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천 길의 끝에서
흔들흔들……!
절벽을 이은 밧줄 하나가 연신 흔들린다.
후우우웅!
적비연과 백발광인은 흔들리는 밧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서로를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백발광인은 알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상대는 무공 수위에 비해 노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수많은 사투를 겪어 몸에 밴 것처럼 반응했다.
사실이었다.
적비연은 현재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수백 년의 삶을 공유하면서 경험치가 쌓이고 쌓여 생존본능 또한 탁월해진 것이다.
스륵.
먼저 움직인 쪽은 백발광인이다.
밧줄 위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럼에도 밧줄은 특별히 흔들리지도 않았다.
마치 그의 움직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적비연은 오른발을 뒤쪽으로 옮기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어차피 밧줄 하나를 둔 직선상의 싸움이다.
공격과 방어, 회피가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밧줄을 잘라 버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백발광인이 찰나지간에 달려들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방어하다가 함께 추락하는 수가 있다.
솨아아아아……!
비가 끊임없이 내린다.
바닥이 없으니 빗소리는 부드럽기만 하다.
적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극마.’
-말해라.
‘그동안 훈련한 것…… 시도해 보자.’
-호오, 이 몸의 힘이 필요한 것인가?
적비연은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여차하면 극마의 빙의를 이용해 힘을 이용할 생각이다.
솨아아아……!
사위가 고요해진다.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속도가 점점 더뎌지고 있다.
실제로 비가 천천히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집중력이 올라간 것이다.
점점 느려지는 빗줄기는 마침내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빗물이 보일 정도다.
톡.
눈꺼풀 위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면서 터져 나간다.
일순 적비연은 눈을 깜빡였다.
찰나,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될 때,
파아앙!
응축된 기가 폭발하면서 그의 신형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쒸에에엑!
제삼자가 보기에는 그저 한 줄기 광선이 날아간 것이다.
하지만 온 신경을 집중한 적비연에게는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벽력활보와 함께 펼친 구천일관시.
툭, 툭, 투둑……!
뾰족한 검봉이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관통하는 게 하나하나 보인다.
초절정 사 단의 경지와 숱한 싸움의 경험으로 인해 절로 생긴 초감각 영역이다.
적비연과 혼이 연결된 극마는 그 모든 과정을 거의 동일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건 설마…… 시활안(時滑眼)?
극마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시활안은 무공이 아니다.
공천지권위처럼 전설로 전해지는 이능 중 하나다.
상고시대에 한 여인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었다.
평생 남편에게 헌신하고 지극정성으로 아이들을 키운 그 시절의 평범한 여성.
하지만 그녀에게 어느 날 재앙이 닥쳤다.
하루아침에 무인들에게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가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그날로 여인은 복수를 꿈꾸며 무공을 익히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기에는 너무나 늦은 나이였다.
매일같이 무공을 갈고닦았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이미 혈맥이 굳을 대로 굳은 상황에서는 일류의 수준에 오르는 것조차 버거웠다.
결국 그녀는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고 알려진 것은 무려 삼백 년 후다.
어떻게 삼백 년 동안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전설이겠지만.
삼백 년 후의 그녀는 여전히 무공이 일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들과 다른 시간을 보는 재능을 얻었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시간의 상대성을 알아냈고, 그 상대성을 활용할 방안도 깨달았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득도한 것이다.
물론 그녀가 시간의 흐름을 조절해서 남들보다 빠르거나 늦게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감각적으로 느끼는 시간이 다를 뿐이었다.
똑같은 찰나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녀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지는 셈이었다.
즉, 사고의 속도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것이다.
-정말 그 전설의 시활안인가?
하긴 생각해 보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적비연은 보통 인간이 살 수 있는 세월 이상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의술이 극에 이르렀던 아상의 기억과 온갖 무인들의 깨달음까지 섭렵한 몸이다.
시활안이 정말 가능한 것이고, 실존하는 능력이라면 그 숱한 경험에서 정말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극마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적비연의 검봉은 백발광인과의 거리를 삼 장 이내로 좁히고 있었다.
툭, 툭, 투둑……!
마침 백발광인이 든 칼도 빗방울을 베며 좌측에서 날아든다.
그 움직임 역시 몹시 느리게 보인다.
그렇다고 적비연이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둘의 속도는 각자가 가진 재능 이상으로 발휘되지 않는다.
다만 적비연은 이 느린 시간 속에서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다.
-구천혼선결!
극마의 조언을 곧바로 수용했다.
적비연은 내질러가던 검의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발끝으로 밧줄을 툭 찍어 찼다.
패앵!
밧줄이 튕겨지는 것과 동시에 적비연이 그대로 팽이처럼 회전한다.
휘리리리릭!
까가가가가앙!
불꽃과 함께 물방울이 마구 터져 나간다.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던 적비연이 다시 밧줄 위로 착지하면서 제이초식 구천단혼전을 연환식으로 펼쳤다.
촤아아아악!
쏟아지는 빗줄기를 일검에 벤다.
하지만 백발광인은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후다.
물론 적비연은 이 모든 과정을 느릿하게 확인했다.
자신이 관성을 이기지 못해 구천단혼전으로 허공을 베어가는 순간, 백발광인은 그대로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백발광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검이 빗줄기만 베어내고 만 것이다.
대신 아래로 푹 꺼진 백발광인이 밧줄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튕기듯 적비연의 뒤로 올라섰다.
“크아아압!”
적비연은 이를 악물고 가속을 더했다.
이렇게 된 이상 구천혼선결을 한 번 더 연환식으로 펼칠 수밖에!
상승 무공을 연이어 펼치는 만큼 공력 소모가 극심하겠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촤촤촤촤촤아악!
적비연의 검이 연신 빗줄기를 베어내며 수차례 회전했다.
이번에도 백발광인은 밧줄을 툭 찍어 차고는 성큼 물러났다.
찰나,
투투투투툭……!
적비연의 시활안이 빗줄기를 뚫으며 날아드는 대부를 보았다.
적비연과 백발광인의 위치가 바뀌자, 절벽을 건너가서 지켜보던 엽강호가 대부를 날린 것이다.
하지만 백발광인은 가히 초인의 경지에 오른 자다웠다.
순간 밧줄을 툭 찍어 차더니 허공으로 훌쩍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그가 마치 계단을 밟고 오르듯이 날아드는 대부를 한 번 더 툭 찍어 찼다.
그 바람에 대부가 방향을 아래쪽으로 틀면서 적비연의 발치에 떨어졌다.
‘안 돼!’
뒤늦게 적비연이 반응했지만, 날아드는 대부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쉬팟!
아래로 떨어진 대부가 그대로 밧줄을 끊어버렸다.
순간 적비연은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는 꼼짝없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극마! 지금!’
-알겠다, 주인!
지금까지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하던 극마가 순간 적비연의 몸으로 흡수되듯 들어섰다.
찰나지간 적비연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동시에 적비연이 떨어지는 밧줄을 발로 차며 공력을 격발시켰다.
콰앙!
순간의 폭음과 함께 적비연이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팡! 팡! 팡!
놀랍게도 적비연은 연이어 발을 차면서 허공답보(虛空踏步)를 펼쳤다.
지켜보던 엽강호와 한사가 입을 척 벌렸다.
“저, 저럴 수가……!”
순식간에 허공에서 거리를 좁힌 적비연이 그대로 검을 내지르며 일격을 가했다.
쩌어어엉!
쿠르르르르!
두 사람의 도검이 부딪치면서 뇌성벽력이 울리고 절벽 일부가 그 공명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렸다.
백발광인은 떨어지는 밧줄을 움켜쥐고는 호선을 그리며 절벽으로 날아갔다.
슈우우우욱!
반면 적비연은 훌쩍 튕겨 올랐다가 허공을 한 번 더 차고는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허공답보를 펼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경신술의 일종.
하늘을 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이지 인간의 싸움이라고는 보기 힘든 광경.
콰다앙!
쿠스스스스……!
백발광인이 밧줄에 매달린 채 절벽에 부딪치자 절벽 일부가 다시 무너져 내렸다.
그 와중에 밧줄이 끊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하지만 적비연의 공격은 끝이 아니었다.
“죽어, 좀!”
일갈을 터뜨린 적비연이 혜성처럼 떨어지면서 그대로 낙뢰휘검 초식을 펼쳤다.
빛이 번쩍이는 것과 동시에 벽력이 울린다.
짜르르르릉!
마침 백발광인도 벽면을 툭 차고는 마주쳐온다.
쒸아아앙!
빗줄기를 뚫으며 날아드는 발차기!
하지만 허초다!
검과 부딪칠 것만 같던 각법이 방향을 비스듬하게 트는가 싶더니 등 뒤에서 채찍처럼 날아든다.
길어진 팔다리의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퍼억!
“커억!”
그대로 튕겨 나간 적비연이 암벽에 쾅 부딪쳤다.
쿠르르르……!
곧이어,
“하앗!”
쾅!
적비연이 벽면에 진각을 밟으면서 용수철처럼 튕겨 나갔다.
순간 손을 뻗은 그가 백발광인의 바짓단을 아슬아슬하게 움켜잡았다.
찌이익……!
적비연의 몸이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얼른 고개를 들어 보니 백발광인의 바짓단이 절반이나 찢어져 나갔다.
한쪽 팔로 밧줄을 움켜잡은 백발광인이 적비연을 내려다보더니 씨익 웃었다.
온통 시커먼 동공으로 히죽 웃는 미소는 정말이지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다음 순간 백발광인이 검을 들어 적비연을 내리쳤다.
쒸이이이잇!
검을 들어 막으면 옷자락이 찢어져 추락하고 말리라.
그렇다고 발목을 움켜잡으면 떨어지는 칼날에 손목이 날아갈 터다.
적비연은 순간 검을 버리고 맨손으로 떨어지는 칼날을 움켜잡았다.
콰앙!
다행히 손이 베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온몸이 떨릴 정도로 손이 저릿저릿하다.
귀수갑 효능을 톡톡히 봤다.
하천웅이 끼고 있던 걸 다시 가져오길 천만다행이다.
적비연이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칼날을 움켜쥔 손을 확 끌어당겼다.
“흐아아압!”
투둑!
찰나 밧줄이 끊어지면서 백발광인이 아래로 추락했다.
반대로 적비연은 그 반동으로 위로 살짝 솟구쳤다.
순간 적비연은 모든 공력을 발끝에 집중하고는 떨어지는 백발광인을 걷어찼다.
콰아앙!
“크아악!”
백발광인이 비명과 함께 기다란 팔을 허우적거렸다.
찌이이익!
날카로운 손톱에 적비연의 옷자락이 찢어졌지만 다행히 잡히지는 않았다.
암벽까지 튕겨 나간 적비연은 다시 벽면을 발로 찼다.
파앙!
후드득……!
파편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적비연의 몸이 대각선으로 솟구쳐 올랐다.
콰악!
다행히 적비연은 끊어진 밧줄의 끝자락을 낚아챌 수 있었다.
반면 추락하는 백발광인은 기다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노오오옴! 반드시 죽여주마!”
섬뜩한 목소리가 협곡 사이에서 마구 메아리치다가 점점 가라앉아 갔다.
슈우우우.
마침내 적비연의 몸에서 극마가 연기처럼 빠져나왔다.
시간상 한계치에 다다른 탓이다.
만약 조금만 늦었어도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은 적비연이 되었으리라.
비록 반의반 각에도 미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극마의 도움을 확실히 받았다.
마침 절벽 위에서 엽강호와 한사가 고개를 내밀고는 적비연을 확인했다.
“단주!”
“지금 끌어 올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얼른 밧줄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 좀 끌어올려라.’
격전으로 지칠 대로 지친 적비연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밧줄에 매달려만 있었다.
가까스로 절벽에 올라오니 엽강호와 한사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적비연을 맞이했다.
특히 엽강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라도 한 바가지 쏟을 태세였다.
“왜 그래?”
적비연이 찢어진 옷을 툭툭 털면서 묻자 엽강호는 울컥하는 마음에 겨우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단주가…… 죽는 줄 알았소.”
“안 죽었으니까 됐잖아.”
“나참! 이왕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올 거면 사람 간 졸이게나 하지 말든가! 일부러 이러는 거요?”
결국 엽강호가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엽강호는 내심 적비연에게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한사도 마찬가지.
시활안을 사용한 적비연에게는 지금까지의 사투가 비교적 느리게 전개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그저 빛이 마구 번쩍이는 정도로 보일 지경이었다.
벽력이 마구 내리치고 천둥이 연신 울리다 보니 싸움은 끝나 있었다.
아마도 어두운 밤이라서 더 그리 보였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엄청난 신위였다.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울지 말고 가자.”
“안 울었소!”
“알았으니까 가자.”
“그 전에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소?”
“무슨 약속?”
“단주의 정체 말이오? 진짜 정체가 뭐요?”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고는 말했다.
“그래, 그것도 말해줄 테니 가자. 꽤 먼 길을 돌아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