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빈집털이?
하마터면 ‘엇!’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리 연기의 달인이 되었다지만 벽력적가라는 말을 여기서 들으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반면 극마는 키들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네 집안 아니라고 잘도 떠벌리는구나.’
-이 정도는 헤쳐 나가야 본좌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적비연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요당을 바라보았다.
우선 진정 좀 하고.
벽력적가를 치라니?
무림맹 지부나 지단을 궤멸하는 임무가 내려올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면 무림오절 중 한 명을 제거하라는 임무가 내려오거나.
한데 대뜸 벽력적가라니.
‘생각보다 본가의 명성이 많이 올랐나 보군.’
-클클클, 그리도 사방팔방 자기자랑을 해댔으니 당연한 결과지. 어딜 가든 벽력적가주는 무림 영웅이라고 노래를 불렀잖느냐?
뭐,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줄이야.
이걸로 또 한 가지 깨달았다.
무림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것.
이토록 섬세하고도 예리한 곳에서 살아남아야 하다니.
하긴, 그래서 여러 번 죽은 것인가?
이쯤 되니 아직까지 죽지도 않고 자신을 보좌하는 단휘와 예홍이 대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그래서 그 정점에 벽력적가를 올려둘 것이다.
하지만…….
-당장 닥친 난관부터 헤쳐 나가지 않으면 정점은커녕 바닥에서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고꾸라지게 생겼다고.
극마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이죽거렸다.
요당이 말을 잇기 전에 사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벽력적가를 친다고?”
“그렇습니다.”
“흐응. 별로 들어보지 못한 가문인데.”
괜히 발끈하는 적비연이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럴 수도 있지요. 원래 그리 유능한 가문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경제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이것들이 진짜…….
’유능했거든?
단지 세상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
우리 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명성도 없고, 무능한 데다, 경제력도 없는 가문이라. 그런데 어쩌다가 무림맹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거야?”
사예린의 질문에 적비연은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그러니까 무능하지 않다고!
이젠 돈도 많다고!
속이 바글바글 끓었지만 극마는 연신 낄낄거리며 웃기 바빴다.
요당이 피식 웃었다.
“글쎄요. 혈조야귀의 보고에 의하면 벽력적가의 새 가주가 타고난 무골인 듯합니다.”
“얼마나?”
“확실한 건 없습니다만 무림맹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내가 그 정도였나?
무림맹을 움직일 정도의 수준이라.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지금은 그 정도로 알려졌단 말이지. 흐음.’
사예린이 손가락으로 턱을 받쳐 들며 중얼거렸다.
“흐응. 가주는 몇 살인데?”
“놀랍게도 젊습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사예린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하긴. 타고난 무골이니 어쩌니 했으니 그 정도는 짐작했으리라.
오히려 젊다는 말에 호승심이 일어나는지 미묘한 투기마저 느껴졌다.
하긴. 내가 좀 타고난 천재인 건 맞아.
-그 와중에도 자존감 충만하다니. 역시 주인이다.
‘칭찬이겠지?’
-뭐, 그 정도는 알아서 해석해라, 주인.
사예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뭐,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만날 기회가 생기겠지.”
이미 만났다.
네 눈앞에 있다고.
그런데 요당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째서?”
“보고에 의하면 적 가주는 현재 본 련의 권역에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이야? 이곳 강동 지역에 있단 말이야?”
“네, 그것도 아주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닌다는 말이 있더군요.”
“점점 흥미 돋네.”
“현재 교 선생께서 적 가주의 행적을 추적하고 계십니다.”
사예린은 정말 흥미로운지 얼굴 표정마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요당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벽력적가를 치는 겁니다.”
“한마디로 빈집털이구나.”
“그런 셈이지요. 벽력적가는 현 강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천상원이라는 종합의원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곳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이 막대한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전리품도 쏠쏠하겠어.”
“아마도.”
요당이 씨익 웃었다.
잘들 논다.
이것들이 이제 내 눈앞에서 대놓고 내 재산을 탐하는구나.
기가 찰 노릇이지만 적비연은 내색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표정 관리를 했다.
시간이 흐르니 격동하던 마음도 점점 차분해지고 있었다.
요당이 말을 이었다.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본 련의 권역에 들어와 있는 적 가주도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다 보면 서두를 테고, 서두르면 실수를 하겠지.”
“그렇습니다. 그땐 본 련의 칼이 그의 목을 벨 겁니다.”
나참, 웃기지도 않네.
두 눈 부릅뜨고 찾아봐라. 네놈들은 허상만 좇게 될 것이다.
만약 저들이 그토록 찾으려는 적비연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면 시험해 보던가?
극마가 툭 던진 말에 적비연이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너무 자극만 추구해서 탈이야.’
-쳇! 육신이 없으니 눈요기라도 하고 싶단 말이다. 자극이 필요해.
‘널 위해 날 던질 생각은 없으니 꿈 깨.’
적비연이 쌀쌀하게 반응하고는 요당을 쳐다보았다.
요당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작전 개시는 닷새 후. 두 전주님은 필요한 인력을 이끌고 본 련을 떠나시면 됩니다. 미리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원 제한은 없습니다. 하나,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십시오. 만약 지나친 인력을 움직이다가 발각되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분명한 경고였다.
사예린이 예의 그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알았어. 모처럼 재미있겠네.”
* * *
“예에엑?”
단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소리쳤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다물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권왕전의 호위 집무실에는 적비연과 단휘, 그리고 예홍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단휘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물었다.
“벽력적가를 치러 간다고요?”
“그래. 이번 전주들에게 내려진 임무다.”
“허어! 그럼 다섯 전주가 전부 본가를 치러 간다는 겁니까?”
“아니. 이 공녀와 사 공자만 간다.”
“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지. 이건 정말 큰일 아닙니까? 이제 우린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냐?”
“그야 당연히 지금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본가로 귀환해야죠! 본가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너하고 논의하는 게 아니었어.”
“지금 저 무시한 거죠?”
“그런 건 용케도 눈치채는구나?”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엇, 설마 정말로 본가를 칠 생각은 아니시죠? 혹시 이참에 영영 사파로 신분을 바꾸시려는 겁니까? 정녕 그런 겁니까? 그렇다면 정말 실망입니다! 벽력적가를 강호제일의 가문으로 만들겠다는 가주님의 야망은 그새 어디에 팔아 버리셨습니까? 고작 사 공자의 호법장이 된 걸로 만족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본가를 등지면서요?”
적비연은 침을 튀며 말을 뱉는 단휘를 가만히 보다가 예홍에게 시선을 던졌다.
“홍, 이 녀석 어떻게 생각하냐?”
“머리가 모자란 녀석은 애초에 상대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역시 그렇지?”
“네, 저는 가주님이 본가를 버리셔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게는 가문보다 가주님이 중요합니다. 가주님이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하셨으니, 적가장 따위는 불살라 버려도 아무 문제가…….”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거냐!”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자 예홍이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무릎을 털썩 꿇었다.
“역시 그 뜻이 아니었군요!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
쉭, 팍!
단휘가 으레 당연한 절차라는 듯 예홍의 검을 발로 걷어차고는 말했다.
“어차피 바보는 바보끼리 어울린다고요. 그냥 가주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신분 세탁은 아니신 거죠?”
적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물었다.
“주변 좀 살펴봤어?”
“예, 그렇잖아도 가주님이 주의를 주셔서 각별히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연회 다음 날부터 바로 감시자가 붙더군요.”
적비연은 연회가 끝나자마자 두 사람에게 별도로 주의를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예린이 술잔에 독을 탔다고 말한 순간, 두 사람의 기도가 변한 것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사예린처럼 예민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것 같기에.
아니나 다를까, 단휘에게 감시자가 붙었다니.
확실히 무서운 여자야.
“몇 명이나?”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두 명 정도 붙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용케 눈치챘구나.”
“뭐, 이래 봬도 그간 가주님 덕분에 무공이 좀 늘었으니까요. 게다가 감시자가 있을 거라고 미리 언질을 주셨잖아요? 안 그랬으면 저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예요.”
“홍은?”
“저도 두 명 붙었습니다.”
“흐음. 역시. 이 공녀가 너희를 의심하는 건 분명하군.”
적비연이 중얼거리자 단휘가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섬뜩할 정도네요. 설마 연회 당일에 하천웅을 빼돌린 것까지 들킨 건 아니겠죠?”
“그건 아냐. 그쪽에서도 감시자를 선별하고 계획을 세우려면 최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을 테니까.”
“그래서 서두르셨군요. 하천웅을 돌려보내는 걸.”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하천웅을 조금 여유 있게 돌려보냈다면, 흑천련이 벽력적가를 치려고 한다는 소식도 맹에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감시자가 붙어 있다면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지. 지금으로서는 전서도 보낼 수 없군.’
무림맹에 연락할 방도가 없다.
호법장이 되고 나서 사예린의 감시가 더 치밀해졌다.
예홍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작전을 세울 때, 혈조야귀를 먼저 구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럼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반대로 할 거다. 본가를 먼저 치자고 할 거다.”
단휘가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예? 본가를 먼저요? 반대로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이게 시간을 좀 더 버는 방법이야.”
“가주님. 바보는 못 알아듣겠습니다.”
옆에 선 예홍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닷새 후에 우리가 출발한다. 그때쯤에는 이미 하천웅이 광주에 도착했을 거야.”
“그렇겠죠?”
“그럼 혈조야귀가 교패가 아니라는 소식이 급보로 맹에 전해지게 되겠지. 가장 빠른 수단으로 전달될 테니 우리가 본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알려질 거다.”
“아, 그럼 혈조야귀가 위험해지겠군요.”
“그래, 그럼 우리는 본가로 향하다가 방향을 급히 틀어야 하겠지. 어쨌든 임무 중 하나가 혈조야귀를 구출해야 하는 것이니.”
“그렇군요. 역시 가주님은 천잽니다!”
“너희들이 바보는 아니고?”
“원래 바보 사이에 범인이 끼어 있으면 천재로 보이잖아요.”
“넌 묘하게 사람 까는 재주가 있구나.”
“하하핫! 그런 재주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 저 녀석이 갑자기 보기 싫어졌다.”
“처리하겠습니다, 가주님.”
예홍이 웃음기 쫙 뺀 표정으로 돌아서자, 단휘가 화들짝 놀라서는 물러났다.
“가주님! 얘한테 이러는 건 농담으로 끝나지 않는다고요!”
“그러라고 한 말인데?”
“헉! 무, 무슨 말씀을……! 우악! 야, 멈춰!”
단휘가 곧장 문을 열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 * *
사흘 후 사예린은 작전 회의라는 명목으로 투혈권왕을 월희전으로 불렀다.
월희전 회의실에는 중원의 전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무림맹의 위치와 벽력적가의 위치에 붉은 깃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던 사예린이 투혈권왕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어서 와, 사제.”
“실례하겠습니다.”
투혈권왕이 다가가 커다란 전도 앞에 섰다.
적비연도 그 옆에 섰다.
사예린은 적비연에게 묘한 눈빛을 보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작전 회의를 하기 전에 사제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들이 있어.”
소개시켜 줄 사람?
그런데 왜 날 보면서 말하지?
그랬다.
사예린은 투혈권왕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줄곧 적비연에게 향해 있었다.
찜찜한 기분이 드는 가운데, 사예린이 싱긋 웃으며 밖을 향해 말했다.
“두 사람 들여보내.”
다음 순간 적비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이 미계수와 동소유가 아닌가?
사예린이 적비연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구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