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폭풍전야
차분한 표정.
슬쩍 공력을 끌어올리고 투기를 드러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현재 적비연은 뿌리 깊게 박힌 삼나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갈대처럼 유연하고 종잡을 수 없는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격전 중에는 변화무쌍한데 대치 상태에서는 물속에 가라앉은 바위 같다.
같은 사람이 맞나?
스슥.
묵검은 천천히 오른발을 뒤로 뺐다.
가쁘게 들먹이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됐다.
벌써 비무를 한 지 반 시진이나 흘렀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 줄타기가 언젠간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왕이면 자신이 그 종결을 만들고 싶다.
물론 가주의 성취가 뛰어날수록 기쁠 일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우위이길 바라는 건 왜 그런가?
질투?
그런 하찮은 감정이 아니다.
단지 자신이 가주를 지키기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
적비연의 실력이 낮길 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실력이 더 높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도 아직은……!’
생각을 갈무리한 묵검이 바닥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쒸이이잇!
바람을 가르면서 한 줄기 빛이 적비연의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빛은 허공을 찢으며 적의 심장을 뚫는다.
적비연이 적은 아니지만 적이라고 생각하며 돌진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놀랐다.
언제 이렇게 진심을 다했던가?
늘 적비연과 대련할 때는 한 수 접어주었다.
아슬아슬한 수준을 일부러 유지하느라 애썼다.
한데 지금은 아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니, 저절로 아슬아슬한 격차가 된다.
아니, 오히려 적비연이 한 수 접어주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쉬따앙!
불꽃과 함께 검신이 튕겼다.
파바밧!
적비연이 갈지자(之)로 번쩍이면서 파고든다.
쒸에에엑!
“헛!”
묵검이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키며 허리를 젖혔다.
쒸아아앙!
툭, 투둑!
예리한 검기가 앞섶을 스치며 옷고름을 잘라 내버렸다.
풀썩!
휘리리릭!
앞섶이 찢어진 묵검이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면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촤아아악!
미끄러지듯 멈춰 선 묵검.
펄럭이며 풀어헤쳐진 상의 사이로 탄탄한 가슴과 복근이 드러난다.
적비연은 여유를 두지 않고 매섭게 몰아붙였다.
쒸이이이잉!
허공을 할퀴듯 날아드는 일검!
탓!
묵검이 오른발에 중심을 실으며 검을 올려쳤다.
그 순간!
‘헛?’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던 적비연의 검이 일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찰나에 지나지 않은 순간이지만 묵검의 머릿속이 빠르게 반응했다.
허초? 변초? 그도 아니면……?
본능적인 반응은 그의 검을 멈칫하게 만들었고, 그사이 적비연의 검이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쒸이이잉!
사각!
그대로 허공을 가르며 올려친 묵검의 검.
그리고 그대로 바닥으로 향한 적비연의 검.
묵검의 검은 허공을 벴다.
하면 적비연은?
허공이 아니다.
소매가 찢어져 풀럭이고 있다.
만약 조금만 더 깊게 베어왔다면?
떨어져 나간 것은 옷자락이 아니라 묵검의 손목이 되었으리라.
간담이 서늘하다.
언제 이렇게까지 실력이 늘었나?
휘리릭!
묵검이 몸을 회전하며 검을 횡으로 베어갔다.
적비연의 검이 수직으로 솟구쳐 오른다.
따앙! 땅!
솟구쳐 오른 검은 그대로 떨어져 내린다.
하나의 산을 만들고 다시 솟구쳐 오르는 검기!
쉬이이잇, 따앙!
“큿!”
이번만큼은 묵검도 견디지 못하고 튕기듯 날아갔다.
파바밧!
경공을 펼쳐서 허공에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묵검은 다시금 떨어져 내리는 적비연의 검기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쩌엉!
콰당!
묵검이 바닥에 곤두박질치듯 떨어졌다.
단교잔설에 이은 쌍봉삽운의 검초였다.
“크읏!”
신음을 삼킨 묵검이 재빨리 몸을 회전하며 검을 대각선으로 올려쳤다.
하지만 적비연이 조금 더 빨랐다.
쒸이이이잉!
세상을 절반으로 가르는 검기다.
한 줄기 빛이 수평선을 그리자 묵검은 자신의 몸이 절단되는 착각마저 들었다.
까앙! 휘리리릭!
청명한 금속성에 이어 묵검의 검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푹!
후원 한쪽의 나무기둥에 틀어박힌 검은 한참이나 휘청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척!
세상을 절반으로 갈랐던 검신이 어느새 묵검의 목 언저리에 와닿았다.
평호추월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꿀꺽.
애초에 살기는 없었다.
그럼에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묵검이 피식 웃어 버렸다.
“졌습니다. 정말이지 다른 사람이 되셨군요.”
묵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공 수위만 따진다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나 검로 하나하나에 경험을 실은 노회함이 묻어난다.
마치 수많은 전투를 치러본 전사 같다.
그럴 수밖에.
적비연은 이미 수많은 무인들의 기억을 흡수했으니.
적비연이 씨익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역시 묵검은 대단한 고수였어. 이번에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찬이십니다. 가주님이 손속에 사정을 두시는 바람에 이만큼이라도 버텼지요.”
묵검이 씁쓸한 웃음을 그리며 일어났다.
적비연이 장난치듯 물었다.
“나한테 져서 분한 표정이네.”
“분합니다. 가주님을 지켜 드리기 위해서는 제가 더 강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괜찮아. 나의 한 방을 위해서 묵검이 목숨을 던지면 되니까.”
“기꺼이 이 한 목숨 던지죠.”
“음? 농으로 한 얘기에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하면 나만 나쁜 놈 되는 것 같은데.”
묵검이 순간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단휘와 예홍은 사절단과 함께 있겠군요.”
“그렇게 됐어.”
“오늘 오후쯤 무림맹 총군사가 본 가에 도착할 겁니다. 가주님이 돌아오셨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잘했어. 아는 사람이 많아져 봐야 차질이 생길 가능성만 늘어날 뿐이니까.”
“하천웅의 전서가 조금만 빨리 맹에 전달되었어도 혈조야귀가 탈출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사실 조금 의아한 부분도 있고.”
“무슨 말씀이신지?”
“교패는 가후를 굉장히 경계했거든. 그런데 그에 비해 가후가 너무 쉽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 혈조야귀가 그만큼 뛰어난 자일 수도 있겠지만.”
“하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실하진 않아. 때가 되면 확실해지겠지. 그럼 슬슬 준비해. 곧 사파에서 온 불청객들이 들이닥칠 테니까.”
“알겠습니다.”
“참, 우 총관은 잘 지내고 있나?”
“가장에서 잡일을 맡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사활침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럼 총관 자리가 공석인가?”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천상원주가 워낙 일을 잘하고 있어서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다행이군. 집안일은 묵검만 믿고 맡길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음?”
“천상원주는 이제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적비연이 침음을 흘리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잖아도 그 이야기를 할까도 생각했다.
처음에는 천상원주 은하란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심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적비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 문제는 묵검에게 맡기지.”
묵검이 생각하기에 정말 믿을 만하다면 사활침을 풀어줘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묵검이 쓴웃음을 머금고는 답했다.
“그럼 절대 사활침을 풀면 안 되겠군요.”
“왜?”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배신을 한다면…… 제가 견딜 수 없을 테니까요.”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묵검의 이런 점 때문에 그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것이다.
적비연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누가 적아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건 이 강호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거야.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어.”
* * *
마차가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무림맹 총군사 가후였다.
당금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탄 마차라기에는 무척 검소해 보이는 외형에 수행원도 마흔 명 정도에 불과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벽력적가에서 임시 총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묵검이라고 합니다.”
묵검이 가후에게 다가가 포권하며 인사했다.
가후가 마주 포권하며 답례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사에는 정말 오랜만에 와보는군요.”
“이런 일로 모시게 되어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다 본 군사가 모자란 탓이지요.”
“그럴 리가요. 만검세가주의 전서가 조금만 일찍 도착했어도 맹에 잡힌 자가 교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이제 와서는 증거도 없으니 그 사실을 부추긴다고 해도 교패는 모른 척할 겁니다. 애초에 이번 사절단으로 오는 자도 교패가 아니라 그 혈조야귀일 가능성이 크고요.”
“흑천련 사절단이 어떤 요구를 해올까요?”
“글쎄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생각이라면…… 아마도 내 신변을 요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하면 총군사께서는 복안이 있으십니까?”
가후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일단 지켜볼 생각입니다.”
말과는 달리 가후는 시종 차분한 표정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과연 가주님 말씀대로인가?’
가후가 묵검의 생각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만검세가주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적 가주님의 도움 덕분이라지요?”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과연 본 맹이 적 가주께 큰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별말씀을. 맹이 건재해야 작금의 무림평화도 유지되지 않겠습니까? 가주님도 같은 생각이셨을 겁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편히 쉬고 계시면 사절단을 맞이할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그럼.”
가후가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벽력적가의 수뇌인사들이 대부분 안마당까지 나와 그를 맞이해주었다.
마침 그의 시선이 한쪽에 선 여인에게 머물렀다.
“아……!”
여인을 본 가후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나라가 위태로울 정도의 미모란 저런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맑고 투명한 피부에 깊고 그윽한 눈동자,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가후를 보고 있었다.
가후의 시선을 눈치챈 묵검이 그녀를 소개했다.
“본 가에서 천상원을 담당하는 분이십니다.”
“아, 그대가 천상원주…….”
가후의 말끝에 은하란이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건넸다.
“인사드립니다. 천상원주, 은하란입니다.”
“반, 반갑소. 무림맹 총군사 가후라고 하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가 끝난 후에도 가후는 한참이나 여인을 바라보다가 겨우 걸음을 옮겼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런데…….’
가후가 잠깐 멈칫거리고는 은하란을 돌아보았다.
“혹시…… 우리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소?”
“저는 총군사님을 이 자리에서 처음 뵙습니다.”
“하긴…….”
본 적이 있을 리가.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 적이 있다면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한데 왠지 모르게 낯이 익는 기분.
꿈에나 그리는 미모여서 그럴까?
가후가 자조 섞인 웃음을 피식 흘렸다.
불혹을 넘긴 지가 오래전이다.
더 이상은 여인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 여겼거늘.
‘수양이 한참 부족하구나.’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지객당으로 들어갔다.
한편 그런 가후를 전각 지붕 위에서 가만히 보는 자가 있었다.
“가서 인사라도 나눠야 하는 것 아니오?”
엽강호가 옆에 선 적비연에게 물었다.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여러 사람에게 얼굴을 비춰봐야 말만 새어 나갈 가능성이 높아. 아직은 얌전히 있어야지. 너희들도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알겠소.”
“명심하겠습니다.”
엽강호와 한사가 동시에 답했다.
적비연이 먼발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조만간 사절단이 도착하면…….”
휘이이잉.
바람이 적비연을 스치고는 날아갔다.
마침 지객당 창가에 선 가후에게 바람이 머물렀다.
그리고 적비연이 내뱉은 말을 마저 잇듯이 가후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렸다.
“그들이 곧 도착하면…… 한차례 혈겁이 일어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