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47화 (148/301)

147. 태산을 넘으려면

낭패다.

까딱하다간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정체를 들킬 수도 있다.

그럼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말리라.

투혈권왕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사저는 반 호법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단 말씀입니까?”

“응. 알 것 같은데?”

대답하는 사예린의 시선은 여전히 적비연에게 머물러 있었다.

적비연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끝이군.

극마가 비관적인 투로 중얼거렸다.

투혈권왕이 물었다.

“그가 어디에…….”

그때였다.

“끄아아악!”

모여든 무인들 한쪽에서 느닷없이 비명이 차올랐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뭐, 뭐야?”

“헉! 저, 저자가 언제……?”

산채의 무인들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주춤 물러났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백발광인이 서 있었는데, 양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통이 들려 있었다.

“크하하하하! 천벌! 천벌이다!”

“크으읏!”

순간 무인들이 저마다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적비연도 내공이 격동하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운기를 해서 몸을 보호했다.

대응이 늦은 몇몇 이들은 아예 피를 토하면서 실신해 버렸다.

투혈권왕은 물론 사예린도 이번만큼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반면 적비연은…….

‘저 광인이 이렇게 반갑기는 또 처음이네.’

덕분에 만인의 시선이 광인에게 향했다.

뿐만 아니라 사예린도 적비연에 대해 잊은 듯 흔들리는 눈으로 광인을 보고 있었다.

투혈권왕이 흑천투권공을 펼치고서는 소리쳤다.

“다들 정신 차려라! 놈은 초인의 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의 외침에 무인들이 저마다 내공을 끌어올리면서 잔뜩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맨손으로 무인의 머리를 통째로 뽑아 든 사내.

정말이지 인간의 괴력이 아니다.

느껴지는 기도만 봐도 격차가 너무 크다.

어른과 아이의 수준.

아니, 어쩌면 그 비교로도 부족할 지도 모르겠다.

아이 여럿이 죽음을 불사하고 어른에게 달려든다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 광인을 상대로는 그런 일말의 가능성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기겠다는 생각보다는 절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천하의 사예린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 저런 괴물이 여기에……!’

문제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점이다.

그러니 시간을 끌 방법도 없다.

하지만 적비연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된 셈이었다.

백발광인의 등장으로 모든 무인들의 시선이 저쪽으로 옮겨졌다.

‘저 광인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네.’

적비연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사예린도 이젠 적비연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바로 앞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먹이가 달아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랴.

“쳐!”

순간 사예린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동시에 산채의 무인들이 일시에 검기를 뿌리며 백발광인에게 달려들었다.

“이이익!”

“이여업!”

“죽어랏!”

살벌한 기합성이 연신 터져 나오면서 살기를 머금은 검기가 사방에서 덮쳐갔다.

하지만 백발광인의 신위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그가 번쩍번쩍 움직일 때마다 비명이 솟구치고 피가 튀었다.

변변한 무기도 없는 백발광인은 맨손으로 적과 맞서 싸웠는데, 밀리기는커녕 일방적인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퍽! 콰직! 퍼엉!

“크악!”

“으아악!”

뼈마디가 갈라지고, 살이 찢어지고, 몸이 터져 나가는 소리에 비명이 마구 어우러진다.

그래도 월희계와 권왕계에서 무공 한 가닥 한다는 고수들로 추린 인원이다.

한데 이렇게 맥없이 당하다니!

“제길! 이노오옴!”

아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잔뜩 분개한 수라당주 진천규가 일갈을 터뜨리며 날아갔다.

쒸에에에엥!

시퍼런 도기가 일어나면서 그의 칼날이 백발광인의 정수리를 쪼갤 듯 떨어졌다.

기습이 먹혀든 것일까?

진천규의 입매가 히죽 올라갔다.

‘놈! 걸렸다!’

그런데 도기가 정수리에 닿기 직전,

탁!

“……!”

백발광인은 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른손을 들어 올려 칼날을 낚아챘다.

심지어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은 맨손으로!

진천규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 어떻게……?”

놀랍게도 진천규는 도를 내려치는 자세로 허공에 떠 있었다.

슈우우욱!

순간 백발광인이 오른손을 끌어당기면서 왼손을 빠르게 내질러 왔다.

“헉!”

“수라당주! 칼을 버려!”

사예린이 얼른 소리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천규가 얼른 손을 놓으려는데,

“이런……!”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도파에 끈적끈적한 아교를 발라놓기라도 한 것처럼 손이 떨어지질 않는다.

백발광인이 흡기공 같은 것을 익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제기랄!’

뒤늦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재앙이 찾아들었다.

푸콰아악!

“크아악!”

진천규의 왼쪽 심장을 관통한 백발광인의 왼손!

진천규는 입을 쩍 벌린 채 피 섞인 침을 줄줄 흘렸다.

푸콰악!

심장을 파고들어 갔던 백발광인의 왼손이 다시 돌아왔다.

진천규가 눈알을 내려깔고는 백발광인의 왼손을 보았다.

의식이 가물가물하는 사이, 그는 상대의 손에 들린 자신의 심장을 보았다.

몸 밖으로 뽑혀져 나와서도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이 찾아든 건 그 직후였다.

털썩!

심장이 뽑힌 진천규는 마치 쓰레기처럼 내던져졌다.

“크크크크.”

백발광인의 왼손에는 주인 잃은 심장이 여전히 세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순간 백발광인이 힘을 주자,

퍼억!

심장이 피를 튀기며 터져 나갔다.

백발광인이 손에 묻은 피를 혀로 핥고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천벌! 천벌!”

“크읏!”

“우우……! 저 괴물……!”

산채의 무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수라당주가 단 일수에 죽어버리다니!

사예린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그녀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은 아니다.

분노 때문이다.

그녀가 꽉 눌린 감정을 힘겹게 잇새로 흘려냈다.

“감히…… 미친놈 주제에…… 수라당주를……!”

파앗!

찰나지간 사예린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솨라라라랑!

그녀의 손에서 다섯 자루의 흑월아가 춤을 추듯 떠나갔다.

쉬쉬쉬쉬쉭!

각각 다섯 방향에서 흑월아가 시간차를 두고 날아든다.

“크하하하하!”

백발광인이 여전히 광소를 터뜨리더니 눈앞에서 팟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무인 하나의 팔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뽑아 버렸다.

부욱!

“크아아악!”

무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자, 백발광인이 뽑아낸 팔로 날아드는 흑월아 한 자루를 쳐냈다.

퍼억!

흑월아와 휘두른 팔이 부딪치면서 섬뜩한 파육음을 터뜨렸다.

쉬이이잇!

뒤이어 배후에서 날아드는 흑월아를 또다시 팔을 휘둘러 쳐냈다.

퍼억!

이번에도 팔이 흑월아와 부딪치면서 팔꿈치 아래쪽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다른 무인의 팔을 뽑아 들고 마치 무기처럼 마음대로 휘두르는 광경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했다.

퍽! 퍼퍽!

백발광인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치듯이 그렇게 모든 흑월아를 팔로 막아냈다.

곧이어 그가 팟 사라지더니 사예린 코앞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예린의 동공이 커졌다.

“큭.”

“흐흐. 천벌.”

백발광인이 히죽 웃더니 흑월아가 박힌 팔을 내려쳤다.

쉬에에엑!

찰나,

꽈아아앙!

포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백발광인이 움찔거리고는 한 걸음 밀려났다.

그가 미간을 슬쩍 구기고는 돌아보자 투혈권왕이 쌍권을 내지르고 있었다.

취이이이이.

시커먼 주먹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방해하다니. 네놈도 천벌이다!”

“크읏!”

백발광인의 사자후에 투혈권왕이 비척거리며 물러났다.

정말이지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강렬한 음공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시커먼 검기가 떨어지더니 백발광인이 든 팔이 싹둑 잘려 나갔다.

동시에 사예린이 얼른 손을 뻗어 팔에 박혀 있던 흑월아를 회수했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그림자는 바로 월혼이었다.

백발광인이 잘려 나간 팔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아무렇게나 휙 던졌다.

그가 무감한 표정으로 투혈권왕과 사예린, 월혼을 차례로 훑었다.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찰나의 방심이 죽음을 부를 터.

다음 순간,

팟!

파바밧!

네 사람이 동시에 바닥을 차며 번개처럼 날았다.

* * *

적비연은 사예린과 백발광인이 충돌하자마자 곧바로 몸을 빼내고는 미계수와 동소유를 데리고 숲속을 내달렸다.

백발광인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 직전까지 모두의 이목이 적비연에게 집중되었음에도 지금은 누구 하나 그를 찾는 자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난데없이 나타난 미친 인간이 초인의 신위를 보이며 살겁을 일으키고 있으니, 적비연이 뭘 하든 안중에도 없으리라.

산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도착한 적비연이 미계수와 동소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위대하신 적 가주님의 명으로 두 분을 구해 드리는 거요. 이젠 절대 잡히지 마시오.”

“고맙소. 그런데 우린 점혈을 당한 상태라…….”

미계수가 말을 마저 맺기도 전에 적비연이 얼른 혈을 짚더니 곧 휴대한 세침을 꺼내 침을 놓았다.

푹. 푸푸푸푹!

거침없이 침을 놓고 나자 거짓말처럼 점혈이 풀렸다.

미계수와 동소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이건 어떻게……?”

“위대하신 적 가주님께 배웠소.”

“아니, 그게 배운다고 이렇게 간단히…….”

“시간이 없소! 위대하신 적 가주님의 성의를 수포로 돌릴 생각이오? 난 빨리 돌아가 봐야 하오!”

“아, 알겠소. 고맙소.”

“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죠.”

동소유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은혜는 내가 베푼 게 아니오.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위대하신 적 가주님 덕분이죠.”

“그렇소. 그럼.”

“반 대협도 조심하십시오!”

미계수와 동소유가 포권을 해 보이고는 얼른 몸을 날렸다.

점혈이 풀린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산채에서 멀어져 갔다.

적비연은 다시 몸을 돌려 산채로 달려갔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산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게 정말 단 한 사람이 저지른 짓이 맞나 싶다.

최정예로 이루어진 무인들이다.

한데 벌써 삼 할이 죽거나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투혈권왕과 사예린이 모처럼 힘을 합해서 맞서고 있지만 버티는 것조차 급급해 보인다.

마침 단휘가 적비연 옆으로 내려섰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단휘가 가져온 것은 호법장으로 있을 때 입었던 옷이다.

애초에 단휘는 적비연의 움직임만 주시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옷을 들고 올 수 있었던 것.

얼른 옷을 갈아입은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위험한 상황인데.”

“차라리 여기서 우리만이라도 몸을 빼내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 제대로 흑천련에 대해 알아보려면 투혈권왕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니까. 가자!”

“으으, 싫은데.”

하지만 적비연은 이미 산채 복판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마침 백발광인이 투혈권왕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쉬이이이잇!

바람처럼 달려간 적비연이 그대로 검을 올려쳤다.

따아아아앙!

주먹과 검신이 부딪쳤는데 종소리처럼 맑은 금속성이 울린다.

서호검법 남병만종 초식!

백발광인의 몸이 공명하면서 주춤하는 순간 적비연이 버럭 소리쳤다.

“수신위! 대라귀혼진(大羅鬼魂陳)을 펼쳐라!”

“존명!”

순간 투혈권왕의 수신위들이 일제히 대답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진열을 갖췄다.

투혈권왕이 흔들리는 눈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반 호법장……?”

적비연이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답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