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39화 (140/301)

139. 해독

“가, 가주님…… 저는 도저히…….”

“할 수 있어. 네가 못하면 난 죽어.”

만약 이 자리에 단휘가 있었다면 비명이라도 질렀으리라.

어쩌자고 그렇게 압박감을 심어주냐고.

그렇잖아도 부정의 화신인 예홍을 자결하게 만들 작정이냐고.

하지만 적비연은 거침이 없었다.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예홍을 보았다.

“내 말 기억하지? 어떤 경우에도…….”

“망설이지 말 것.”

“그래, 그거면 돼.”

적비연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예홍은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쩌자고 그런 미소를 짓는 거죠? 만약 제가 가주님을 죽게 만들면 어쩌시려고……!’

마치 그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적비연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서 내가 죽게 되어도 다행이잖아.”

“그, 그게 무슨……!”

“너는 내 마지막 순간을 안타깝게 지켜봐 줄 테니까. 적어도 내가 적에게 살기를 받으며 죽어가진 않을 테니까.”

“그, 그런…….”

“그리고 너무 걱정 마. 잘못된다고 해도 환생할 테니까.”

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적비연이 반철룡 몸으로 쌓아놓은 탑을 모두 허물어야 하지 않은가?

예홍이 심호흡을 하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시작할게요.”

“그래, 잘 부탁해.”

예홍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을 들었다.

적비연은 말이 없었다.

대신 세상 편안한 눈길로 예홍을 한 차례 응시하고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마치 이제 잠에 들려는 아이 같았다.

타인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저 평온함이 예홍의 마음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다.

마음이 깊숙이 가라앉으니 조금 전까지 격랑이 일어나던 감정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떨림도 멈췄다.

정말 신기하게도 손에 든 침이 목직하게 느껴진다.

이 정도의 무게라면 차분하게 침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침내 예홍이 적비연의 선기혈에 침을 놓았다. 이어서 화개혈과 옥당혈, 그리고 머리 쪽으로 가서 후정혈과 전정혈에 각각 일 푼의 깊이로 세침을 놓는다.

다음에는 신주혈과 명문혈이다.

손놀림에는 거침이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손끝이 이제는 차분하기만 하다.

마치 정해진 검로를 따라 망설임 없이 뻗어나가는 검신 같다.

임독양맥에 놓을 침이 끝난 후, 기경팔맥에 세침을 차례로 놓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과감하게, 어느 때는 조심스럽게.

체감상 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예홍은 모든 침을 놓고 마지막 세 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다시 임독맥으로 돌아와 뇌호혈(腦戶穴)과 영대혈(靈臺穴), 그리고 구미혈(鳩尾穴)에 각각 놔야 한다.

이 세 자리는 통상적으로 침을 놓을 수 없는 혈 자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월성고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세 곳을 차례로 놔야 한다.

만약 여기서 잘못 놓게 되면 적비연은 죽을 수도 있다.

“후우우!”

한 차례 깊은숨을 내쉰 예홍이 마침내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먼저 뇌호혈.

푹!

그리고 영대혈.

쑥!

마지막으로 구미혈.

푹!

“끝…… 이다.”

예홍이 천천히 손을 놨다.

뒤늦게 떨림이 시작됐다.

침은 제대로 놨을까?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걸까?

사람 몸에 이렇게 많은 침을 놔도 되는 걸까?

구오오오오!

적비연의 전신에서 다시 기운이 올라온다.

하지만 아지랑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다.

단지 몸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게 느껴질 뿐이다.

조금 있자니 눈으로도 보이기 시작한다.

적비연의 상체와 얼굴에서 핏줄 같은 것이 불거져 나오면서 피부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보인다.

시커먼 액체 같은 것이 마구 이동한다.

언뜻 보면 징그럽기까지 한 모습이다.

마치 피부 속에 뭔가가 기생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디서 그런 것들이 나오는지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

마침내 적비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피부 속에서 이동한 것들은 적비연의 양 팔꿈치 아래로 모여들어 불룩하게 솟았다.

마치 적비연의 양 손목에 커다란 구슬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홍! 찔러라!”

“하, 하지만……!”

“이제 다 왔어! 어서! 나는 움직이면 안 되니 네가 해야 해.”

예홍이 얼른 피침(披針)을 들었다.

피침은 끝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서 피부를 찢어낼 때 사용하는 것이다.

왜일까?

지금껏 잘했는데.

결정적인 순간 예홍의 마음에 망설임이 생겨났다.

예의 그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 버렸다.

망치면 어쩌지?

잘못되면?

내가 상처를 입혀서 가주님이 죽기라도 하면?

그 순간 적비연이 예홍을 돌아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나는 널 믿는다. 그 말은…… 이 순간 네가 나의 하늘이란 뜻이야.”

“……!”

격랑의 수면으로 떠오르던 마음이 다시 깊숙한 심연으로 쿵 내려앉는다.

누군가의 하늘이라니.

‘내가…… 하늘…….’

언제나 하늘은 원망의 대상이었다.

자신에게 모든 부정을 선물한 재앙의 신일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하늘…….’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하늘인가?

까닭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 와중에 적비연이 씨익 웃는다.

“나는 너로 충분해.”

아, 가라앉았던 마음에 다시 격랑이 일어난다.

격랑이 심연 깊이 파고들어 온다.

하지만 지금의 격랑은 역동의 기운이 되어 손을 움직이게 만든다.

격랑을 타고 거침없이 나아간 손이 적비연의 양 손목을 단숨에 찢어냈다.

촤악! 촤아악!

피가 터져 나오면서 진득한 녹액이 흘러나온다.

고약한 악취가 풍긴다.

치이이익……!

따뜻한 혈액 속에 숨어 있다가 차가운 땅바닥에 떨어지자 독기가 잔뜩 성이라도 난 듯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지른다.

독액이 한참이나 뿜어져 나온 후에야 맑은 피가 흘렀다.

적비연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예홍을 보았다.

“거 봐. 너라면 잘할 줄 알았다니까.”

“가, 가주님……! 침, 침은……?”

“이제 뽑아도 돼.”

“네, 그럼!”

예홍이 얼른 적비연의 몸에 박힌 침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빼낸 후에야 적비연의 양팔에 천을 감으며 지혈을 했다.

탁.

어느 순간 적비연의 손이 예홍의 손등을 잡았다.

예홍이 움찔거리고 바라보자, 적비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넌 항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압박 속에서 언제나 기적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지. 그게 너의 장점이라는 건 잘 알고 있어.”

“…….”

“하지만 때론 지금처럼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받으면서도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면 한다. 물론 쉽게 고쳐지진 않겠지만.”

“가주님…….”

“오늘 너는 분명 어제보다 나은 모습이었어.”

“아…….”

“설사 네게 지옥 같은 과거가 있었더라도, 내가 있는 한 오늘은 다르고, 내일은 또 나아질 거다.”

예홍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상처 난 팔에 천을 감아야 하는데.

어째서 눈물이 자꾸 흐르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오래전 자신을 두고 떠났던 장용의 얼굴은 왜 까닭 없이 떠오르는 걸까?

모든 게 잘됐는데.

이런 낯선 감정이라니.

“감…… 사합니다.”

들릴 듯 말 듯 잔뜩 젖은 목소리.

하지만 꼭 한 번은 전하고 싶었던 한마디.

적비연이 씩 웃으며 예홍의 머리를 헝클듯 쓰다듬었다.

“감사는. 내가 감사할 일이지. 고맙다. 날 살려줘서.”

예홍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누군가를 살리다니.

모든 것이 잘 끝났는데, 천을 감는 손은 왜 이리도 떨리는지.

지금은 무슨 말을 했다간 감정의 격랑이 그대로 토해질 것 같기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렇게 양쪽 팔에 천을 감고 났을 때였다.

“널 전적으로 신뢰하는 또 한 명이 오는구나.”

적비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왔다.

단휘였다.

“가주님, 하천웅을 배에 태워서 보냈습니다! 가주님은 좀…… 어? 뭐야? 너, 우냐?”

단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예홍을 보았다.

예홍이 얼른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무, 무슨 헛소리냐?”

“헛소리가 아닌데? 우는데? 봐봐. 눈가에 물기가 촉촉한데? 뭐야? 뭐야? 왜 그래? 이 오라비한테 말하면…… 우악!”

결국 단휘는 말을 마저 맺지도 못한 채 예홍의 일격을 맞고 날아갔다.

콰당탕탕!

의자를 부수며 한참을 나뒹군 단휘가 코피를 줄줄 흘리며 소리쳤다.

“우씨! 너 내가 만만하지? 엉? 내가 맨날 맞아주니까 진짜 약해 보이지? 어엉?”

“풋……!”

순간 예홍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단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너…….”

“뭐?”

“웃는…… 모습. 처음 봐.”

하지만 예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그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안 웃었거든?”

“웃었는데?”

“아니거든.”

“맞거든.”

예홍이 홱 고개를 돌리고 노려보자 단휘가 반사적으로 손발을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그렇다고 살기를 뿜는 건 아니지!”

“흥!”

예홍이 코웃음을 치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단휘가 옆으로 지나가는 예홍을 슬금슬금 피했다.

‘뭐, 의외로 귀엽잖아? 웃는 모습.’

그가 적비연에게 다가와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체 무슨 사술을 부린 겁니까? 저 벽돌이 울고 웃기까지 하다니.”

“사술은 네가 부렸겠지.”

“그나저나 냄새 한 번 지독하네요.”

“뭐, 웬만한 독은 지독하니까.”

“향긋한 독도 있잖아요.”

“알았다. 다음에는 향긋한 독에 중독 당하마.”

“에이, 그러라고 드린 말씀은 아니고요. 그래도 제법 잘 해냈네요.”

예홍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내심 걱정이 심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녀의 부정적인 성격은 누구보다도 단휘가 잘 알고 있으니까.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보다 믿음직했지.”

* * *

햇살이 창틈으로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해는 중천에 떠올랐지만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은 한껏 풀어헤쳐진 모습이었다.

하늘거리는 속곳 사이로 드러난 부드러운 살결은 백옥처럼 희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모습임에도 누군가 보았다면 아마 그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하리라.

마침 침상 바로 옆으로 그림자가 스르르 나타났다.

“주군.”

“흐응.”

여인은 간드러지는 콧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에 눈동자가 흔들릴 만도 하건만 남자는 시종 목석같았다.

“주군.”

“으음…… 무슨 일이야?”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일어난 여인이 옆에 선 그림자를 보았다.

“그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흐음. 나 야행성인 거 알잖아.”

그녀가 돌아누우려고 하자 남자가 말을 덧붙였다.

“련주님이 다섯 전주님들을 모두 부르셨습니다.”

“으음?”

그제야 여인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바로 월희전주 사예린이었다.

그녀가 대충 옷을 걸치고는 침상 아래로 내려섰다.

“언제?”

“한 시진 내로 준비하셔서 심천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심천원.

련주가 기거하는 곳이다.

흑천궁이 아니라 심천원으로 불렀다는 것은 은밀히 나눌 이야기라는 뜻.

사예린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올 게 온 거네.”

항상 그랬다.

진급 심사가 끝나면 련주는 다섯 전주들에게 비밀 임무를 지시하곤 했다.

어제까지가 일반 무인들의 진급 심사라면, 오늘부터는 다섯 전주들의 능력 심사라고 보면 된다.

그 임무를 얼마나 훌륭하게 완수하느냐에 따라 후계자 선정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리라.

그리고 이번 임무는 특히 사예린에게 의미가 있었다.

‘그 찝찝한 것들을 전부 쓸어낼 기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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