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42화 (143/301)

142. 의심과 의심과 의심

이번만큼은 적비연도 놀란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째서 미계수와 동소유가 여기 있단 말인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저 두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고 사예린 쪽으로 붙은 건가 하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미계수와 동소유는 현재 흑천련의 공적이나 다름없다.

물론 흑천련에서는 이 두 사람이 하천웅을 살렸다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두 사람의 목숨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제 발로 돌아와서 사예린과 손을 잡아?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렇다면 역시…….

-저년이 잡아간 거군.

극마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추측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미계수와 동소유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행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도 않다는 게 한몫했다.

어딘지 지쳐 보이는 표정과 기력이 쇄한 느낌.

만약 이들이 사예린에게 잡힌 거라면 어쩌다가 걸린 걸까?

두 사람의 무공 수준이라면 충분히 항주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만약 사예린이 연회 당일 날마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하천웅마저 걸렸을 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동안 적비연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투혈권왕이 적비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는 자들이오?”

투혈권왕으로서는 두 사람을 처음 보기 때문에 당연히 떠오른 의문이었다.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사예린을 쳐다보았다.

사예린은 어딘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적비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년, 주인이 대답하는 걸 기다리고 있다.

‘알고 있어.’

중요한 순간이다.

만약 여기서 거짓말을 하거나 일부러 왜곡을 하면 오히려 덜미를 잡힐 수도 있다.

과연 사예린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반철룡의 입장에서 무림맹 사절단을 안내하면서 두 사람과 조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예린이라면 아마 그 정도 정보는 파악해 두었을 것이다.

문제는 저 두 사람을 흑룡대가 사로잡은 후 풀어주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느냐다.

사로잡을 때는 두 사람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고, 그 누구도 미계수와 동소유라는 것을 몰랐을 테니 문제가 없다.

풀어줄 때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진행했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는 없다.

사예린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집요하고 무서운 여자니까.

-어쩔 거냐? 일단은 잡아떼야 하지 않겠냐?

‘아니. 그랬다간 더 위험할지도. 일단은 정면승부다.’

결정을 내린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무림맹 사절단을 안내할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인피면구를 쓰고 서호 주변에서 배회하는 것을 체포한 적이 있습니다.”

사예린의 표정이 살짝 떨렸다.

사실 그대로 말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호오, 반응으로 보아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군.

‘역시.’

적비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예린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덫에 걸릴 뻔했다.

만약 얼마 전 체포한 사실을 쏙 빼놓고 얘기했다면, 사예린은 분명 그 사실을 걸고 넘어졌으리라.

사예린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때 왜 이들을 체포한 거야?”

여기서부터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사예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는 만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저 큰 행사를 앞두고 치안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쪽 팔이 없는 것을 보고는 동 소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인피면구를 쓴 게 수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제법 그럴듯하게 여겼는지 투혈권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예린과 적비연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이미 감지하고 있던 터였다.

그랬기에 조금은 기분 나쁜 투로 말했다.

“제 호법장이 대략의 사정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이제 사저께서 설명 좀 해주시지요. 이 두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아,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을 소개하지 않았네.”

사예린이 생글 웃었다.

정말이지 천변만화의 얼굴이다.

언제 날카롭게 따져들었냐는 듯 이제는 천진난만한 표정이다.

그녀가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해. 이쪽은 녹림미공, 그리고 여긴 장강의 거머리.”

“아……!”

그제야 투혈권왕이 대략의 사정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한데 이 두 사람을 왜 사저가……?”

“우연히 만났어. 그런데 두 사람이 무림맹 사절단과 함께 있었던 만큼 이번 임무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부탁을 했지.”

-흥, 새빨간 거짓말이군.

‘그러게.’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만나다니?

저 두 사람이 제 발로 사예린을 찾아간 게 아닌 이상 우연히 만날 수는 없다.

분명 취조실에서 벗어나자마자 사로잡힌 것이리라.

그 말은 사예린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감시해 왔단 말이다.

투혈권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두 분이 도와준다면 임무가 더 수월해지긴 하겠군요. 감사드리오.”

“별말씀을요.”

“흑룡의 은덕이 있었으니 보답을 드리는 게 당연합니다.”

순간 적비연의 눈이 반짝 빛을 뿜었다.

‘흑룡의 은덕’은 저 두 사람과 정한 암어였다.

물론 저들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비연이 저들에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저 말을 하면 동소유는 수로채를 움직이고, 미계수는 녹림을 움직이기로 하지 않았던가?

한데 저들이 먼저 흑룡의 은덕을 운운했다.

그 말은 모종의 신호를 보낸다는 뜻이리라.

‘아직 사예린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았다는 뜻이야!’

하긴.

두 사람이 모든 사실을 토해냈다면 사예린이 이렇게 번거롭게 대화나 하고 있을 이유가 없을 터.

하천웅을 구하고 흑천련의 공적이 된 두 사람을 풀어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죽어 마땅한 잘못을 저지른 셈이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떠본다는 것은 역시…….

-저년이 아직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로군.

‘그래, 적어도 하천웅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분명해.’

적비연이 내심 확신을 다지는 사이 투혈권왕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는 물었다.

“흑룡의 은덕?”

“흑룡대에 체포되었을 때 저희들을 믿고 풀어주신 걸 두고 한 말입니다.”

“아, 그렇군.”

미계수의 말에 투혈권왕이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예린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체포될 당시에는 세 명이었다고 들었는데, 한 명은 누구였어?”

-집요하네.

극마가 몸서리치듯 말했다.

정말 집요한 여자다.

그 한 명이 하천웅일 것이라고는 그녀 역시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꺼림칙한 건 무조건 따지는 거다.

단지 반철룡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이유로.

피곤한 상대다.

한편 미계수는 적비연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왔다.

수백 년의 경험치를 쌓은 적비연은 미계수의 표정에서 대략의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

뭐, 사실 읽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냥 미계수가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무슨 대답을 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됐다.

두 사람과 함께 있었던 정체불명인.

하천웅이라고 대답했다면 두 사람이 이 자리에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역시 두 사람의 동료라고 속였을 것이다.

그럼 수로채 무인이거나 녹림인이라는 뜻인데, 동소유는 수로채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 답은 하나다.

동소유는 미계수를 흘끔거렸고, 미계수는 적비연을 강하게 바라본다.

적비연이 미계수를 보며 말했다.

“녹림미공과 마찬가지로 녹림인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서 여 부대주에게 지시해 일찍 풀어주었습니다.”

적비연의 대답에 사예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군. 하여튼 여자 속은 모르겠다니까.

극마의 말에 적비연도 긴장한 채 바라보았다.

만약 미계수나 동소유의 대답과 다르다면 덫에 걸린 거다.

다행히 걸리진 않은 모양이다.

적비연의 기지가 통했다.

대신 사예린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하면 이 둘은 어떤 혐의점이 있어서 더 붙잡아 둔 거지?”

“그저 인피면구를 쓴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쯤 되자 투혈권왕도 궁금했는지 미계수와 동소유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어째서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소?”

그러자 사예린이 얼른 끼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보다 미계수가 한 발짝 더 빨랐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적비연에게 넘기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랬다간 두 사람의 대답이 서로 엇갈릴 수도 있으니.

적비연으로서는 투혈권왕이 끼어든 게 신의 한 수가 된 셈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만검세가주를 잡기 위해서 변장하고 있었습니다.”

“만검세가주라면 하천웅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가 동 소저의 원수이면서 제게 사활침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미계수가 사활침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차피 그건 숨긴다고 해도 흑룡대원들 몇몇만 조사하면 다 밝혀질 사안이었다.

그래서 굳이 숨기지 않았다.

투혈권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랬군. 하천웅은 본 련의 원수이기도 하지. 같은 적을 두고 있으니 그대들과 본 련은 동지가 될 수밖에 없군.”

“엄밀히 따지면 본 채와 귀련은 맥을 같이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두 사람이 이번 임무를 도와준다니 마음이 든든하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계수와 동소유가 동시에 포권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쨌든 잘 넘어간 듯하다.

그런데 사예린은 그렇게 단순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이 들더라고.”

“재미있는 생각이라니요?”

투혈권왕이 그녀를 돌아보며 묻자, 사예린이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흐응. 내 상상력이 풍부한 걸까?”

“무슨 상상을 말씀하시는지?”

“이 두 사람에게 하천웅은 원수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지. 바로 그 사활침 때문에 말이야.”

“그렇긴 하군요.”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천웅을 살리려고 하지 않겠어?”

“아…….”

“하천웅을 도와서 본 련의 무인들을 쓰러뜨린 자는 두 명.”

사예린의 눈이 미계수와 동소유를 차례로 훑었다.

“마침 여기도 두 명이네? 그리고 이 두 명은 다른 정체불명의 남자와 함께 서호 주변에 나타났지. 만약 그가 인피면구를 쓴 하천웅이었다면?”

“그런……!”

투혈권왕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사예린을 보았다.

그가 미계수와 동소유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사예린에게 물었다.

“사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제, 들어봐. 그럴듯하지 않아? 마침 반 대주는 이 세 사람을 체포했어. 그런데 무림맹 사절단을 안내하면서 하천웅과 사이가 각별해진 거지. 그래서 본 련 몰래 하천웅을 먼저 빼돌린 거야.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뒤늦게 풀어준 거고. 어때? 나의 상상력이? 이만하면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 같은데?”

사예린의 말이 끝나자 실내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 미친년은 진짜 골 때리는 년이다. 보통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인정한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사예린은 논리로 추측하는 게 아니다.

감정을 앞세운 다음 찍어내기 식으로 짜 맞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짜 맞춘 게 상당히 진실에 근접하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순간 적비연은 물론 미계수와 동소유도 너무 놀라서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투혈권왕만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사저…… 이 두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고…….”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것 속 시원하게 말할게. 이 둘, 며칠 전에 흑룡대 뇌옥에서 풀려나는 걸 보고 내가 사로잡은 거야.”

“……!”

-허어, 화끈하게 까발리네.

정말이지 이렇게 다 까발릴 줄은 몰랐다.

어찌 보면 이런 모습이 오히려 사예린답다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생각해? 호법장?”

그녀의 시선이 적비연에게 향했다.

스스스스……!

눈빛만 예리해진 게 아니다.

실제로 살기를 쏟아내고 있다.

피부가 따갑도록 느껴지는 살기다.

쿠웅!

투혈권왕이 한 걸음 거칠게 내디디며 언성을 높였다.

“사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억측으로 제 호법장을 모함하는 것은 결례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은 나도 참을 수 없습니다!”

“호호, 참지 않으면?”

사예린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다.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범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사예린은 이제 당장 출수라도 할 태세다.

언제 끊어질지 모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적비연이 스윽 나서며 투혈권왕을 막아섰다.

적비연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이 공녀께서는 살기를 거두시지요. 저에 대한 모함은 참을 수 있으나, 제가 지켜 드릴 분이 위험해지는 건 두고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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