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믿긴 믿는 거냐?
좋지 않다.
정말 좋지 않다.
단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지금은 그녀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럴 때 그녀는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갑자기 어디로 튈까 봐 그러는 게 아니다.
누구라도 그녀를 건드릴까 봐 그런다.
마침 임송화가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멍하니…….”
“쉿!”
단휘가 얼른 임송화의 어깨를 붙들고는 검지를 입술에 댔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가주님이 실종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호법장이 실종돼서 상심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뭐, 가끔 저럴 때가 있어요.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제일 좋거든요.”
임송화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예홍이 유별난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았다.
대신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난감하네. 우리 편인 호법장님이 이렇게 실종되셨으니…….”
“죽었어.”
불쑥 들려온 목소리.
예홍이 퀭한 눈으로 바닥만 바라본 채 홀린 듯 중얼거렸다.
“죽어 버린 거야. 분명…….”
“에…… 그럴 수도 있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확실히 죽었어. 우린 끝이야. 희망 같은 건 품지 마. 다 허상일 뿐이니까.”
“너무 극단적인 생각 같은데?”
“세상이 그래. 이 세상이 극단적이지. 넌 그렇지 않아?”
예홍이 움푹 들어간 눈으로 임송화를 돌아보았다.
임송화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대꾸했다.
“글, 글쎄. 난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아서…….”
“아니.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어딘가에서 처참하게 죽겠지. 그냥 죽기만 하면 다행이지. 어쩌면 쓰레기 같은 것들한테 걸려서 몹쓸 짓을 당하고 찢어진 걸레처럼 내던져져서 짐승들의 먹이가 될 거야. 세상이 그렇거든. 네 인생도 다르지는…….”
“야, 악담하냐?”
임송화가 발끈해서 소리치자 단휘가 얼른 나서서 그녀를 말렸다.
“하하, 괜히 열받고 그러지 마시라니까. 원래 저런 녀석이라는…….”
“악담 아냐. 현실이야. 호법장님도 마찬가지. 그 높은 곳에서 추락했으니 지금쯤이면 팔다리가 따로 널브러져 있겠지. 아니, 이미 짐승들이 물어뜯고 형체가 없을지도? 호법장님의 눈알은 어느 곰 새끼 위장에서 녹고 있는 중일 거야. 호법장님의 팔이나 다리는 늑대가 잘근잘근 씹어 먹고…….”
“야야. 너도 그만해. 그냥 무시해요, 무시.”
단휘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얼른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결국 임송화는 씨근덕거리다가 몸을 휙 돌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러자 예홍이 걸음을 돌리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야, 어디 가?”
단휘의 부름에 예홍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절벽에.”
“거긴 왜?”
“뛰어내려서 가주님을 찾으러.”
“그러다간 죽어!”
“몰랐어? 저승에서 찾겠다는 소리야.”
단휘가 얼른 주변을 둘러보고는 귓속말을 전했다.
“야! 가주님은 어차피 환생하시잖아!”
“장담할 수 있나?”
“뭐?”
“가주님이 언제까지나 몇 번이고 환생할 거라는 걸 장담할 수 있냐고.”
“그야…… 나도 모르지. 그냥 지금까지처럼 당연히…….”
“아니. 이번이 분명 마지막일 거야. 끝장난 거야. 너도 그러니까 이제 네 살길을 찾도록 해. 나는 가주님의 뒤를 따를 테니.”
“진짜 정신 안 차릴 거야?”
단휘가 막아서자 예홍이 싸늘한 시선을 던지더니 연검을 뽑아 들었다.
“비켜.”
“그러지 말고 차분하게 생각하자고. 조금 기다리면 분명히…….”
쉬이이잇!
순간 예홍의 연검이 단휘의 심장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이런 미친……!”
깜짝 놀란 단휘가 엉겁결에 검을 휘두르며 연검을 막아냈다.
채앵!
금속성에 이어 예홍이 다시금 살수를 뻗어왔다.
그야말로 까딱 방심했다간 목이 달아날 판.
어쩔 수 없이 단휘도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섞어야만 했다.
채챙! 챙! 챙!
두 사람의 검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는 이가 있었다.
‘저들은 분명…… 내 호위들이 아닌가?’
멀찍한 곳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투혈권왕이 단휘와 예홍의 비무를 보고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초절정 중단에 이른 자신이 봐도 두 사람의 비무는 가히 실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연검을 든 여인은 무척 패도적인 공격을 이어갔고, 남자는 그때마다 간발의 차이로 방어에 성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저토록 열심히 훈련을 하다니. 반 호법장, 자네는 그 짧은 시간에 정말 훌륭한 호위단을 만들었군.’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아쉬움이 몰려왔다.
흑천련주의 사 제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이 왜 탐나지 않겠나?
다만 그가 지금껏 얌전히 지냈던 건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서였다.
대사형 파천신군은 너무 강했고, 이 공녀인 월희마녀는 너무나 냉혹한 여자였다.
이미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세력이 집결되었으니 자신은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한데 호법장을 발탁하고 나서 모든 것이 변했다.
이상하게 호법장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든든했다.
분명 무공만 따지면 자신이 훨씬 고강할 텐데 왠지 모르게 의지하게 됐다.
어쩔 땐 마치 오랜 삶을 살아 혜지가 넘치는 선인을 대하는 것만 같았다.
비록 함께 생활한 시간은 짧았지만 호법장은 자신의 처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호법장이 있었다.
이제야 후계자의 자리를 제대로 한 번 노려봐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갈 사람이었나?’
허탈감이 몰려온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야.
이 와중에도 저토록 열심히 수련하는 호신위들이 있는데.
‘오, 조금 전엔 정말 목을 베는 줄 알았어.’
비무를 하면서도 살기까지 드러내다니.
그래, 비록 호법장과 좌우호법을 모두 잃었지만, 저런 무인들이 여전히 자신 곁에 있지 않은가?
이제 그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서야지.
생각을 굳힌 투혈권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편 단휘는 연신 거침없는 공격을 막아내며 저만치에서 일어나는 투혈권왕을 힐끔거렸다.
“이런 씨……! 왜 보고도 안 말려주는 거야? 아오, 진짜!”
* * *
비가 그쳤다.
밤사이 지칠 줄도 모르고 퍼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화창하게 갠 날씨.
하지만 밤새 시신을 수습하며 뒷정리를 했던 산채의 무인들은 저마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극도의 긴장감에서 풀려난 탓인지, 그들은 비가 그친 줄도 몰랐다.
하지만 누군가 살기라도 슬쩍 흘리면 거짓말처럼 깨어나리라.
단휘는 나무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밤새 예홍과 격전을 치렀는데 어떻게 잠들게 됐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다만 예홍에게서 투신을 하지 않겠다는 답을 들은 후 잠이 든 것 같다.
그럼에도 불안해서 그는 산채가 아닌, 나무 아래에서 검을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눅눅하게 젖었던 옷은 바싹 말라 있었다.
햇살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면 중 무의식중에 공력을 운기해서 수분을 증발시킨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꾸벅꾸벅 졸았을까?
스윽.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단휘는 반사적으로 검파를 잡으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하지만 상대에게서 어떠한 투기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누구……?”
죽립을 깊이 눌러쓴 사내.
“이곳에 누가 있는가?”
자연스럽게 하대가 나온다.
단휘가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누구냐고 먼저 물었을 텐데.”
죽립인이 피식 웃었다.
“제법 패기는 있구나.”
“그래서 대답은?”
피피잉!
따다앙!
순간 죽립인의 손에서 바늘이 쏘아졌고 단휘는 재빨리 검을 휘둘러 쳐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단휘가 검을 앞세우고는 소리쳤다.
“누구냐!”
“아직도 날 몰라본다?”
그제야 죽립인이 검지로 죽립을 슬쩍 들어 올렸다.
“……!”
“이제 알겠느냐?”
죽립을 쓴 중년의 사내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교 선생……? 아니, 혈조야귀!”
“자,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군.”
단휘가 혼란한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얼른 포권을 취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래서 대답은?”
“이 공녀님과 사 공자님이 계십니다!”
“과연. 한데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혈조야귀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시체는 대부분 수습을 해서 화장을 했지만,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단휘가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하자 혈조야귀가 잠깐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군. 일단 두 분을 만나뵈어야겠다. 안내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단휘가 몸을 돌려 앞장섰다.
* * *
“날씨 좋네. 이만하면 몸도 구 할은 회복한 것 같고. 어때?”
적비연이 동혈 입구에서 뒤를 돌아보고는 물었다.
“허 참…….”
엽강호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어…… 허 참…….”
벌써 몇 시진째 이런 반응이었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혼란스럽나?”
“단주 같으면 안 그렇겠소?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언제는 믿는다며?”
“그게 참…… 허 참…….”
적비연은 웃어넘겼다.
하긴.
믿음도 믿음이지만, 자신의 정체도 문제일 것이다.
그동안 믿고 따른 자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정파 무인이라는 것을 하루아침에 알게 됐으니 머릿속이 혼란할 수밖에.
“그래서 마음이 바뀌었나?”
“…….”
엽강호가 입을 꾹 다물고는 묵묵히 생각했다.
사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
밤새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해가 떠오른 후에도 생각하다가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깼다.
결론은 이미 나왔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적비연의 이야기가 너무나 상세하다.
정말 겪은 것이 아니라면 절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래, 알고 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다만 여전히 실감이 안 될 뿐이지.
엽강호가 적비연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남자가 아니오.”
“그래서 나를 따르겠다?”
“당연.”
“다행이군. 내 손으로 널 죽이고 싶진 않았거든.”
“허 참. 그런 말을 잘도…… 단주가 강한 건 알지만 내가 그리 쉽게 죽을 것 같소?”
“그러니까 더 다행이지. 어렵게 죽이게 될 걸 아니까.”
“나 참, 그걸 말이라고.”
엽강호가 투덜거리면서 대꾸했다.
적비연이 엽강호와 한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거다.”
“각오하고 있소. 이왕이면 꿈 크게 노는 것도 좋겠지. 어차피 난 단주와 함께 싸우는 게 즐거웠던 거니까. 이 친구도 마찬가지일 거고.”
엽강호의 말에 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비연이 입매를 올렸다.
“그럼 됐다. 가자.”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오?”
“장사로 간다.”
“장사로?”
엽강호와 한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평생 흑천련 권역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한데 장사로 간다니.
정파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니 왠지 벌써 긴장된다.
하지만 묘한 기대감에 흥분도 된다.
분명한 건 그간 자신들이 살아왔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앞으로 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엽강호가 물었다.
“혹시 벽력적가주로서 사절단과 다시 재회하려는 거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조금이라도 일찍 적가장으로 돌아가서 대비를 해두어야지.”
그러자 한사가 물었다.
“사절단을 전부 쓸어버릴 생각이신지?”
“흐음. 그럼 호위단 동료들까지 처리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상관없습니다. 주군만 섬길 뿐.”
허어, 역시 사파답다고 해야 하나?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조금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다.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은 없다. 말했다시피 내 목표는 강호일통을 이루고 그 정점에 서는 것. 그러려면 다시 흑천련으로 들어가는 게 여러모로 좋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투혈권왕의 호법장 자리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엽강호가 물었다.
“하면 사절단이 적가장을 칠 때는 어쩔 생각이오?”
“그런 생각을 못하도록 만들어야지.”
“어떻게?”
“칼을 부러뜨려야지 않겠나?”
“칼이라면…….”
엽강호의 말에 적비연이 싸늘한 웃음을 그렸다.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 혈조야귀를 죽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