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천 길의 끝에서
적비연을 비롯한 호위단이 풀숲에 몸을 바짝 숙이고는 숨을 참았다.
미약한 숨소리도 내서는 안 된다.
기를 완전히 갈무리하고서는 수풀 사이로 언뜻언뜻 지나가는 그림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흐느적거리며 걷는 저 그림자는 죽음의 사신이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풀숲에 몸을 숨긴 무인들은 그마저도 신경에 거슬렸다.
조심 좀 할 것이지.
모두가 예민한 상태다.
정말이지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시끄럽다고 여길 정도다.
그 와중에 반가운 소리도 들린다.
쿠르르릉.
잔뜩 낮아진 밤하늘이 무거운 울음을 내지른다.
휘이이잉.
스쳐가는 바람에서 물비린내가 난다.
한차례 소나기라도 퍼부을 모양이다.
다행이다.
아무래도 폭우가 쏟아지면 자신들의 기운을 숨기기가 좀 더 수월해진다.
저벅…… 저벅…….
검은 그림자가 기다란 팔을 축 늘어뜨리고는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오락가락한다.
다행히 아직까지 자신들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호흡마저 참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벌써 산채 무인들 절반이 죽어버렸다.
금제가 풀린 백발광인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았다.
결국 사예린과 투혈권왕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섰다.
집결지는 산 정상으로 정했다.
한데 하필 백발광인이 투혈권왕 쪽을 쫓아왔다.
저벅…… 저벅…….
투혈권왕과 호위단이 몸을 숨긴 지 대략 일각을 넘어갈 즈음, 백발광인이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대략 이십여 장 정도의 차이가 벌어졌을 때 적비연이 전음을 흘렸다.
[좌우호법, 나와 함께 미끼가 된다.]
엽강호와 한사가 적비연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견은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호법장의 명은 절대적이다.
엽강호와 한사는 뒤를 힐끔 돌아보고는 전음을 흘렸다.
애초에 작전상 좌호법이 따로 움직이면 무조건 따라붙는 세 명이 있다.
그리고 우호법 역시 무조건 함께 투입되는 삼인이 있다.
즉, 명령은 엽강호와 한사에게만 내렸지만, 결국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무인들을 포함하면 모두 여덟 명이 된다.
거기에 적비연까지.
적비연은 다시 투혈권왕에게 전음을 흘렸다.
[토끼가 뛰면 매가 날아들 겁니다. 거리가 벌어졌다 싶을 때 전력을 다해 달리십시오.]
투혈권왕이 복잡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웃기는 일이다.
무공으로만 따지면 자신이 적비연보다 한 수 위다.
어디 한 수뿐일까?
작정하고 비무를 펼친다면 아마 적비연은 몇 합을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을 것이다.
초절정 오 단에 이른 자신이다.
초절정의 경지에서는 한 단의 차이도 어마어마하다.
과장 좀 보태면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막혀 있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하면 백발광인은 어느 정도일까?
모르긴 해도 초절정 팔 단 이상이리라.
그런데…….
호법장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의 눈빛, 표정, 말투, 행동 모든 것이 무한한 신뢰를 주고 있다.
어떻게 된 건가?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의지하다니.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한데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미끼 역할을 하는 호법장이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허, 호위무사의 안위를 걱정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누가 주인이고 누가 호위인가?
결국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괜찮겠나?]
[어렵지만 해볼 만합니다.]
[조심하게.]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단휘와 예홍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전음도 보내지 않았다.
둘은 투혈권왕과 함께 몸을 빼내는 역할이다.
그저 눈빛만 던져도 뜻이 통하는 사이가 아니던가?
물론, 예홍은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은 다시 미끼 역할을 맡을 호위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신호는 따로 하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면 각자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린다. 운이 좋으면 한 명, 운이 나쁘면 다섯, 아니, 여섯은 죽는다.]
적비연의 말에 무인들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괜히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적비연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툭, 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두둑……! 쏴아아아!
이내 장대비가 세상을 가득 채웠다.
좋은 징조다.
한 명이라도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은 올라갔다.
적비연이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임무는 하나. 권왕께서 여길 빠져나갈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번다. 안전이 확보되면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다.]
무인들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 저마다 공력을 끌어올렸다.
찰나,
파앗!
적비연의 신형이 귀신처럼 날아가면서 빗속을 뚫었다.
파밧!
엽강호와 한사가 바람처럼 그 뒤를 이었다.
방향은 다르다.
그리고 다시 그 뒤를 따라 야조들이 날아오른다.
쉬이이잇!
샤아아악!
모두 아홉 마리 토끼가 소낙비를 뚫으며 달리자,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던 맹수가 반응한다.
“거기냐!”
쉬이이잇!
버럭 고함을 내지른 백발광인이 허연 머리카락을 갈기처럼 휘날리며 달려든다.
‘지금이다!’
투혈권왕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누군가 그러지 않던가?
강호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가장 오래 살아남는 자라고.
지금은 죽여야 할 때가 아니라, 살아야 할 때다.
호신위들이 몸을 던져가며 만들어준 이 기회를 그냥 날려 버려서는 안 된다.
저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타앗!
그가 빗속을 뚫으며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수신위들이 그림자처럼 바짝 따라붙었다.
토끼를 쫓아간 맹수는 다행히 이쪽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작전은 성공했다.
아니다.
전신의 솜털마저 쭈뼛 서게 만드는 살기가 살을 엘 것처럼 등줄기로 날아든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려다가 겨우 참았다.
뒤를 돌아보는 시간마저 아깝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취이이잇!
섬뜩한 예기가 빗줄기를 뚫으며 날아드는 소리!
꼼짝없이 등이 꿰뚫리겠다고 생각한 순간,
“크악!”
비명이 바로 등 뒤에서 솟구친다.
수신위 중 누군가 나선 것이리라.
취이이잇!
곧이어 물기 젖은 검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아군의 일검이다.
까아앙!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금속성.
“아악!”
또 한 명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그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취이이잇!
다시 빗줄기를 뚫으며 무언가가 날아드는 소리가 고막을 찌른다.
투혈권왕은 순간 갈등했다.
돌아서서 막을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달릴 것인가?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돌아서서 막는다 한들?
잠시 멈춘 사이에 달려드는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어림없다.
죽더라도 달린다!
취이잇, 깡! 푹!
“커억!”
이번에는 투혈권왕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신위들이 나서서 날아드는 비수를 쳐냈지만 그 힘을 미처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 비수가 아니다.
옆구리를 뚫고 튀어나온 것은 장검이다.
수신위 중 한 명이 사용하던 검이다.
백발광인이 수신위를 죽이고 그의 검을 낚아채서 던진 것이리라.
“크읍!”
퍽! 촤아악!
주먹으로 검봉을 쳐서 관통한 검을 도로 튕겨냈다.
탁탁탁!
얼른 혈을 짚어 지혈했다.
그렇잖아도 어두운 숲속인데 사방을 덮는 비 때문에 한 치 앞도 구분하기가 어렵다.
투혈권왕은 멈추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하늘이 도운 것인지 살기가 점점 멀어져간다.
대신 그만큼 비명 소리도 많이 들린다.
마침내 비명 소리마저 희미해져 갈 무렵이 되어서야 투혈권왕은 걸음을 멈췄다.
“헉, 헉, 헉……!”
쏴아아아아!
사방이 비다.
투혈권왕이 천천히 돌아서자 자신의 뒤를 바짝 따르는 그림자들이 보인다.
일곱 명.
애초에 열 명이 넘었던 수신위는 겨우 일곱 명만 남았다.
“허, 허허.”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초절정고수라는 말이 무색하다.
이게 뭔가?
어려서부터 타고난 무골이란 말을 듣고 자랐다.
남들보다 성취가 빨랐고, 련주의 눈에 띄어 네 번째 제자가 됐다.
초절정 중단에 이른 고수로 권왕이라는 별호를 날렸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것도 수하 여럿을 희생하면서.
지금도 호법장을 비롯한 수신위들이 희생하는 중이리라.
너무 허탈해서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단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상까지 가셔야 합니다.”
그 말에 감정에 젖어 들어가던 이성이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자.”
투혈권왕이 어금니를 꾹 씹고는 몸을 돌렸다.
* * *
쏴아아아……!
굵은 빗줄기가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다.
적비연은 빗줄기 너머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백발광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의 곁에는 좌호법 엽강호와 우호법 한사가 연신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헉, 헉, 헉……!”
“제길……! 정상까지는 무리겠는데?”
엽강호가 대부를 지팡이 삼아 짚고서는 말했다.
적비연이 묵묵부답으로 인정했다.
확실히 무리다.
이대로라면 정상까지는커녕 중턱도 지나지 못해 전멸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
그들 뒤로는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다.
그렇다고 배수진은 아니다.
맞은편 절벽으로 건너갈 수 있는 흔들다리가 놓여 있다.
문제는 저 다리를 다 건너기도 전에 눈앞의 백발광인에게 전멸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곤 해도…….
엽강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옆에 선 적비연을 보았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남자.
진급 심사 때 그를 보고 이미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했다.
한데 호위무사가 되어 실전을 치르니 또 다르다.
보통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대단한 자였나?
저 미친 괴물을 상대로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치고 빠진다.
그의 명령을 받으면 뭔가에 홀린 것처럼 몸이 먼저 반응한다.
물론 그럼에도 네 명이나 죽었다.
둘은 어디로 달아난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부디 살아 있기만 바랄 뿐이다.
만약 적비연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주.”
엽강호가 툭 내뱉듯 불렀다.
적비연이 슬쩍 돌아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 어느 순간에는 사특한 기운만 가득 내뿜는 것 같더니, 또 어떤 순간에는 정순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풍기고. 사용하는 검법도 난생처음 보는 데다 온갖 기술이 난무하더군. 단주, 정말 흑룡대주였던 그 반철룡 맞소?”
반은 농담, 반은 진담으로 물어본 거다.
한데 돌아온 대답이 뜻밖이다.
“글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실대로 말해주면 다들 놀라 자빠질 텐데.”
그 말에 수신위들이 모두 적비연을 보았다.
곧 엽강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이만한 신위를 보이는 걸 보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겠지. 지금껏 실력을 숨긴 이유도 있을 거고, 이 공녀가 그리도 의심하는 이유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이제 와서 단주가 어떤 사람인들 따질 게 뭐요? 난 진즉 단주에게 내 목숨을 걸었고, 벌써 수차례 단주 덕에 목숨을 건졌지. 단주가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라도 따를 생각이오.”
“마찬가집니다.”
옆에 선 한사가 나직이 대답했다.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정 궁금하다면 알려주지. 단, 여기서 살아남으면.”
“쳇,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겠군. 궁금한 건 못 참거든!”
엽강호가 혀를 차며 대부를 붕 돌려 잡았다.
한사 역시 말없이 쌍검을 내세우며 기수식을 취했다.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싸울 생각 말고 다리를 건너라. 셋 센다.”
“젠장, 또?”
“셋, 둘, 하나…….”
적비연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엽강호와 한사도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가랏!”
적비연의 외침에 엽강호와 한사가 흔들다리를 밟으며 화살처럼 달려갔다.
파바밧!
적비연 역시 달렸다.
하지만 백발광인은 그들을 얌전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쉬이이잇!
한 줄기 바람처럼 날아간 백발광인이 적비연의 정수리를 향해 부러진 칼날을 내리쳤다.
팔이 길어졌기 때문일까?
칼날이 마치 채찍처럼 날아든다.
쒸에에엑!
쩌어엉!
도검이 부딪치면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파파파파파파!
엄청난 공명과 함께 흔들다리가 마구 출렁이더니 투둑 끊어지기 시작했다.
적비연이 떨어지는 나무판자를 밟으며 튕기듯 날아갔다.
쉬이이잇!
따앙!
다시 한번 울리는 금속성!
적비연이 그대로 만검합일 초식을 펼쳤다.
팍!
쉬이이잇,
콰차앙!
투두두둑!
일검을 막아낸 칼날의 절반 정도가 산산조각 나면서 그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그 바람에 파편에 맞은 흔들다리가 끊어지면서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패앵!
아래로 추락하려던 백발광인이 얼른 손을 뻗었다.
역시나 팔다리가 길어진 탓에 암공(暗空)에 떨어지지 않고 밧줄을 낚아챘다.
휘리리릭, 착!
백발광인과 적비연이 동시에 외줄 위로 사뿐히 착지하면서 균형을 잡았다.
흔들흔들.
후우우웅!
바람결에 절벽을 잇는 밧줄 하나가 너울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그 외줄을 탄 적비연이 백발광인을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솨아아아아……!
장대 같은 빗줄기가 끝 모를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져 간다.
적비연이 외줄 위에서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괴물, 여기서 끝장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