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태산을 넘으려면
투혈권왕의 표정이 상기됐다.
사예린이 제기한 의문 같은 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당장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호법장이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죽음의 전장에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자.
저 앞에서 살기를 풀풀 휘날리는 초인을 두고 온몸을 던져 막아선 자.
저런 자를 어찌 의심하겠나?
설사 사예린의 눈 밖에 났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만큼은 목숨을 던지는 충신이 아닌가?
적비연이 투혈권왕에게 일렀다.
“위험하니 물러나 계십시오, 주군.”
말에도 무게가 있는 법이다.
지금 적비연이 내뱉은 말은 묘한 무게가 있었다.
분명 무공도 자신이 더 강할진대 이상하게 그의 말대로 물러나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한 자도 있었다.
“물러나라고? 가소로운……!”
사예린이다.
그녀가 싸늘하게 웃어 보이고는 흑월아를 양손에 펼쳐들 었다.
“지금껏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호위 행세를 하면 어물쩍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나?”
“미계수와 동소유가 복면인의 도움을 받아 달아나는 것을 보고 추격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걸 믿으란 말이지?”
“믿고 말고는 공녀님 마음이지요. 다만, 지금은 그 문제를 따질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적비연의 시선은 여전히 백발광인에게 향해 있었다.
백발광인.
적비연은 이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귀문회를 통해서 입수한 정보 덕이다.
냉혼신검 설규.
이미 십여 년 전에 무림맹주와도 자웅을 겨룰 정도로 강했던 초고수.
비록 광인이 되었다지만 그가 지닌 무위는 여전히 초인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뚝!
냉혼신검의 주먹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다.
적어도 그가 도검불침지체(刀劍不侵之體)는 아니란 뜻이다.
한편 사예린은 적비연이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을 보고는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건방진…….”
하지만 적비연은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 잘못 움직이면 목이 날아갈 판이다.
사예린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말도 통하지 않는 괴물이다.
사예린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사예린이 허튼짓이라도 한다면 투혈권왕이 알아서 막아주겠지.
뭐, 이런 상황에서 사예린도 괜한 생각을 하진 않겠지만.
생각을 정리한 적비연이 나직이 읊조리듯 말했다.
“좌귀(左鬼), 우귀(右鬼) 삼 장 이내로 접근.”
사사삭!
대라귀혼진에서 좌귀를 맡은 엽강호와 우귀를 맡은 한사가 두말 않고 삼 장 이내로 접근한다.
보법은 은밀하면서도 신속하다.
“후귀(後鬼), 사 장 이내로 좁힌다.”
스스슥!
이번엔 후귀를 맡은 여추백이 움직인다.
하지만 호명된 자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대라귀혼진은 구성원이 유기적으로 엮여서 움직인다.
마치 적을 가둬둔 그물망 같다.
진을 형성하는 무인들 하나하나가 적비연의 말을 천명(天命)처럼 받든다.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선도로 목숨을 구하는 경험은 많을 필요도 없다.
단 한 번.
그 경험을 겪고 나면 다음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생기는 법.
한데 여기서 적비연에게는 또 다른 능력까지 있다.
숱한 경험을 기억하면서 절로 생긴 이능(異能).
공천지권위!
그의 목소리, 눈빛, 손짓, 말투 모든 것이 천명이 되어 운명 공동체에게 전해진다.
호위단이 조직된 후 적비연은 진법 위주로 훈련을 시켰기에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펼칠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
거기에는 적비연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뒷받침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적비연을 비롯한 수신위들이 체계를 갖추고 대응하자 우왕좌왕하던 무인들도 겨우 숨을 고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순간 방심하면 죽는다. 사망자가 생기면 측귀(側鬼)가 자리를 메운다.”
꿀꺽.
수신위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삼켰다.
호위단주인 적비연이 방심하면 죽는다고 했으니, 절대로 방심할 수 없다.
그의 말은 절대적이니까.
괜한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이를 지켜본 투혈권왕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우선 안정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앞에서 살기를 뿜어대는 괴물이 두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초절정 중단에 이른 자신조차도 공포가 느껴질 정도였다.
한데 지금은 미약한 떨림이 완전히 사라졌다.
적비연을 믿고 있다.
그저 호위무사일 뿐인데.
수신위의 역할이 원래 이렇게 큰 것이었나?
수신위라는 건 그저 자신이 필살의 무공을 펼치기 전까지 목숨을 던져가며 시간을 벌어주던 존재들이 아니었나?
아니다.
이들을 어찌 그런 소모품으로 쓸 수 있을까?
이 든든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지 않은가?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낯설다는 것이다.
분명 자신의 호위단인데 어디 용병이라도 부른 기분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상명하복이 분명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단순히 상명하복을 떠나 이들은 적비연에게 무한신뢰를 던지고 있다.
진급 심사 때 겪은 그 위기 극복이 적비연을 무조건 믿게 만든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진급 심사 때도 광인들을 상대했으니 더욱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이들을 보고 결성된 지 보름도 되지 않은 호위단이라 생각할까?
하지만 내내 대견하게 생각하는 투혈권왕과 달리, 사예린은 내심 짜증이 일어났다.
“꼴값 떨지 말고 물러나지 그래? 너희들이 상대할 수 있는…….”
하지만 그녀의 말은 이어진 적비연의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셋 세면 내가 먼저 친다. 좌귀, 우귀 준비!”
차차착!
수신위들이 일제히 내공을 끌어올리면서 기수식을 취한다.
사예린의 미간이 곱게 찡그려진다.
“너희들 지금 내 말이…….”
“셋, 둘, 하나! 간다!”
타앗!
적비연이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바닥을 차며 달려갔다.
파밧!
쒸이이익!
한 줄기 빛이 호선을 그리면서 백발광인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린다.
“가소롭구나!”
백발광인이 벼락같은 고함을 내지르면서 마주쳐 왔다.
따아앙!
손바닥과 검신이 부딪쳤음에도 금속성이 울린다.
“크읏!”
적비연이 신음을 삼키면서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흐아아압!”
“하앗!”
좌귀 엽강호가 대부를 내려찍으며 달려든다.
우귀 한사도 쌍검을 교차하며 날아든다.
“흥!”
팍!
백발광인이 코웃음을 치고는 발끝으로 바닥을 툭 찍어 차면서 물러난다.
일격필살의 기세로 달려들던 엽강호와 한사는 그대로 허공을 베며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수축했던 대라귀혼진이 일순 늘어나면서 여유를 둔다.
하지만 수신위들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에 연결이라도 된 것처럼 다시 수축한다.
적비연과 후귀를 맡은 여추백이 동시에 앞뒤로 치고 들어간 것이다.
파바밧!
쉬에에엑!
적비연은 그대로 백발광인에게 접근해 검을 횡으로 그으며 수평선을 그었다.
평호추월!
하지만 이번에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없다.
퍼퍼펑!
대신 백발광인의 장력이 연이어 폭발하면서 적비연의 몸이 팽이처럼 휘리릭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 여추백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내린다.
“이여어업!”
쾅!
여추백보다 백발광인의 발차기가 더 빨랐다.
정말이지 그 자세에서 어떻게 후방으로 발을 내지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커억!”
콰당탕탕!
튕겨나간 여추백이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비척거리면서 일어난 그가 울컥 피를 토한다.
후귀가 쓰러지자 그 옆에 있던 예홍이 대번 자리를 채웠다.
찢어져 나갈 뻔한 그물이 다시 형성된 셈이다.
동시에 좌귀와 우귀, 측귀들이 일시에 쇄도한다.
대라귀혼진은 위기가 곧 기회가 된다.
그물이 찢어지려는 순간, 오히려 더욱 움츠러들면서 상대의 행동반경을 옭아맨다!
샤아아아악!
팔방에서 쏟아지는 검기를 백발광인이 호신강기를 펼쳐 막아냈다.
후우우웅!
타타타탕!
마치 철판에 콩이 볶이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피에 굶주린 귀신들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날 때, 전귀(前鬼)를 맡은 적비연이 바닥을 차고 튕기듯 날았다.
“하아앗!”
기합성과 함께 시커먼 기운이 검신에서 퍼져나간다.
백발광인이 이죽거리며 주먹을 내리쳤다.
“귀찮은 벌레 같은 것들! 어림없다!”
쾅!
주먹에 맞은 검신이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찍힌다.
콱!
하지만 공격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예상했던 바다.
검봉이 바닥을 찍는 순간 서호검법 제칠초식이 펼쳐졌다.
짜르르르릉!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바닥이 흔들리더니 쩌저적 균열이 간다.
곧게 뻗어나간 균열은 백발광인의 발치에서 강렬한 검기로 변해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꽈자아앙!
마치 벼락이 바닥에서 하늘로 거꾸로 치솟는 듯하다.
검은 기운은 뇌력처럼 뻗어 나가며 백발광인의 몸을 절반으로 갈랐다.
촤아아악!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검기의 탑에 핏방울이 퍼지면서 붉은 노을을 만든다.
서호의 뇌봉탑과 석양의 어울림을 본떠 만들어진 제칠초, 뇌봉석조(雷峰夕照)!
“아……!”
뇌봉석조를 본 무인들이 저마다 넋을 놓고 탄성을 터뜨린다.
이게 말이 되나?
투혈권왕의 호위단은 결성된 지 겨우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런 합격술과 차련술이라니?
무인들은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투혈권왕과 월희마녀가 합공을 펼치고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백발광인이다.
한데 적비연이 이끄는 수신위들이 백발광인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지 않나!
“끄아아아아! 이 개 같은 것들!”
분개한 백발광인이 허리를 젖히고는 고함을 내질렀다.
천지가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과격한 소리가 고막을 거침없이 찌른다.
“크읏!”
“우욱!”
무인들이 저마다 귀를 틀어막으며 비틀거렸다.
사예린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백발광인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내심 놀랐다.
적비연의 무위, 아니, 통솔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그래서 위험한 존재.
원래 흑룡대주가 저렇게 통솔력이 있었던가?
물론 흑룡대의 기강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건 좀 다르다.
목숨을 내건 상황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발처럼 움직이다니.
차라리 무공만 강하다면 덜 경계했으리라.
확실히 이상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파고들 때가 아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적비연이 제법 무거운 한 수가 되어주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때,
파스스스스……!
미묘한 기류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백발광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저자…… 머리카락이……?’
백발광인이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파스스스스……!
괴이한 소리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미묘한 기운이 우러나온다.
어딘지 위험한 기운.
자칫 손을 잘못 댔다간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다.
허옇게 샌 머리카락이 거짓말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그뿐 아니다.
‘체격이……!’
탄탄하던 상체가 홀쭉해지면서 길어지고 있다.
마치 축골공을 풀어 버리기라도 한 듯 키가 껑충 자라나는 중이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뼈마디가 드러나 보인다.
두 눈은 더욱 퀭하게 들어가면서 검은 동공이 흰자위를 대부분 차지해 간다.
“뭐, 뭐야?”
“이거…… 위험해 보이는데……?”
무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투혈권왕과 사예린의 표정에 낭패감이 스쳤다.
적비연도 마찬가지.
세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건…… 금제가 풀린 거야!’
어떤 식의 금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백발광인은 이제야 모든 능력을 개방하는 것이다.
투혈권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호신위들을 믿고 든든해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맙소사. 여기서 더 강해진다고?’
산 너머 산이라더니!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일단은 살고 봐야 할 게 아닌가?
투혈권왕이 모든 무인들에게 말했다.
“달, 달아난다! 지금은 놈을 상대하지 말고 모두 흩어졋!”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인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그 와중에도 수신위들은 고개를 돌려 적비연을 보았다.
투혈권왕의 명령에도 그들은 먼저 적비연의 의사를 확인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투혈권왕과 같은 생각.
“산개(散開).”
파바바밧!
적비연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수신위들이 일시에 흩어지며 날아올랐다.
잠시 후, 산채에 홀로 남은 백발광인이 허연 기운을 연기처럼 뿜어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산발처럼 뻗었던 머리카락은 이제 허리까지 착 가라앉으며 내려왔고, 탄탄하던 몸은 전체적으로 길쭉해지면서 깡말라 버렸다.
해골을 연상케 할 만큼 마른 그가 입매를 히죽 치켜 올리더니 허연 김을 뿜어내며 중얼거렸다.
“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