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정면 돌파
교패의 등장으로 장내의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노려보며 당장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두 사람은 마치 얌전한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기를 갈무리했다.
제아무리 련주의 제자들이라지만 교패는 흑천사왕 중 한 사람.
그에게마저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사예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제는 참 운도 좋아.”
“언젠간 사과는 받겠습니다.”
투혈권왕이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했다.
자박자박 걸어온 교패가 적비연에게 잠깐 시선을 던지고는 사예린을 돌아보았다.
“작전회의치고는 요란하군요.”
“제 성격 알잖아요. 워낙 의견 대립이 팽팽하다 보니. 호호호.”
사예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정말이지 해맑기만 한 그 모습에 투혈권왕의 수신위들마저 일순 긴장을 풀어버렸다.
하지만 교패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떠들썩하게 진행했다간 소문이 밖으로 새겠습니다.”
“교 선생께서 직접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시니 새겨들을게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총군사와 상의하고 오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작전에 변경 사항이 생겼습니다.”
“작전변경이라고요?”
“예, 본래 두 가지 임무를 하나로 줄일까 합니다.”
적비연은 물론 사예린과 투혈권왕도 흠칫거리고는 교패를 돌아보았다.
사예린이 물었다.
“무슨 말이죠?”
“지금쯤이면 혈조야귀가 무림맹에서 대략의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비선을 통해 그에게 탈출 명령을 내릴 생각입니다.”
“하면 혈조야귀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그렇습니다.”
교패의 말에 사예린이 생글 웃으며 투혈권왕을 돌아보았다.
“잘됐네. 어깨가 가벼워졌어.”
“하면 곧바로 벽력적가를 궤멸시키면 되겠군요.”
투혈권왕이 예의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적비연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혈조야귀의 신변 변화를 이용해서 이동 도중에 계획을 변경하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한데 이러면 혈조야귀를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된다.
벽력적가로 향하는 이동 속도도 더 빨라질 것이다.
까딱하다간 정말로 이들과 함께 장사까지 가야 할 판이다.
‘제길, 이 상황을 어떻게 막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흑천련에 잠입한 이후로 이렇게까지 출구가 보이지 않은 적이 없다.
뭐, 그럴 수밖에.
지금까지는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죽었다가 다른 몸으로 환생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문이 사라질 판이다.
-뭘 그리 골머리 앓고 그러냐? 자고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느니라. 주인아.
‘내 가문이 멸문당하는 꼴을 보면서 즐기란 말이냐? 그 전에 널 소멸시키는 즐거움부터 느껴볼까?’
-흥, 까칠하긴.
극마가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참,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하나?
본가가 멸문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그걸 피하지 말고 즐기…… 가만!
적비연이 흠칫거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교패가 말을 이어갔다.
“오늘 연락하면 이틀 후에는 혈조야귀에게 명령이 전달될 겁니다. 두 분이 본 련을 나서는 날과 같지요. 탈출한 혈조야귀는 두 분을 만나서 도울 겁니다.”
투혈권왕이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그가 우리를 돕는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예린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하면 혈조야귀를 어디서 만나면 되죠?”
“혈조야귀가 탈출한다고 해도 추격자들이 본 련의 권역까지 추격하진 못할 겁니다. 해서 강서성의 의풍현(宜丰县)에서 조우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애초에 혈조야귀가 탈출하면 의풍현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지요.”
확실히 천하사대지자에 속한 교패이기 때문인가?
지지부진한 계획이 그가 끼어들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긴, 뭐 지금까지는 작전은커녕 적비연을 의심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적비연으로서는 점점 더 곤란해지는 상황이었다.
의풍현은 강서성에 위치해 있지만 벽력적가가 있는 장사부가 바로 옆이다.
사예린과 투혈권왕, 거기에 혈조야귀까지 힘을 합한다면 벽력적가가 위험할 수밖에 없으리라.
더군다나 벽력적가는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테니.
그때 투혈권왕이 침음을 흘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혈조야귀가 의풍현으로 오게 되면 그를 쫓는 무림맹 무인들이 장사부에 집결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벽력적가를 칠 때 오히려 번거로워질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제법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호오, 저 녀석도 머리는 굴러가는 놈이었구나. 겉보기에는 그저 맹추 같은데.
‘맹추 같아도 권왕이라는 별호로 알 수 있듯이 무공 한 자락 하는 자다. 무시할 순 없지.’
적비연이 대꾸하는 사이 교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
“가장 간단한 건 시간을 끄는 방법이군요. 닭 쫓던 개도 며칠째 지붕만 쳐다보진 않을 테니까요.”
“그렇지요. 장사부까지 추격해 온 자들은 길어야 칠주야 이상 머물진 않을 겁니다.”
“하면 우리가 칠주야 후에 벽력적가를 치면 되겠군요?”
투혈권왕의 말에 교패가 침음을 흘리다가 답했다.
“글쎄요. 그렇다고 해도 혈조야귀를 놓친 무림맹은 각 접경지의 경계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지요.”
“그럼 혈조야귀가 장사부를 지나지 않고 다른 길을 통해 의풍현으로 오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방법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너무 길을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한을 뚫고 오기에는 위험요소가 크지요.”
무한을 중심으로 호북성에는 수많은 문파들이 군림하고 있다.
당장 무당파와 제갈세가, 창천문만 해도 큰 부담이다.
그러니 차라리 장사부를 지나오는 걸 택할 수밖에.
거기에 장사의 벽력적가주와 만검세가주가 모두 부재중이니 의풍현까지 탈출 경로로 보자면 딱이다.
다만 추격자들이 장사부에 머물러 있을 경우, 벽력적가주를 궤멸시키는 데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
적비연은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우습게도 이번 역시 극마의 조언이 도움 됐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그래, 피하려고만 하니까 답이 안 보였던 거다.
차라리 정면으로 간다.
적비연이 세 사람을 보며 슬며시 나섰다.
“주제넘게 한 말씀 올려도 괜찮을 지요?”
교패와 사예린, 투혈권왕이 적비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맙게도 투혈권왕이 먼저 허락했다.
“말하게.”
“어차피 무림맹은 본 련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만검세가주 하천웅이 본 련에 잠입을 시도하다가 이 공녀님께 발각되어 행방불명 상태지요. 이제 무림맹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니 본 련도 공식 사절단이라 칭하고 장사의 벽력적가로 향하는 겁니다.”
“호오, 계속해 보게.”
투혈권왕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재촉했다.
적비연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혈조야귀는 교 선생과 외모가 똑같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한 책임 추궁을 위해서 탈출한 교 선생이 사절단 대표로 다시 장사의 벽력적가를 찾아간다고 공표하는 겁니다. 물론 이 공녀님과 사 공자님은 신분을 숨긴 채로 동행하는 겁니다.”
“제법 그럴싸하군. 하지만 무림맹에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나? 무림맹도 아닌 벽력적가에서 접견을 하려는 의도에 대해서.”
교패가 물었다.
이미 예상한 질문이기에 적비연이 차분히 대답했다.
“벽력적가가 이상하다면 우선 만검세가라고 해도 좋지요. 만검세가주에게는 확실히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 무림맹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다.
게다가 지금처럼 민감한 시국이라면 아무리 사절단이라도 적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기는 꺼려할 것이다.
특히 무림맹 본단에 사로잡혀 있던 교패가 다시 본단까지 사절단으로 간다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할 터.
투혈권왕이 파안대소했다.
“하하하하! 정말 좋은 생각이군. 두 분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교패와 사예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 사예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놀랍군. 저년이 저렇게 인정할 줄이야.
‘그러니까 무서운 여자지.’
교패도 말을 이었다.
“확실히 사절단 역할을 하면서 벽력적가와 만검세가를 살필 수 있으니 좋은 방법이군.”
적비연이 기세를 몰아 말을 덧붙였다.
“제가 만검세가주를 안내할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는 벽력적가주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쪽에서 벽력적가를 치면 만검세가는 반드시 개입하게 될 겁니다. 그런 만큼 사절단으로 위장하여 두 가문을 염탐하고, 돌아오는 척하면서 되돌아가 두 가문을 동시에 치는 겁니다.”
“얼마 전 무림맹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돌려주자는 이야기군.”
“그렇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요.”
적비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교패가 그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전주를 돌아보았다.
“제 생각에는 꽤 좋은 방안 같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투혈권왕의 반응은 물어보나 마나였다.
그는 자신의 수하가 한 건 했다는 것에 대해 어깨가 으쓱했다.
“아주 훌륭한 방안인 것 같습니다. 이대로 진행하면 이쪽의 안전도 보장되니 더 없이 좋아 보입니다. 사저는 어떻습니까?”
“흐응. 나쁘진 않네. 괜찮아.”
사예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그녀를 의식한 투혈권왕이 입매를 씨익 치켜 올렸다.
교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혈조야귀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요.”
“확실히 교 선생께서 나서주시니 일 처리가 빠릅니다. 감사드립니다.”
투혈권왕이 포권하자, 교패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별말씀을.”
“하면, 저도 이만 물러가 출전 준비를 하겠습니다. 의풍현에 갈 때까지는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니 날랜 자들로 추려봐야겠군요.”
말을 마친 투혈권왕이 간단히 예를 차린 다음 수하들을 이끌고 물러갔다.
적비연을 비롯한 수신호위들 모두 물러가자 북적북적하던 월희전이 썰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곧 월혼을 비롯한 호위들이 미계수와 동소유를 데리고 물러가자, 사예린이 교패를 돌아보았다.
“어땠어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교패의 대답에 사예린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많이 기울었네요. 어제까지만 해도 ‘아닐 겁니다’라고 대답하셨는데.”
“그렇군요.”
교패가 부정하지 않았다.
의미 모를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교패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성급하셨습니다. 의심이 들수록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셔야 합니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으니까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지금껏 내 육감이 빗나간 적은 거의 없어요.”
“거의 라는 말은 빗나간 적이 있긴 하단 뜻이군요.”
“그렇죠. 딱 한 번.”
“그게 언제인지?”
“비밀이에요.”
“후후후.”
교패가 나직이 웃자, 사예린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보단 교 선생이야말로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어떤……?”
“아끼던 자였잖아요.”
사예린의 말에 교패의 시선이 적비연이 사라졌던 외문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죠. 저도, 제가 아꼈던 자도.”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겠어요.”
“불허한다고 해서 따르지도 않을 분이면서.”
사예린이 깔깔거리며 웃다가 대답했다.
“맞아요.”
“단, 한 가지는 약속하시지요.”
“알아요. 앞으로 열흘간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좋습니다. 열흘 후에도 짐작하신 결과라면 그땐 공녀님 뜻대로 하시지요.”
교패의 대답에 사예린이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었다.
정말이지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물론 그 웃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섬뜩하기 그지없었지만.
“좋아요. 장담컨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