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40화 (141/301)

140. 빈집털이?

적비연은 투혈권왕과 함께 심천원을 찾았다.

투혈권왕의 호법장이 되기로 한 건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런 기회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흑천련 소속이 아닌 강동칠괴의 기억에는 당연히 없고, 흑룡대주인 반철룡의 기억에도 없다.

한데 투혈권왕의 말을 들어 보니 지금껏 흑천련은 진급 심사 후에 항상 이런 절차를 전통처럼 지켜온 듯하다.

문득 강호에서 주기적으로 일어났던 대소사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이 년 전, 강동 지역에 잠입했던 무림맹의 천비대(天飛隊)가 전멸했던 사건, 사 년 전, 무림맹 권역에 나타났던 흑천련 고수 셋을 죽이고 위세를 떨친 광검문(狂劍門)이 하루아침에 멸문한 사건, 그리고 육 년 전과 팔 년 전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전에도 있었다.

적비연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상의 기억을 뒤져보면 여러 사건이 있었다.

정확히 이 년 주기다.

그리고 그 시기가 대략 흑천련의 진급 심사와 얼추 맞아떨어진다.

그랬던가?

만약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흑천련은 매번 이런 식으로 전주들에게 비밀 임무를 내린 것이리라.

만약 투혈권왕의 호법장이 되지 못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심원 정문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흑천궁이 보였다.

적비연은 투혈권왕을 따라서 흑천궁을 휘돌아 심천원으로 걸어갔다.

마침 심천원 계단을 막 올라가려던 자들이 보였다.

“어머? 또 보네.”

옥구슬이 구르듯 낭랑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미끄러지듯 들려온다.

“사저,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 사제는? 아,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아. 기분 좋은 꿈이라도 꿨을 테지? 어제는 사제의 날이었으니까.”

말을 뱉는 사예린의 눈동자가 옆에 선 적비연에게 날아들었다.

심천원에는 전주들이 딱 한 명의 호위를 대동할 수 있었다.

단, 은신은 할 수 없었기에 적비연은 사예린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뭐, 은신을 한다고 해도 그녀라면 알아채겠지만.

투혈권왕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안녕?”

말끝에 붙인 인사는 적비연을 향한 것이었다.

적비연이 무감한 표정으로 포권했다.

“월희전주님을 뵙습니다.”

“오늘 아침에 정식으로 임명을 받은 모양이지?”

“그렇게 됐습니다.”

“좋았겠네. 숙취는 없고?”

“덕분에. 어제 주신 술이 워낙 명주여서 취기가 오래가긴 했으나 다행히 푹 자고 나니 괜찮아졌습니다.”

사예린이 눈웃음을 지었다.

“호호. 그게 명주긴 명주지.”

“그러게 말입니다. 적어도 주기(酒氣)가 한 달은 갈 것 같더군요.”

적비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사예린의 표정이 일순 싸늘하게 굳었다.

‘이자, 월성고독을 알고 있어?’

하지만 어떻게?

월성고가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극소수일 텐데?

그래, 그냥 한 소리이리라.

한 달이라는 말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리라.

그래도 찝찝한 걸 그냥 넘어갈 순 없다.

“맞아. 주기가 오래가는 술이지. 무인이라도 쉽게 주기를 몰아내기 힘들고. 그런데 꽤 멀쩡하네?”

“어지간한 술은 이골이 나서 말이죠. 숙취를 해소할 나름의 방법을 다양하게 알고 있지요.”

적비연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사예린은 자신을 노리는 자다.

알아서 살살 기어서 날아오는 칼날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 뽑은 칼을 거두거나 방향을 틀 사람이 아니다.

벌써 몇 번째 자신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나?

그렇다면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낫다.

어차피 그녀도 흑천련에 소속된 이상 대놓고 권왕계의 호법장을 노릴 수는 없을 테니.

그렇다면 차라리 그녀를 자극해서 실수를 유도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한편 사예린은 머릿속이 살짝 복잡해졌다.

그녀는 확신했다.

‘이자, 독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것도 월성고독을!

이제는 반철룡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까지는 그저 찝찝한 존재였다.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는.

하지만 이제부터는 확실히 제거할 대상으로 바뀌었다.

권왕계라고 해서 무시할 수 없다.

반철룡은 계속해서 자신의 계산 밖에서 움직이지 않았던가?

언제 어느 때든 자신의 발목을 잡으리라.

[이래도 내가 과민 반응하는 것 같아?]

사예린의 전음에 목석처럼 서 있던 월혼이 답했다.

[확실히 무시할 상대는 아니군요.]

[월성고독을 해독했다면 보통은 아니란 말이야. 아무래도 이상하지. 조용하고 평범하던 반 대주가 갑자기…….]

[기회가 되면 제거하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명.]

무시무시한 대화를 나눈 사예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축하해. 즐길 수 있을 때, 충분히 즐겨둬.”

그녀가 계단을 오르자 투혈권왕이 적비연에게 전음을 전했다.

[알고 있겠지만 사저는 무수한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야. 항시 조심하게.]

무수한 가면이라…….

’나만 하려고.

자신이야말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가?

아니, 가면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삶을 살았으니…… 그냥 무수한 얼굴이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갈무리한 채 깍듯하게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올라 심천원으로 들어가니 이미 두 명의 전주들은 도착한 상태였다.

련주의 일 제자 파천신군, 이 제자 월희마녀, 삼 제자 수라혈검, 사 제자 투혈권왕까지.

다섯 번째 제자인 만리혈사(萬里血士)만 보이지 않았다.

정면에는 주렴이 내려져 있었는데, 그 너머로는 흑천련주의 그림자가 보였다.

주렴 앞에는 총군사 요당이 서 있었다.

투혈권왕이 자리를 잡고 서자 요당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 오신 것 같으니 진행하겠습니다.”

그러자 극마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섯 번째 제자는 안중에도 없나 보군. 내놓은 자식인가?

‘흑천련 내에서도 오 공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야. 련내에 머무는 경우보다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더 많은 자니까.’

-그놈은 권력에 관심이 없는 건가?

‘그건 알 수 없지.’

적비연의 생각을 끝으로 요당이 말을 이었다.

“짐작하시는 바와 같이 이번에도 비밀 임무가 있습니다. 하나 이번에는 자원하는 분에 한하여 임무를 내릴 생각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지원자가 있으신지요?”

그러자 사예린이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지원을 하지 않으면 임무에서 배제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비밀 임무인 만큼 그 내용은 공개하지 않는 거고?”

“물론입니다.”

“만약 우리 중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다면?”

이건 꽤 중요한 질문이다.

답에 따라서 이 비밀 임무의 중요도가 결정될 테니까.

만약 아무도 지원하지 않을 때 그냥 임무 자체가 취소된다면?

그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임무다.

즉, 후계자 결정에 그리 큰 영향을 주는 임무가 아니란 뜻.

‘확실히 사예린이 영악하군.’

-그보다 총군사에게마저 반말이라니. 저런 되바라진 년 같으니라고.

하긴 그것도 좀 의외이긴 하다.

하지만 요당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아마 오래전부터 그런 관계로 지내온 듯하다.

어쩌면 요당이 총군사가 되기 전부터 친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뭐, 반철룡의 기억으로 거기까진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사예린은 이 임무가 중요한 것이냐고 대놓고 묻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듯 묻는다.

임무를 위하는 척, 련을 위하는 척!

물론 그런 속내를 총군사인 요당이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 경우에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조직에게 임무를 맡길지, 아니면 임무 자체를 취소할지.”

-흐흐흐. 애매모호한 대답이군.

극마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사예린이 다시 물었다.

“하면 제한 인원은?”

“없습니다.”

장내에 있던 네 명의 전주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임무에 나설 자의 제한 인원이 없다.

그 말인 즉슨 제법 큰 임무가 되리란 뜻이다.

적어도 하나의 문파를 박살 내거나, 무림맹의 주요 지부를 궤멸시키거나. 그도 아니면 강호명숙 중 누군가를 제거하라거나.

이러면 셈이 복잡해진다.

성공했을 때는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꽤나 상승한다.

하지만 실패했을 때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후계자의 지위에서는 영영 멀어질 수도 있다.

또한 성공한다고 해도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쪽의 피해 정도를 따져봐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임무에 성공했으나 잃은 병력이 많다면 권세는 절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

그런데 사예린이 망설임도 없이 불쑥 손을 들었다.

“참여할게. 이번 임무.”

“알겠습니다. 또 안 계십니까?”

파천신군은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그시 내려 감고 있었다.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긴.

그는 지금 포섭한 세력만 잘 관리해도 충분할 테니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

투혈권왕도 나서지 않았다.

굳이 무리한 도전을 하지 않겠다는 건지도.

그런데 사예린에게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보아하니 규모가 작은 작전도 아닐 듯한데, 이왕이면 사제의 도움을 받고 싶네.”

“하면 역시 삼 공자님과 함께…….”

요당의 말을 그녀가 싹둑 잘랐다.

“아니. 권왕전주와 함께하고 싶어.”

순간 투혈권왕은 물론 적비연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요당 역시 의외라는 듯 사예린에게 물었다.

“사 공자님 말씀이십니까?”

“응, 나의 유연함과 사제의 우직함이라면 임무는 더 수월하지 않겠어?”

“일리는 있습니다만…….”

요당의 시선이 투혈권왕에게 향했다.

투혈권왕은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예린이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제, 어때? 이번 임무, 나랑 함께하지 그래?”

“부족한 저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대사형께서도 계시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않아요? 대사형?”

사예린의 말에 파천신군은 냉랭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투혈권왕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저, 죄송하지만…….”

그런데 그의 말이 마저 이어지기도 전에 사예린이 선수를 쳤다.

그녀가 주렴 너머를 휙 돌아보며 말을 건넨 것이다.

“사부님, 아니, 련주님. 저와 사제가 같이 임무에 참여하게 해주세요. 반드시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

투혈권왕이 흠칫거리고는 련주를 보았다.

사예린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주렴 너머의 그림자로 향했다.

잠시의 침묵 끝에 련주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떨어졌다.

“하면 이번 비밀 임무는 월희와 권왕이 맡도록.”

항거를 불응케 하는 목소리.

그간의 대화가 무색해질 만큼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음성이었다.

월희마녀 사예린과 투혈권왕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제자, 련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두 사람.

하지만 고개를 숙인 그들의 표정은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사예린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고, 투혈권왕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이를 묵묵히 지켜보는 파천신군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요당이 활짝 웃었다.

“그럼 정리가 됐군요. 이제 임무를 맡지 않으시는 분들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파천신군과 수라혈검이 주렴 너머로 예를 차려 보이고는 심천원을 빠져나갔다.

이제 심천원에는 여섯 사람만 남았다.

련주와 요당, 사예린과 투혈권왕, 그리고 적비연과 월혼이었다.

요당이 두 전주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선 임무를 말씀드리기 전에…… 무림맹으로 떠난 혈조야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혈조야귀가!

적비연이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어떤 식으로 연락을 해온 것일까?

아마 다양한 방법이 있었으리라.

남몰래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비선(秘線)이 있으리라.

하지만 무림맹에서는 여전히 그를 교패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참고로 이번 임무는 두 가지입니다. 그중 하나는 바로 혈조야귀를 구출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준비한 계획일지라도 언젠간 그의 정체가 들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다른 임무는?”

사예린의 물음에 요당이 빙그레 웃었다.

“혈조야귀가 무림맹에 가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본 련에 상당히 위협이 될 만한 문파가 있는 듯합니다. 그 문파를 궤멸시키는 것입니다.”

“과연 그게 진짜 임무군. 그래서 그게 어디야?”

요당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답이 튀어나왔다.

“장사의 벽력적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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