“끝까지…… 반드시…… 살아남아.”

툭!

장용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예홍의 뇌리를 스쳤다.

마지막 순간, 장용은 정말 발을 헛디딘 것일까?

그런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얼굴을 타고 마구 흘러내린다.

하지만 이미 숨을 거둔 장용은 말이 없다.

그저 평온한 표정이다.

“으아아아아!”

예홍은 절규했다.

우르르릉, 꽈과앙!

천둥번개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비가 그녀를 덮었다.

사내가 히죽 웃고는 아이를 던지듯 부려두었다.

“그러게 진작 할 것이지.”

사내가 자리를 뜨자 아이들이 예홍 곁으로 몰려와 에워쌌다.

아이들이 목청을 놓고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마.

울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너희들이 울수록 세상은 더 집요하게 그 울음을 파고들 거야.

더 독하게, 더 악랄하게, 더 강해져야만 해!

아, 이 말은…… 내가 들은 말이구나.

하지만 그럴 수밖에.

하늘은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니까.

이 세상은 그런 곳이니까.

결국 너희들과 나는 서로 칼을 겨누는 사이가 되고 말 테니까.

분명 그렇다.

이 아이들 중 누군가는 아마 열흘도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칼을 겨누리라.

사혈곡에서는 흔한 일이다.

잠을 자던 중에 옆자리의 아이에게 찔려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사혈곡은 그런 곳이다.

이유는 없다.

그저 명이 떨어지면 누구라도 죽여야만 한다.

가장 친한 자일수록 표적이 되기 쉽다.

장용과 그렇게 은밀하게 마음이 통했음에도 결국 이렇게 되지 않았나?

비정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사혈곡에서,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예홍은 말없이 일어났다.

그녀는 아이들을 보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눈길로 훑어본 후 냉랭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대못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 * *

툭.

손에 쥐고 있던 대침을 떨어뜨린 예홍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상념에 빠졌나?

이런 바보같이!

이 중요한 순간에!

예홍은 얼른 적비연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까지는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알 수 있다.

곧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한 시진만 지나면 해가 뜰 것이다.

침을 놓을 때만큼은 거침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독기를 한곳으로 몰아서 빼내는 일이다.

만약 다음 침을 놓아야 할 적절한 순간을 놓치게 되면 오히려 독기가 전신에 더 퍼질 수 있다.

예홍은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자기 앞에 놓인 침을 더듬어보았다.

침은 낯설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은 비수와 다를 바 없지만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

‘바람만 불면 훅 날아갈 것만 같아.’

어느 정도 묵직해야 안정감을 주기 마련인데 이리도 가볍다니.

특히 세침은 정말이지 실처럼 가늘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이렇게 작고 가느다란 것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니.

“스으읍, 후우우우.”

길게 심호흡을 한 예홍이 적비연의 말을 차근차근 되짚어보았다.

‘일단 임독양맥에 침을 놔야 해. 하지만 침은 독맥부터 놓는 거야. 먼저 선기혈(璇璣穴)과 화개혈(華蓋穴), 그리고 옥당혈(玉堂穴)에 놔야 해. 각각 일촌 반, 칠푼, 일 촌 이 푼의 깊이로 찔러야 하고 도중에 멈춰선 절대 안 돼. 그다음은 임맥으로 넘어가. 후정(後頂)과 전정(前頂)에 각각 일푼의 깊이로, 그다음에는 신주(身柱), 명문(命門)에 이촌, 일 촌 삼 푼의 깊이로. 그리고 기경팔맥에 세침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복기하는 것일 뿐인데도 손바닥에 땀이 맺힌다.

몸서리 쳐질 정도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진다.

정말이지 이 자리를 벗어나 버리고 싶다.

그럼에도 이런 압박이 익숙하기도 하다.

왜 가주님은 하필 이 중요한 것을 자신에게 맡긴 것일까?

한창 복기를 하는데, 적비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차츰 희미해져 간다.

체내로 다시 흡수되는 것처럼 기운이 갈무리되고 있었다.

스르르.

적비연이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붉은빛을 발하다가 다시 푸른빛으로 바뀌었고 이내 모든 빛을 집어삼킬 것처럼 어두워졌다.

마침내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온 적비연이 예홍에게 시선을 돌렸다.

“홍, 준비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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