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53화 (154/301)

153. 믿긴 믿는 거냐?

툭.

저잣거리를 걷던 중 누군가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갔다.

엽강호가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여차하면 대부를 휘두를 태세였다.

그 바람에 어깨를 부딪쳤던 사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가던 길 가시오.”

엽강호는 오히려 본인이 더 멋쩍어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과민 반응하나? 어깨 좀 부딪친 걸로.”

“끄응. 단주는 이곳이 고향이지만, 내게는 가시밭길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엽강호가 툭 쏘듯 말했다.

적비연은 그저 웃어넘겼다.

사실 그의 심경을 이해 못 한 것은 아니다.

이곳은 장사의 저잣거리.

평생 사파의 영역에서만 살아왔던 엽강호와 한사다.

정도인들 사이에서는 사파의 영역이 지옥의 땅처럼 묘사되곤 한다.

숨 한 번 잘못 쉬면 목이 날아가는 곳이라고.

반면 사파 무인들 사이에서는 반대로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지만 뒤로는 칼을 갈면서 뒤통수 칠 궁리만 하는 곳이 바로 정파들이 사는 곳이라고.

과연 그런가?

아니다.

정사 무인의 모든 기억을 다 가진 적비연은 결국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정도인들은 명분을 좀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고, 사파 무인들은 실리를 더 내세우곤 한다.

딱 그 정도의 차이.

하지만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부르는 법.

오랜 기간 정사가 서로 왕래를 하지 않았던 만큼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만들어내며 혐오감만 높아간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보니 엽강호는 주변에서 칼 찬 사람만 보면 온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게다가 덩치는 또 얼마나 큰가?

이래저래 눈에 잘 띌 수밖에 없다.

엽강호가 적비연 곁으로 다가왔다.

“이왕이면 적 가주의 인피면구를 쓰시지 그랬소?”

“그랬다간 눈에 더 띌걸? 장사에서 날 아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사절단이 도착할 때까지는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좋겠지.”

“하긴. 그것도 그렇군.”

엽강호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조금 불안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적 가주가 틀림없죠?”

“아직도 못 믿는 거야? 그렇게 날 믿는다던 사람은 대체 어디 간 거야?”

“믿소! 믿긴 믿는데…… 허 참…….”

엽강호가 습관처럼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가문 사람들이 단주를 보고 달려들 수도 있지 않소? 단주가 가주라는 사실을 몰라보고 말이오.”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니 걱정 마.”

“그 천상원주라는 여자 말이오?”

“그래.”

“흐음. 하지만 우리가 사파라는 걸 알면…….”

“괜찮아. 내가 지켜줄 테니.”

“흠흠. 사실은 우릴 없애 버리려고 이렇게 끌고 가는 건 아니오?”

“글쎄, 너희들이 그 정도로 가치가 있나?”

“허어, 그 무슨 섭섭한 소리! 그래도 내가 작정하고 설쳐대면 꽤 감당하기 어려울 거요!”

“그래서 여기서 설쳐대 보려고?”

“그게 아니라…… 나는 단지 걱정이 돼서 그러지.”

“야, 너 나 믿는 것 맞긴 하냐?”

“거참, 믿는대도…… 단지 뭐 좀 걱정이…….”

“됐다. 넌 그럼 돌아가라. 한사만 데려가지, 뭐.”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알았소! 가면 될 것 아니오! 근데…… 시장한데 요기나 하고 갑시다.”

“집에 다 와간다. 진수성찬으로 차려줄 테니 조금만 참아.”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좀 할 겸…….”

결국 적비연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엽강호를 돌아보았다.

엽강호가 머쓱한 표정으로는 먼 산을 응시했다.

“뭐, 낯선 도시에 왔으니 구경도 할 겸…….”

“앞으로 넌 믿는다는 말 꺼내지도 마라. 정 불안하면 여기서 적당한 곳에서 먹고 와라. 천상원을 찾는다고 하면 누구나 알려줄 테니. 한사, 나하고 가자.”

“예, 주군.”

“아, 아니! 잠깐! 그럴 것까진 없잖소? 글쎄, 난 단주를 믿는다니까! 같이 가자고!”

엽강호가 성큼성큼 뛰면서 적비연을 쫓아갔다.

* * *

“음? 여긴……?”

적비연이 눈을 끔뻑이고는 높다란 전각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시오?”

나란히 선 엽강호가 전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없어졌어.”

“없어지다니?”

“천상원이 있던 자리인데…….”

“여기가 말이오?”

끄덕끄덕.

“어느 모로 보나 여긴 객잔인데?”

“그러네.”

적비연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졌다.

분명히 천상원이 있던 자리인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신 그곳에는 커다란 객잔이 생겼다.

엽강호가 이맛살을 슬쩍 구기며 돌아보았다.

“설마…… 우릴 속인 거요?”

“너 솔직히 말해봐. 나 믿는다는 건 거짓말이지?”

“그게 아니라…….”

“됐고. 아무래도 천상원이 이전한 모양이야.”

“이전이라니?”

“내가 떠날 적에 천상원을 좀 더 큰 규모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

“아…….”

결국 적비연은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한 끝에 새로 옮긴 천상원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꽤나 규모가 큰 장원이었다.

적비연은 문지기에게 다가가 원주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 문지기의 손에 돈까지 두둑하게 쥐어주었다.

문지기는 두말 않고 세 사람을 지객당으로 안내했다.

* * *

꿀꺽.

엽강호는 잔뜩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무인이 모두 열 명.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정파 무인에게 둘러싸여 본 적이 있던가?

차라리 인피면구를 쓸 걸 그랬나?

하지만 적비연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어차피 자신의 얼굴을 모를 거라고.

만약 여기서 싸움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자신은 여기 있는 열 명의 무인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까?

그들을 뚫는다고 해도 외벽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곳은 온갖 귀한 영약들이 보관되어 있는 천상원이다.

경계가 무척 삼엄할 것이다.

실제로 여기 있는 열 명의 무인들도 기도가 만만치 않다는 게 느껴진다.

문지기가 지객당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열 명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총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들어와서 원주에게 안내하겠다며 앞장섰다.

적비연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천상원을 장원으로 옮기면서 새로 뽑은 인물인 듯했다.

‘내가 날 위해 일하는 사람도 모르다니. 기분이 묘하군.’

원주실에 다다르자 총관으로 보이는 자가 고했다.

“원주님, 손님들 모셔왔습니다.”

“모시세요.”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문을 열고 총관이 들어섰다.

적비연의 뒤를 따라 실내로 들어서던 엽강호는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어찌 저런……!’

그의 눈길이 한 여인에게 머문 채 떠날 줄을 몰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바로 천상원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예린도 무척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은하란이 풍기는 미모는 또 달랐다.

뭔가 청초하면서도 단아하고 이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고나 할까?

은하란이 물러가도 좋다고 언질을 주자 총관이 열 명의 고수들을 이끌고 방을 빠져나갔다.

“오랜만이야.”

적비연이 툭 던진 인사에 은하란이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지 한 떨기 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 모습도 잘 어울리는군요.”

“놀리는 거지?”

“정말이에요.”

은하란은 적비연을 알아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마치 오늘쯤 적비연이 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한 말투였다.

적비연이 터벅터벅 걸어가서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몸에 좋은 약 좀 줘. 먼 길을 달려왔더니 피곤하네.”

“어떤 게 좋을까요? 천년하수오? 인형설삼? 아니면…… 자룡신초(紫龍神草)도 있어요. 아, 천라강혈초(天羅强穴草)를 달인 차가 좋겠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여기 두 분은?”

엽강호와 한사가 입을 척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자, 적비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같은 걸로 줘.”

“그러죠.”

은하란이 걸어가자 적비연이 불렀다.

“직접 하려고?”

“아시다시피 천라강혈초는 다루기 까다로운 약초라.”

“그럼 다른 것도 괜찮은데.”

“그럴 수야 있나요? 오랜만에 오신 가주님이신데. 다과로는 뭐가 좋을까요? 음…… 마침 말린 흑로과(黑露果)가 있을 테니 그게 좋겠군요. 혹시 흑로과가 없으면 아쉬운 대로 말린 천 년설삼을 가져올게요.”

“좋을 대로.”

“그럼.”

은하란이 예의 그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고도 엽강호와 한사는 한참이나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천라강혈초라니?

상태 좋은 천라강혈초를 그냥 복용하면 대략 이십 년 치의 내공을 흡수할 수도 있다.

한데 그걸 달여서 먹어?

도대체 얼마나 넘쳐나기에!

게다가 흑로과라니!

흑로과 역시 잘만 복용하면 일이십 년 치의 내공을 보강할 수 있는 영약이 아니던가?

거기에 뭐?

아쉬운 대로 말린 천년설삼이라고?

언제부터 천년설삼이 아쉬운 취급을 받았나?

여기가 무슨 영약 맛집도 아니고…….

마침 적비연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와서 앉아. 좀 쉬어.”

“아, 예.”

엽강호와 한사가 이끌리듯 탁자 옆으로 걸어갔다.

적비연 곁으로 다가선 엽강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율이 일었다.

강호일통을 운운할 때는 솔직히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를 따르겠다고 한 것은 그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무인으로서 산다는 건 칼끝에 목숨을 걸고 다닌다는 뜻 아니겠나?

이왕 그런 삶이라면 한바탕 신나게 모험을 즐기다가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별개였다.

그런데…….

’이런 재원을 가진 자라면!

정말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게다가 저런 미인에게 차 대접을 받는 자라면! 응? 이건 좀 다른가?

아무튼! 그렇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꿈같은 일이!

쿵!

엽강호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소리쳤다.

“이 엽 아무개가 단주를 주군으로 모시겠소!”

“이제 와서? 진작 모시기로 한 것 아니었어?”

“그, 그렇긴 하나 나 스스로 다시 한번 더 마음을 다지는 것이오!”

“그래, 알았으니까 자리에 앉아라. 우선 다과나 즐기면서 몸보신부터 하자.”

적비연의 말에 엽강호가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고맙소! 주군!”

적비연이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어째 말투나 하는 행동이 너랑 결이 비슷하다?’

-저런 애송이와 나를 비교하지 마라, 주인.

극마가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거렸다.

* * *

“그럼 가볼까?”

사예린이 투혈권왕과 혈조야귀를 돌아보았다.

백발 광인이 벌인 참사 때문에 뒤늦게 합류한 괴독자도 보였다.

혈조야귀가 입매를 틀어 올리며 답했다.

“이제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어야 할 때군요.”

“그래야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예린의 대답에 투혈권왕이 두 주먹을 쾅 부딪쳤다.

“갑시다! 본 련을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똑똑히 가르쳐줍시다.”

“패기가 넘치는 건 좋지만, 겉으로 보기에 우린 사절단일 뿐이야. 대놓고 그 패기를 드러내진 않도록 조심해.”

“알겠습니다. 사저.”

투혈권왕이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대답했다.

이제 그들은 사절단이라는 명분으로 금역으로 들어설 것이다.

비록 도중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져 병력을 잃었지만, 사예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백발 광인의 소동을 겪고 나서 흑천련 무인들은 더욱 단합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예린이 말 위에 오르며 말했다.

“벽력적가가 멸문하면 우리 권역에서 설치고 있을 적 가주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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