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폭풍전야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장사의 저잣거리.
한데 오늘은 대로에 몰려든 사람들이 물갈래처럼 갈라지면서 양쪽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인파의 물살을 가르듯 그 가운데로 행진하는 사람들.
바로 흑천련의 사절단이었다.
뿔이 난 철갑 투구를 쓴 말, 흑천련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 교패를 수행하는 고수들이 내뿜는 사기!
정말이지 ‘내가 바로 사파다!’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은 행렬.
자연히 그런 흑천련 무인들을 곱게 보는 자들은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파의 영역이었던 장사였기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조차 사파 무인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이 무식이 용감이라고, 무공 한 줌 배우지 않은 자들이 객기를 부리며 사고를 치는 경우도 빠지지 않았다.
“이 사파 나부랭이들아! 썩 꺼져라! 네놈들이 무슨 염치로 여기 나타난 것이냐!”
“재미 삼아 사람이나 죽이는 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제 발로 걸어 다녀!”
“천하에 버러지 같은 것들!”
누군가 외친 소리에 이어 욕설이 마구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평소 장사 저잣거리를 거닐면서 거들먹거리던 파락호 세 명이 있었다.
제아무리 천지분간 못 하는 파락호들이라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일단 이곳이 정파의 한복판인 장사라는 점.
그리고 흑천련 무인들이 공식 사절단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현재 주변에는 흑천련의 사절단을 직접 보기 위해 모여든 정파 고수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이들을 믿고 괜히 강한 척 객기를 부린 것이다.
만약 딱 거기까지만 하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의 객기는 나름 용기로 포장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파락호들이 괜히 파락호라고 불릴까?
셋 중 하나가 분위기에 휩쓸려 흥분을 참지 못하고 돌멩이를 주워 던졌다.
휙!
이를 본 단휘가 눈을 크게 떴다.
‘저 멍청한……!’
마침 교패의 호위 역할을 맡은 투혈권왕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뻗어 돌멩이를 낚아챘다.
탁.
순간 정적이 흘렀다.
꿀꺽.
괜히 긴장한 단휘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투혈권왕을 보았다.
그나마 혈조야귀나 사예린이 나서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하지만 투혈권왕도 사파에서 잔뼈가 굵은 초고수.
그가 마음먹는다면 이런 곳에서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투혈권왕이 말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춤 물러났다.
인피면구를 쓴 투혈권왕이 눈을 번뜩였다.
“누구냐?”
중저음의 목소리가 깔리자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서로를 보았다.
아무리 이곳이 정파 영역이지만 눈앞에 사파의 고수를 두고 있으니 절로 주눅이 들 수밖에.
투혈권왕이 가소로운 듯 웃었다.
“객기를 부렸으면 책임도 져야 하지 않을까?”
“…….”
“어쩔 수 없군.”
투혈권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단휘가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냥 무시할 생각인가 보군.’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투혈권왕의 입에서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어찌 다뤄야 하는지 알고 있지.”
말을 마친 투혈권왕이 망설임 없이 손을 뻗더니 키가 허리춤에도 오지 않을 여아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에구머니!”
“헉, 이, 이보시오!”
졸지에 머리가 잡혀 들린 여아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투혈권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묻지. 누가 던졌나? 대답이 없다면 나는 이 아이를 던지도록 하지.”
그야말로 감정이라고는 일 푼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괜히 겁박하는 말이 아니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때 누군가 파락호 중 한 명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이잡니다. 이자가 돌을 던졌습니다.”
“이, 이봐! 내가 언제?”
“내가 다 봤어! 당신이 던졌잖아!”
“이 사람이 왜 생사람을 잡고 난리야!”
“나도 봤어! 너희 세 사람이 욕을 하고 돌을 던졌잖아! 죄 없는 아이를 죽일 셈이냐!”
“이, 이런 젠장!”
당황한 파락호들이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러는 사이 투혈권왕이 아이를 내려두고는 파락호들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객기와 용기를 구분도 할 줄 모르는 것들이 설쳤구나.”
순간 투혈권왕의 전신에서 살기가 우러나왔다.
“헉!”
세 사람은 보이지 않는 사슬에 꽁꽁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마치 맹수 앞에서 공포에 질린 채 꿈쩍 못하는 먹잇감이 된 것처럼.
파락호 중 한 명이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쥐어짰다.
“여, 여긴 정파의 영역이오.”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만, 만약 우리를 해하면…….”
“잘난 무림맹이 너희 목숨을 대신해서 복수라도 해줄 것 같나? 아니, 오히려 그렇다면 바라는 바일지도.”
“그, 그 무슨……!”
이제 파락호 세 명의 안색은 새파랗다 못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교패 역할을 맡은 혈조야귀가 돌아보며 말했다.
“그만 가지.”
말은 혈조야귀가 했지만 아마도 사예린이 전음으로 이른 것이리라.
투혈권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섰다.
“운이 좋군. 아, 그런데 이건 돌려줘야겠지.”
“무슨……?”
다음 순간 투혈권왕의 손가락에서 돌멩이가 튕겼다.
팡!
쒸에에엑!
찰나지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돌멩이를 던졌던 파락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돌멩이가 그의 머리를 적중하기 직전!
타아아앙!
느닷없이 날아든 검 한 자루가 돌멩이를 막아낸 것이 아닌가?
푸스스스……!
돌멩이가 부서지면서 가루가 산산이 흩어졌다.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 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만, 만검세가주다!”
“오오! 진짜다! 역시 만검세가주님이시다!”
사람들이 저마다 술렁이며 떠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말대로 검을 들어 막은 자는 다름 아닌 만검세가주 하천웅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 파락호는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이건 좀 지나치지 않소?”
하천웅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치자, 투혈권왕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뿐만 아니라 사예린과 혈조야귀를 비롯한 흑천련 무인 다수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째서 하천웅이 이곳에……!’
그들로서는 하천웅이 행방불명된 줄로만 알았다.
한데 언제 장사까지 돌아왔단 말인가?
그나마 인피면구를 썼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투혈권왕과 사예린은 호신위가 아니라는 게 들켰으리라.
‘그래도 각별히 조심해야겠어!’
한데 어째 좀 분위기가 다르다.
말투나 음정이 좀 낯설다.
일전에 본 하천웅은 어딘지 무게감이 있었다면, 오늘 본 하천웅은 다소 가볍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투혈권왕이 대충 둘러댔다.
“흥분하실 것 없소. 어차피 돌멩이는 이마에 부딪치자마자 부서졌을 거요.”
한마디로 이미 손을 써두어서 사람이 죽을 정도의 충격은 받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하기야 사절단으로 방문한 입장에서 제아무리 사파라도 살인을 저지르기는 어려우리라.
문제는 그게 아니다.
투혈권왕이 다시금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데 잘도 모습을 드러내셨군. 본 련에 사절단으로 왔다가 다시 첩자로 잠입하려고 했던 주제에.”
“응? 내가 그랬소? 아, 맞다. 그랬다고 했지. 그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사과드리겠소.”
투혈권왕은 물론 흑천련 무인들이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라는 거야? 사절단이 자기 때문에 온 거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건가? 사과드리겠다니?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이 문제가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없이 가벼워 나풀나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무게감이라니.
정말 이자가 사절단으로 찾아왔던 그 하천웅이 맞나?
문제는 그 가벼움이 하천웅에게만 머물지 않고 묘하게 전염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랄까?
다 함께 낮아지는 수준이랄까?
하천웅이 한 술 더 떴다.
“참! 적 가장으로 가는 길이지요? 마침 나도 그곳으로 가고 있었소. 사절단이 온다기에. 뭐 이렇게 만났으니, 어차피 가는 길인데 함께 갑시다.”
투혈권왕의 눈썹이 마구 꿈틀댔다.
이건 뭐 품위도 없고, 개념도 없는 것 같으니…….
’슬쩍 돌아보니 사예린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런 놈과 같이 가면 사절단의 권위마저 깎인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 내용의 눈빛이 강렬하게 이글거렸다.
투혈권왕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젓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됐소. 본 사절단은 따로 가도록 하지.”
“에이, 그러지 말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갑시다!”
“따로 가겠다고 하지 않소?”
“거참, 지난 일은 미안하게 됐다니까. 거 이왕 사절단으로 왔으니 좋게, 좋게 말로 풀어봅시다.”
“이 사람이 진짜……!”
투혈권왕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하천웅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하천웅은 마냥 해맑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다르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하 대협, 정말 멋지지 않아? 저런 식으로 사절단의 경계를 무너뜨릴 줄이야. 정말 예측불허인 남자야.]
흑천련 무인으로 위장한 임송화가 예홍에게 보내는 전음이었다.
예홍이 피식 웃었다.
[저 멍청이가 그리 좋으면 혼인이라도 하지 그래?]
[어머. 너 하 대협 좋아하는 것 아니었어?]
[차라리 자결을 하겠어.]
[그럼…… 내가 하 대협과 잘해봐도 되는 거야?]
[부디. 기꺼이. 제발.]
[두말 않기다!]
[두말하면 내 혀를 뽑아서 저 멍청한 녀석에게 선물해도 좋아.]
[으윽.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좋아.]
임송화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하천웅의 뒷모습을 보았다.
‘당신은 어쩜 그리 헤벌쭉 웃는 모습도 매력적인가요?’
한편 단휘는 다른 내용의 전음을 예홍에게 보냈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네.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가주님이 어딘가에서 우릴 보고 계실지도 모르겠어.]
[꿈 깨.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야, 너 자꾸 멀쩡한 분 죽일래?]
[사실은 사실이야. 내일도 내 자결을 말리면 널 죽이고 나도 죽는다.]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까 적어도 내일까지는 자결이니 뭐니 나대지나 마라.]
[흥!]
예홍이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단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주님. 지금쯤 정말 어딘가에서 우리 지켜보는 거죠? 가능한 내일까지는 나타나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 이 녀석하고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고요.’
저마다의 생각을 담은 사절단은 그렇게 벽력적가로 향하고 있었다.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상원으로 쓰였던 전각.
이제는 객잔으로 변한 그곳 삼 층 창가에서 적비연이 묵묵히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로를 가로지르며 벽력적가로 향하는 사절단 행렬은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하천웅의 등장으로 그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지긴 했다.
“저자의 무위가 주군 수준이라는 게 영 믿기지 않는데.”
“확실히 수위만 따지면 나와 비슷해.”
적비연의 대답에 말을 꺼낸 엽강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적비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공은 수위만으로 승부를 짓는 게 아니지. 숱한 경험을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까.”
“하긴. 그나저나 하천웅을 투입한 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소. 입단속까지 확실히 해두었으니 별 탈은 없을 것 같군.”
“날 은인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써먹으려고 살려준 것이기도 하고.”
“확실히 가끔 보면 주군은 정파가 아니라 우리 사파 쪽 같다니까.”
“내 기억에는 다 섞여 있거든.”
적비연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지금껏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던 한사가 입을 열었다.
“하면 혈조야귀를 치는 건 오늘 밤입니까?”
“그래. 내가 찾아올 때까지 너희들은 여기서 대기한다.”
“혈조야귀가 죽으면 흑천련은 전면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요. 일이 커질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하면 그에 대한 대비책도?”
“아니. 그건 네 말대로 어디까지나 혈조야귀가 죽었을 때의 이야기지.”
“……?”
“혈조야귀가 사라지면 이야기가 달라져.”
“아……!”
“시체라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되는 거다. 그땐 흑천련 사절단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거야. 혈조야귀가 제 발로 사라졌는데 어쩌겠나?”
그러자 엽강호가 나섰다.
“과연. 하지만 혈조야귀 정도의 고수를 납치하거나 암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요. 아무리 주군이 강하다고 해도.”
“강호일통이 그럼 쉬울 줄 알았어?”
“……허허, 하하하하!”
한참이나 웃어젖힌 엽강호가 씨익 입매를 틀어 올렸다.
“역시 주군과 함께 있으면 심심할 여가가 없다니까. 좋소! 오늘 밤, 혈조야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