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45화 (146/301)

145. 산 너머 태산

또로로롱.

찻잔을 채우는 맑은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손수 차를 따른 가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다.

“드시지요.”

“고맙소.”

무뚝뚝하게 말을 건넨 교패, 아니, 교패로 위장한 혈조야귀가 찻잔을 들어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라오는 차향을 잠시 음미하고는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용정차구려.”

“그렇습니다. 혹 고향을 그리워하실까 싶어 준비해 보았습니다.”

용정차는 항주 서호의 특산품이다.

중원에서 발효하지 않은 차는 흔치 않기에 혈조야귀는 향만 맡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혈조야귀가 입매를 비틀고는 답했다.

“항주가 내 고향은 아니오.”

“그러셨군요. 하나 몸을 담고 계셨던 곳이니 고향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세심한 배려에 감사하오.”

혈조야귀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두었다.

가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떠신지요?”

“뭐가 말이오?”

“혹 지내시는데 불편함은 없으신지요?”

혈조야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생각보다 예우를 해줘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비꼬는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무림맹은 그를 뇌옥이 아닌 별채에 머물게 하면서 감시했다.

마치 자신들은 인격부터 다르다는 듯이 혈조야귀에게 정성을 다했다.

죄인을 가둔 것이 아니라 사절단을 대우하는 느낌이랄까?

‘뭐, 나로서는 훨씬 편하긴 하지만.’

덕분에 짧은 기간에 무림맹의 정보를 빼돌릴 수 있었다.

별채를 둘러서 감시자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는 반드시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혈조야귀는 평생을 교패의 오른팔로 살아왔다.

그만큼 교패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교패 스스로 사부가 되길 꺼려하기에 제자가 되진 못했지만, 혈조야귀는 그를 이미 사부로 여기고 있었다.

어쨌거나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교패에게 모든 걸 배우다 보니, 어딘지 느슨한 무림맹의 감시 체제는 그에게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밤마다 빈틈이 생기면 별채를 벗어나 무림맹 본단을 휘젓고 다녔다.

한때 교패의 호신위로 지낸 적도 있었던 만큼 은신술 역시 자신이 있는 그였다.

하긴 그런 재주가 있으니 교패가 자신을 첩자로 보낸 것이지만.

가후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흑천련 본단이 그리도 아름답다지요?”

“부정하진 않겠소.”

혈조야귀가 다소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는 정말이지 교패처럼 행동했다.

표정과 몸짓, 말투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긴 흑천련 무인들이 봐도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생을 가까이에 두고 모신 교패가 아니던가?

한데 이젠 외모까지 교패와 똑같이 바꾸었으니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고 해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리라.

가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꼭 한 번쯤은 서호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가보신 적이 없소?”

“애석하게도 기회가 닿지 않았지요.”

“언젠간 군사를 모시겠소.”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땐 현지에서 이 용정차를 마시게 되겠군요.”

“서호십경 중 유랑문앵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그곳 다실에서 마시는 용정차가 일품이오. 버들가지 사이로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도 제법 흥겹소.”

“듣기만 해도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군요. 반드시 가보겠습니다.”

“그러시오.”

“반면 본 맹은 좀 삭막하지요? 인근에 온천이 있다는 것을 빼면 사실 서안은 볼거리가 약하긴 합니다.”

겸손의 말만은 아니었다.

바다가 있고 강이 흐르며 아름다운 호숫가 있는 항주와 비할 곳이 안 된다.

오죽하면 고관대작들이 은퇴하면 항주에 머물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리를 할까?

반면 서안은 물이 귀한 땅이다.

척박하다.

어떤 의미로 보면 흑천련의 본단이 있는 항주와 정반대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정파 무인들이 말한다.

어째서 서안에 무림맹 본단을 지었느냐고.

이왕이면 무림맹 본단을 좀 더 북적거리는 무한이나 장사에 지었어야 했다고.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무림맹 본단은 애초에 일부러 이런 척박한 땅에 자리 잡은 것이다.

흑천련을 뿌리 뽑지 못한 대가를 두고두고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가후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해서 본 맹도 터를 옮길까 생각 중입니다.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언중유골(言中有骨)이다.

그 말 속에 숨은 뼈를 그대로 드러내자면, ‘너희 흑천련의 씨를 말리면 항주는 우리의 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혈조야귀도 그 속내를 눈치챘다.

그래서 웃으며 답했다.

“오랫동안 정붙인 터를 옮긴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반드시 그 계획이 이루어지시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그때도 교 선생께서 저와 함께 차를 마셔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오.”

두 사람이 동상이몽의 찻잔을 들었다.

그때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혈조야귀가 시종을 힐끔 보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종은 혈조야귀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왔다.

이따금씩 혈조야귀의 방을 정리하러 들어오는 시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평범한 시종이 아니었다.

그렇다.

지금 혈조야귀가 입을 옷을 들고 온 시종은 바로 흑천련이 심어놓은 비선!

그가 침상에 옷을 가지런히 올려두고는 돌아섰다.

혈조야귀는 알 수 있었다.

비선이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오늘쯤이면 련에서 어떤 지령이 내려올 거라고 여겼다.

특별한 정보를 수집하라거나, 그도 아니면 슬슬 몸을 빼내라거나.

시종이 막 방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자네.”

가후가 시종을 불렀다.

“저 말씀이신지요?”

“그래. 이리 와보게.”

시종이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잰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나리.”

“저 옷을 가져와보겠나?”

순간 시종이 당황했다.

그는 스스로 알았을까?

아주 잠깐 혈조야귀의 눈치를 살폈다는 것을.

‘멍청한……!’

그의 태도에 내심 화가 치민 혈조야귀였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시종이 곧 침상으로 돌아가 옷을 가지고 왔다.

“흐음.”

가후는 옷을 펼쳐 들고는 이리저리 매만졌다.

“본 맹의 귀한 손님일세. 비록 본 맹과 뜻이 다른 곳에서 오셨다고는 하나,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란 말이지. 재질이 형편없군. 좀 더 좋은 옷감을 사용했어야 하는 건데.”

‘개소리 작작해라. 네놈이 그걸 핑계로 지금 옷감을 매만지며 수색하는 걸 모를 줄 아느냐?’

혈조야귀는 내심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한 마음도 들었다.

옷깃이나 소매 어딘가를 이단으로 접어 바느질한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련에서 보낸 서신이 아주 작게 접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가후가 그걸 눈치챘다간 지령이 발각되는 건 물론, 자신이 교패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들통나고 말리라.

‘확실히 맹탕은 아닌 모양인데…….’

혈조야귀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괜찮소. 몸에 걸치는 옷가지가 거기서 거기 아니겠소? 이만해도 충분히 기대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소.”

“그리 생각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내일부터는 교 선생께서 입으실 옷을 따로 신경 써서 준비해 드리지요.”

“그리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야 마음이 놓이신다면 뜻대로 하시오.”

혈조야귀의 말을 들은 가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종에게 옷을 돌려주었다.

“가져가거라.”

“예, 나리.”

시종이 옷을 들고는 침상으로 향하는데,

“아니, 가지고 돌아가란 말이다.”

“예?”

“그 형편없는 옷을 교 선생께 드려서야 되겠느냐? 가지고 돌아가라.”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시종이 연신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섰다.

시종이 방을 빠져나가자 가후도 찻잔을 마저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다를 떨다 보니 밤이 늦었군요. 오늘은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살펴가시오.”

“하하. 그래 봐야 본단의 크기가 귀련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텐데 살펴갈 것까지 있겠습니까? 그럼 모쪼록 편안한 밤 되시길.”

“고맙소. 덕분에 즐거웠소.”

가후가 빙그레 웃고는 방을 나갔다.

혈조야귀는 가후의 기척이 완전히 느껴지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탁자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한쪽 입매를 치켜 올린 모습은 시종 무뚝뚝했던 표정과 완전히 달랐다.

어딘지 비열하고 표독스러운 모습.

그것이 혈조야귀의 본성에 더 가까웠다.

그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때가 됐군.”

그는 비선이 보낸 신호를 확실히 읽었다.

다행히 비선은 새 옷감에 지령을 숨겨오지 않았다.

비선은 수신호를 보냈다.

자연스럽게 손을 편 상태에서 옷감을 중지와 약지만 접어서 잡았다.

그리고 왼손을 오른손 아래쪽에 받쳐 들었다.

퇴각신호!

“후후. 정 들자 이별이라니.”

왠지 벌써 돌아가기가 아쉬울 정도로 빠른 지령이다.

하지만 련에서 내려온 지령이다.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혈조야귀가 창밖에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 이곳을 탈출한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사예린과 투혈권왕은 최정예 무인들을 추려서 흑천련의 의풍지단으로 향했다.

모든 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는 만큼 그들은 은밀하면서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린 그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의풍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의풍현 외곽의 산속에는 흑천련 의풍지단에서 은밀하게 준비한 목조 건물이 있었다.

이번 임무를 위해 의풍지단에서 급조한 건물이었음에도 꽤나 설비가 잘 갖춰져 있었다.

사예린과 투혈권왕은 우선 그곳에 머물면서 혈조야귀가 도착하길 기다리기로 했다.

투혈권왕이 머무는 별채 옆 작은 방에 배정받은 적비연은 제일 먼저 단휘와 예홍을 불렀다.

“너희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일이 생기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좀 끌어줘라.”

“예? 그럼 가주님은 어딜 가시려고요?”

“미계수와 동소유가 사로잡혀 있으니 그들에게 가야겠다.”

“지금요?”

“지금이 딱이야. 먼 길을 이동해 와서 피곤할 때지. 경계도 허술할 테고. 다들 지쳐 있을 때 그 두 사람에게 가봐야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열흘.”

“열흘이라뇨……?”

“사예린은 아마 그날로부터 열흘을 지켜보기로 했을 거야.”

단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미계수가 하천웅에게 사활침을 맞았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하지만 정확히 언제 맞았는지는 모르는 눈치였어. 그야 나만 아는 사실이니 당연하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사예린은 넉넉잡아 열흘 정도로 계산했을 거야.”

“아! 그럼 미계수가 그때까지 죽지 않는다면…….”

“그래, 미계수의 사활침이 풀렸다는 걸 눈치채겠지. 그럼 그 여자 성격상 제일 먼저 날 의심할 터.”

그러자 예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과연. 그래서 지금 미계수를 죽여 버릴 생각이시군요.”

적비연이 땀을 삐질 흘렸다.

“그건 아니고. 두 사람을 풀어줄 거야. 일종의 증거 인멸.”

“아…….”

이번에는 단휘가 물었다.

“그런다고 사예린이 의심을 거두진 않을 텐데요. 오히려 더 의심할지도…….”

“의심은 계속될지언정 증거는 없어지니까. 그래서 일단은 녹림이 나선 것처럼 위장해서 그들을 풀어줄 생각이다.”

말을 마친 적비연이 복면을 뒤집어썼다.

그가 창문을 열고 나서기 전에 단휘와 예홍을 돌아보았다.

“그럼 뒷일을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너무 늦진 마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적비연이 화살처럼 몸을 던졌다.

건너편 목조 건물 지붕으로 올라선 적비연은 운귀의 경신술을 펼치면서 빠르게 이동했다.

확실히 이제 막 도착한 탓에 주변의 경계는 허술했다.

아마 이곳이 흑천련 권역이라는 이유도 있으리라.

그렇게 다섯 번째 건물 지붕 위에 안착했을 때였다.

‘저기군.’

적비연이 심호흡을 하고는 맞은편 건물을 가만히 응시했다.

미계수와 동소유가 갇힌 곳.

그런데…….

‘음? 누구지?’

어둑한 건물 지붕 위에 낯선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닌가?

하필 구름이 달을 가려서 그림자의 정체를 알기가 어려웠다.

순간 녹림에서 미계수를 구하기 위해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녹림은 아직 미계수의 위치도 모르고 있을 터.

그렇다면 사예린이 지레짐작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것인가?

때마침 구름이 물러가면서 달빛이 서서히 드러났다.

다음 순간 적비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어, 어째서 저자가 여기에……!’

한편 달빛을 받으며 선 그림자는 적비연을 보고는 히죽 입매를 치켜 올렸다.

허연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늘어진 백발의 광인!

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적비연을 향해 말했다.

“천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