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43화 (144/301)

143. 의심과 의심과 의심

“모함이라?”

사예린이 한쪽 입매를 치켜 올렸다.

적비연이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게 어째서 모함이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묻는다.

기가 막힌다.

조금 전까지 피부가 따갑도록 살기를 쏘아내던 여자가 이제는 그저 청순가련한 여인 같다.

옆에서 극마가 속없는 소리를 흘려댄다.

-흐흐흐. 미친년이건 말건 예쁘긴 기가 막히게 예쁘다. 미운 정도 정이라는데 잘 해보지 그러냐? 이왕이면 나도 옆에서…….

‘닥쳐라, 관음증 환자야.’

-이런, 쳇!

극마가 고개를 홱 돌렸다.

적비연은 내심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솔직히 말하면 극마가 이렇게 한 번씩 추임새를 넣어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다.

내공을 끌어올려서 섭혼미공을 막았다.

그럼에도 사예린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훔칠 정도로 대단하다.

물론 내공을 끌어올린 만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진 않겠지만, 일순간 방심하면서 가벼운 실수를 할 수는 있다.

이런 자리에서는 그 가벼운 실수 때문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법이다.

그런데 극마가 옆에서 시종 쫑알거리고 있으니 섭혼미공에 넋 놓고 빨려 들어갈 틈이 없다.

조금 마음이 흔들릴까 싶으면 벌써 마음이 홀라당 넘어간 극마가 쫑알거리니 정신이 확 든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더니.’

혀를 빼물고 침을 질질 흘릴 것 같던 극마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휙 돌아보았다.

-방금 그건 본좌 보고 한 말이냐?

‘확실히 넌 네 욕하는 건 잘 알아듣는구나.’

-뭣이? 감히 본좌를 개똥 취급했다는 것이냐!

‘왜? 발정난 개로 격상시켜 줘?’

-이익……!

극마가 눈이 뒤집혀서 팔을 마구 휘저었다.

하지만 극마의 팔은 번번이 적비연의 몸을 통과해 지나갈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사예린이 희미한 웃음을 짓고는 물었다.

“왜 그게 모함인 거지? 나름 그럴듯한 이야기 같은데?”

“공녀께서 말씀하신 부분에는 두 가지 어폐가 있습니다.”

“두 가지나?”

“먼저 공녀님의 말대로라면 저들이 왜 하천웅과 함께 본 련 근처인 서호에서 얼쩡거리겠습니까? 그야말로 호구(虎口)에 머리를 들이미는 격인데.”

투혈권왕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또 하나는?”

“제가 하천웅을 풀어줬다는 이유가 너무 빈약합니다. 고작 안내하면서 정이 붙은 이유라니요? 평생을 본 련에 충성해 온 접니다. 충성의 대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의심이라니, 그저 씁쓸할 따름입니다.”

또박또박 말을 뱉는 적비연을 보면서 사예린이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투혈권왕이 그녀를 보며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듣기에는 호법장의 말이 꽤나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사저는 아직도 호법장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의심하는 겁니까?”

“아니, 이제 의심은 안 해.”

사예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피식 웃었다.

다행이다.

일단은 한 고비 넘긴 셈…….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바뀌었거든.”

뭐야?

-크하하하!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는 여자다! 저 여자, 아주 재미있어! 내 취향이다!

‘시끄럽다. 심각할 땐 알아서 찌그러져 있어라.’

적비연이 까칠하게 대응하고는 사예린을 빤히 노려보았다.

사예린이 허리춤에서 흑월아를 꺼내 들어 부채처럼 펼쳤다.

사라라랑.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흑월아가 예기를 뿜어냈다.

당황한 투혈권왕이 눈썹을 일그러뜨리고는 소리쳤다.

“사저! 너무하십니다! 이번 심사 결과에 앙심을 품고 이러신다면……!”

쒸이잉!

순간 흑월아가 허공을 가르면서 투혈권왕의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뚜까앙!

찰나지간 한 줄기 빛이 뻗어 나오면서 흑월아를 쳐냈다.

쉬리리리릿, 착!

허공을 한 바퀴 회전한 흑월아가 사예린의 손으로 돌아가 잡혔다.

흑월아를 쳐낸 사람은 다름 아닌 적비연이었다.

적비연이 한기가 풀풀 휘날리는 눈빛으로 사예린을 노려보았다.

“도가 지나치십니다.”

“지금 나를 가르치는 거니?”

사예린의 눈이 곱게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적비연은 그 눈길을 담담히 받아내며 대꾸했다.

“제가 섬기는 분 앞에서 선을 넘는다면 누구라도 가르쳐야지요.”

“사제, 어때?”

“뭐가 말입니까?”

투혈권왕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도 이제 인내가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제가 어찌 압니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지 않은 거야. 그런데 저 호법장이 내 눈에 거슬린 후부터는 모든 게 자연스럽지 않아.”

“억지는 그만…….”

“목숨이 위태롭던 자가 갑자기 기적처럼 살아났어. 그러더니 무공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 게다가 괴독자의 월성고독마저 해독했네?”

“괴독자의 월성고독이라니! 설마 연회에서 정말로 독을 탄 겁니까?”

“맞아. 그런데 걱정 마. 사제의 훌륭한 호법장은 이미 해독을 한 모양이니까.”

투혈권왕이 놀란 표정으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월성고독을 어떻게…….”

“일전에 강동칠괴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중 육괴에게서 해독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적비연이 대충 둘러댔다.

진짜 아무렇게나 둘러댄 것이다.

강동칠괴 중 그나마 육괴가 그쪽으로 조금 박식한 편이었다.

‘월성고독까지 들먹이다니.’

일단은 강동칠괴라면 검증이 불가능하니 최악은 피할 수 있으리라.

어차피 사예린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여자가 아닌가?

사예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봐. 모든 게 자연스럽지가 않아. 강동칠괴가 월성고독을 해독할 방법을 안다니? 금시초문이라고. 그래서 나는 사제의 호법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제 호법장을 모함하는 것은 도가 지나친…….”

“지금도 봐. 내 흑월아를 일검에 쳐냈어. 물론, 진급 심사 때 보여준 무위라면 이 정도는 막아내겠지. 하지만 원래 반 대주는 이 정도 수준이 아니었단 말이야. 혹시 인피면구를 쓴 게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정말 보통 여자가 아니다.

질린다. 질려.

적비연이 내심 고개를 젓자 극마가 중얼거렸다.

-저런 여자는 차라리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게 낫다.

‘그럴지도.’

모처럼 극마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논리로 설득될 상대가 아니라면 아예 반대로 나가 버리는 것이다.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시죠. 이 공녀께서는 제가 권왕전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자존심을 세우는 것 아닙니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신다고요? 그렇다면 제 추측이 제일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요?”

투혈권왕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비연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천하의 월희전주님이 겨우 저 때문에 질투를 느낀다면 세상이 비웃을 겁니다.”

만약 이 자리에 제삼자가 있었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만고절색의 미녀를 앞에 두고 자신한테 질투하지 말라는 말을 해대다니.

사예린도 이런 식으로 대응할 줄은 생각지 못한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역시 재미있네, 너. 과묵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제법 나불거리는구나.”

“말을 할 땐 해야지요. 누구처럼 감정에 휘둘려 근거도 없이 애꿎은 사람 잡지 않으려면 충분한 대화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아니, 나는 세 치 혀보다는 내 감을 더 믿어. 특히 오감을 뛰어넘는 육감! 내 육감이 널 자꾸만 처리하라고 안달이거든!”

촤라라라랑!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섯 자루의 흑월아가 허공을 가르면서 적비연을 향해 쇄도했다.

이번에는 명백한 살의가 느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으면 죽거나 회복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는다!

느닷없는 공격에 극마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구천혼선결(九天混旋訣)을 펼쳐라!

구천혼선결.

구천혈마검의 제삼초식이다.

벽력적가의 선풍뇌검이나 만검세가의 선풍만엽과 비슷한 초식이다.

하지만 그 두 무공이 주로 회전하면서 찌르기 위주라면, 구천혼선결은 베기가 주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구천혈마검을 대성한 수준에 이르면 주변의 공기만으로도 적을 베어버릴 수 있는 엄청난 상승 무공이었다.

물론 초절정 사 단에 이른 적비연은 구천혼선결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펼쳤다간 마공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 일이 복잡해진다.

‘안 쓰겠어.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해?’

대신 적비연은 서호검법 중 평호추월을 펼치면서 날아드는 흑월아를 쳐냈다.

따다다아앙!

세 자루의 흑월아가 평호추월 수평선에 걸리면서 가상의 호수 아래로 잠겨들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자루는 아슬아슬하게 검로를 비껴가면서 그대로 적비연의 심장과 목을 향해 파고들었다.

-제길, 또 죽겠군! 이번엔 내가 육신에 머물 시간도 없이 즉사다!

적비연 역시 죽음을 예상했다.

물론, 흑월아가 그대로 자신의 목과 가슴을 가를 경우라면.

하지만 흑월아가 적비연의 몸에 닿기 직전,

콰콰아앙!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자루의 흑월아가 속절없이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흑월아 두 자루가 그대로 벽을 부수고는 밖으로 날아갔다.

적비연이 힐끔 돌아보니 투혈권왕이 두 주먹을 뻗었다가 거두고 있었다.

그의 주먹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아무리 뛰어난 권사라지만 상대는 사예린이었다.

흑월아를 맨주먹으로 다급히 쳐냈으니 상처가 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설마 이걸 노린 거냐?

‘그래, 투혈권왕은 겨우 얻은 날 이렇게 어이없게 잃고 싶지 않을 테니까.’

아마 그의 입장에서는 사예린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권왕계의 세를 축소시키려는 의도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만큼 투혈권왕이라도 확실히 자신을 믿게 해야 했다.

그래서 딱 진급 심사에서 보여준 정도의 무위로만 대응한 것이다.

그 결과 이렇게 투혈권왕이 나선 것이고.

“사저, 더 이상 절 욕보인다면 참지 않겠습니다.”

사예린이 세상 천진한 표정으로 투혈권왕을 보았다.

“사제, 나는 널 욕보인 적 없는데?”

“호법장은 제 수하입니다. 근거 없이 호법장을 모함하는 것은 절 무능하게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아아, 눈물겹네. 수하를 사랑하는 주인이라니.”

“그만 비꼬시지요.”

쾅!

투혈권왕이 두 주먹을 부딪치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취이이이……!

곧 투혈권왕의 전신에서 시커먼 기운이 증기처럼 피어올랐다.

곧이어 그의 주먹이 새카맣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흑천투권공(黑天鬪拳功)!

흑천련주의 네 번째 제자이자 권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해준 그의 무공이다.

흑천투권공은 시전자의 몸을 마치 금강불괴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내력이 집중된 두 주먹만큼은 그 어느 부위보다도 단단해지는데, 대성에 이르면 소림의 금강불괴마저 부술 수 있을 정도의 괴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확실히 흑천투권공을 펼친 것만으로도 투혈권왕의 기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탓인지 천장에서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졌다.

차아앙!

월혼이었다.

그가 사예린 앞에서 검을 뽑아 들자, 신호라도 된 것인지 검은 유령들이 주변으로 마구 떨어져 내렸다.

슈슈슈슈슉!

차차차앙!

시퍼런 예기가 투혈권왕과 적비연을 에워쌌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콰콰콰자앙!

순간 벽면이 완전히 부서져 나가더니 한 무리의 무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데 사예린 쪽 사람들이 아니다.

무리 중 제일 앞장선 사람은 바로 투혈권왕의 좌호법인 엽강호.

그리고 그 곁에는 쌍검을 들고 족제비처럼 찢어진 눈을 좌우로 굴리는 한사가 있었다.

월희전 회의실에서 문제가 생기자 안마당에 대기하고 있던 투혈권왕의 수신호위들이 일제히 벽을 부수며 들어온 것이다.

월희전이 갑자기 아수라장이 된 셈.

투혈권왕이 사예린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남의 집 벽을 통째로 부수고 들어온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저거 꽤 비싸.”

“지금이라도 오해를 풀고 사과하신다면 벽은 수리해 드리지요.”

“많이 컸네. 우리 사제.”

사예린이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폐부가 얼어붙을 정도로 오싹한 한기가 스며 있었다.

투혈권왕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원하신다면 보여 드리지요.”

“그럼 어디 한번 볼까?”

두 사람이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오!

과연 초절정 중단에 이른 자들답게 엄청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적비연도 의심받지 않을 만큼 기운을 끌어올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 순간,

“그만들 하시지요.”

격랑의 기운을 뚫고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

일시에 긴장을 풀어버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월희전 외문을 통해서 걸어오는 자는 다름 아닌 교패였다.

“두 분, 여기서 더 하시면 련주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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