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51화 (152/301)

151. 믿긴 믿는 거냐?

쿠르르릉! 쾅!

하늘이 진노한 것인지 천둥 번개가 연신 울려댔다.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잠깐 스쳐 가는 소나기는 아닌 모양이다.

번쩍!

짜르르릉! 우지끈!

순간 밤하늘을 찢으며 한 줄기 낙뢰가 떨어졌다.

요란하게 불꽃을 터뜨린 낙뢰는 단숨에 거목을 쓰러뜨렸다.

“피햇!”

앞선 무인 중 누군가 소리치자 산 정상을 향해 달리던 무인들이 일제히 흩어지며 날아올랐다.

콰당탕! 쿠구궁……!

거목은 주변을 초토화시키듯이 한참이나 굴러간 뒤에야 가까스로 멈췄다.

미처 반응이 늦었거나 진흙에 발이 미끄러진 무인 몇몇이 거목에 부딪혀 부상을 입었다.

어두운 밤인 데다 굵은 빗줄기가 온 세상을 덮고 있으니 쓰러지는 거목을 피하기가 녹록지 않았던 탓이다.

꽈르르릉!

한차례 난장을 만들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하늘은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무인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부상자를 살피며 다시 이동할 채비를 갖췄다.

사예린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멀쩡한 산채를 두고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오늘 투혈권왕의 호법장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혈조야귀를 만나서 담소나 나누고 있어야 했다.

한데 난데없이 백발 광인이 나타나면서 모든 계획이 꼬여 버렸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옆으로 내려선 월혼이 사예린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월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예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주군?”

그제야 사예린이 월혼을 돌아보았다.

“권왕은?”

“올라오는 중일 겁니다.”

사예린이 입을 꾹 다문 채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왔을까?

갑자기 올라온 높이만큼 자존심이 팍 상한다.

도대체 왜?

어째서 도망친 건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적을 앞두고 등을 보인 채 달아나다니!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적이 전부 만만해서 그랬냐고?

천만에.

사 년 전, 광검문주를 상대했을 때 그녀는 넘지 못할 벽이 무엇인지 두 눈 똑똑히 보았다.

그때도 진급심사가 끝난 후 전주들에게 내려진 특임이었다.

그날 광검문주와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솜털이 곤두설 정도다.

그를 보는 순간, 그가 어떻게 흑천련 고수 셋이나 죽일 수 있었는지 저절로 납득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적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의 나약함이 두려웠다.

어디 광검문주뿐인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흑천련주의 이 제자?

사람들은 모른다.

그 부러움을 사기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공포와 맞서야 했는지.

수십, 수백 번의 공포와 맞서다 보니 나중에는 두려움이라는 감각마저 무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렇게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까득.

사예린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어째서 한번 제대로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가?

금제가 풀려서?

웃기는 소리다.

지금껏 목숨 걸지 않은 임무가 있었던가?

‘그래, 다 그자 때문이야!’

사예린은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투혈권왕의 호법장.

이상하게 그의 말을 따랐다.

금제가 풀린 직후 투혈권왕은 퇴각령을 내렸고, 호법장 역시 모두에게 물러날 것은 명했다.

사예린도 무작정 싸울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 빈틈을 노리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권왕의 호법장이 자신을 돌아보며 물러나야 한다고 했을 때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따랐다.

그는 정상에서 집결하자고 제안했다.

사예린은 그때도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순간 자신이 명령을 받은 수하처럼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순간 그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의 말투, 동작, 눈빛 등 모든 것이 그녀의 사고를 정지시켜 버렸다.

어째서 그런 일이!

설마 사술?

사파의 무인이 사술을 썼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상성이라는 게 있다.

섭혼미공을 익힌 자신에게 섭혼술을 사용한다?

그야말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이 복잡해진다.

지금까지는 적비연이 그저 눈엣가시였다.

어떻게든 제거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은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반철룡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그래, 뭐가 됐든!

정신을 차린 이상 이렇게 달아날 수는 없다.

“돌아간다.”

“예?”

월혼이 움찔거리고 되묻자 사예린이 미간을 곱게 찡그렸다.

“못 들었어?”

“하지만 위험…….”

“위험하지 않은 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어?”

“임무와 별개입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쪽이…….”

“어떨 것 같아?”

사예린이 월혼을 빤히 바라보며 묻자, 그가 곧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서둘러.”

사예린의 말이 떨어지자 무인들은 낭패감에 젖은 얼굴을 하면서도 몸을 돌렸다.

그렇게 비탈진 산길을 얼마나 되내려왔을까?

마침 저만치에서 기척이 느껴졌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바로 투혈권왕과 그 수신위들이었다.

“사저?”

“살아 있었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권왕의 말을 흘려들은 사예린이 뒤쪽을 힐끔 보고는 물었다.

“그자는 보이지 않는군?”

“그 광인이라면 지금…….”

“아니. 네 호법장.”

사예린의 말에 투혈권왕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제 호법장은 왜 또 찾으시는 겁니까?”

“이상하잖아.”

투혈권왕의 표정이 대번 일그러졌다.

또 시작이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번번이 의심을 받는 당사자는 오죽할까?

“자꾸 이러시면 저도 더 이상은……!”

“육감이 아니라 이번엔 내 눈으로 판단할 거야.”

“사저……?”

투혈권왕이 멈칫하고는 사예린을 보았다.

“내려가서 보면 판단이 서겠지. 그 녀석을 죽일지 말지.”

“하면 호법장을 믿을 수도 있다는…….”

“너무 앞서가진 말고. 그 호법장이 광인과 한패일 수도 있는 거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사제는 그게 문제야. 너무 감정이 앞서는 것. 뭐, 일단은 두고 보자고.”

쏴아아아……!

장대비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가만히 보았다.

투혈권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의심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만해도 어딘가?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사예린이 아니던가?

그녀가 이 정도로 물러섰다는 것만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투혈권왕이 몸을 돌렸다.

“좋습니다. 가지요.”

곧 두 사람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산채로 내려왔을 때는 사방 천지에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몇몇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백발 광인과 적비연이 보이지 않았다.

사예린이 투혈권왕을 돌아보았다.

“나란히 사라졌네. 공교롭게도 진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겠는데?”

“어디선가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죠.”

“너와 내가 합공을 해도 이기기 힘든 상대인데 그 조무래기들을 데리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건 모를 일이지요.”

그때 수하 중 한 명이 달려와 보고했다.

“동쪽 절벽에 흔들다리가 끊어진 흔적이 보입니다.”

“수신위들과 광인은?”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예린과 투혈권왕이 수하들을 이끌고 절벽까지 달려갔다.

가는 동안 수신위들의 시체가 하나 둘 보였다.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다는 증거였다.

마침내 절벽에 다다른 투혈권왕이 끊어진 다리를 보고는 눈자위를 파르르 떨었다.

“이건…….”

다리가 한가운데에서 끊어졌다.

만약 누군가 절벽을 건넜다면 맞은편 절벽 부근에서 끊어졌을 것이다.

“동귀어진인가……?”

사예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아니, 아직은 모른다.

적어도 호법장의 시체를 확인한 건 아니니까.

잠시 후 그녀가 피식 웃었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아쉽게 됐어.”

말과는 달리 그녀는 차라리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반면 투혈권왕은 허탈한 심정에 비척거렸다.

단휘와 현청이 얼른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어금니를 뿌득 간 투혈권왕이 허공을 향해 사자후를 떨쳐 울렸다.

“반 호법장! 어디에 있는가!”

그의 목소리가 협곡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 * *

“여기 있습니다!”

한사가 조그마한 동혈 입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곁으로 다가온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쉬기에는 적절하군.”

“내가 불을 붙이겠소.”

엽강호가 동혈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면서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곧 모닥불을 피운 세 사람은 정좌를 한 채 운기행공에 집중했다.

제일 먼저 운기를 마친 적비연이 잠시 기다렸다가 엽강호에게 물었다.

“등을 베였군.”

“괜찮소.”

“벗어라.”

“괜찮은데…….”

엽강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상의를 탈의했다.

등 한복판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선명했다.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아직까지도 피가 흘렀다.

적비연은 재빨리 혈을 점하고는 거침없이 침을 놓아갔다.

“이젠 의술까지?”

“왜? 돌팔이일까 봐?”

“뭐, 솔직히 불안하긴 하지. 내 평생 남에게 몸을 맡긴 적이 없소.”

“내게 목숨을 걸었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도 걸고 있잖소. 무인이 등을 내줬다면 말 다한 거지.”

“그럼 믿어. 의술만큼은 교 선생보다 나으니.”

“허 참, 농담도…….”

“끝났다.”

“벌써?”

“그래.”

“아니, 뭘 했다고 벌써 끝이오? 등짝이 찢어져서 너덜너덜할 텐…….”

말을 하던 엽강호가 멈칫거리고는 손으로 허리를 매만졌다.

통증이…… 가라앉았다.

침만 놨을 뿐인데 통증이 이렇게 말끔히 사라지다니!

어디 그뿐인가?

전신의 혈맥이 시원하게 뚫리면서 내기의 흐름이 원활해졌다.

마치 무인만을 전문적으로 치료해 주는 의원에 가서 비싼 침이라도 맞은 것 같다.

엽강호가 멍해진 표정으로 돌아보는데, 적비연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한사에게 다가갔다.

“벗어. 옆구리와 허벅지지?”

한사가 놀란 눈으로 적비연을 보다가 곧 순순히 상하의를 탈의했다.

다친 곳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신경을 썼는데 바로 알아보다니.

어차피 옷은 걸레조각이 되었고 장대비가 핏물까지 말끔히 씻어냈기에 겉으로 봐서는 부상 부위를 알기 어려울 터였다.

적비연은 이번에도 거침없이 침을 꽂아 넣었다.

잠시 후 한사 역시 통증이 가시면서 몸이 개운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는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일단은 응급처치지만 효과는 좋을 거야. 어디에서도 이런 시술은 받을 수 없으니 영광으로 알아.”

안다.

말해주지 않아도 몸이 벌써 느끼고 있다.

엽강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단주,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신 거요?”

“정말 알고 싶어?”

“적어도 내가 누굴 따르는지는 알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소?”

입이 무거운 한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비연이 두 사람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말해줘도 믿기 어려울 텐데.”

“거참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오. 이미 등을 내어줄 때부터 믿는다고 하지 않았소?”

이번에도 한사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약속은 약속이니 말해주지. 꽤 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적비연은 두 사람에게 그간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딱. 따닥.

이따금씩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가 동혈에 울렸다.

한참이나 이어진 적비연의 이야기가 끝나자 엽강호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걸 지금 믿으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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