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폭풍전야
산해진미가 상 위에 잔뜩 차려져 있었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감미로운 선율이 내원에 떠돌았고, 벽력적가의 수뇌부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자기네들끼리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예린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적어도 무림맹 사절단이 찾아왔을 때처럼 딱딱한 분위기가 연출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칼부림이라도 일어나던지.
한데 이건 뭐…….
‘시작부터 허를 찌르겠다는 속셈인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과연 가후다.
교 선생이 그를 왜 그리 경계했는지 알 만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상대에게 적응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속셈이리라.
마침 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이 자리는 먼 길을 달려와 주신 교 선생을 위한 자리입니다. 이렇게 다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아냥거림도 없다.
정말 느낀 바를 말하는 것만 같다.
‘정말 파악하기 어려운 자군.’
사예린이 차갑게 웃으며 가후를 보았다.
한편 교 선생 역할을 맡은 혈조야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이리도 환대를 해주실 줄은 몰랐소. 가 군사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별말씀을요. 진작 이렇게 대접해 드렸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섭섭지 않게 대접해 드렸다면 다행이지요.”
가후가 혈조야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에는 ‘너는 진짜 교패인가?’ 하고 질문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혈조야귀가 모른 척 대꾸했다.
“일전에도 섭섭지 않게 대해주셨소.”
“한데 왜 그리 급히 떠나신 건지요? 기별도 주시지 않고.”
“정 궁금하시오?”
혈조야귀의 눈빛이 깊어졌다.
두 사람의 대화가 진지하게 접어들자 주변의 왁자한 분위기도 차츰 잦아들었다.
특히 벽력적가의 수뇌인사들은 언제 술판을 벌였느냐는 듯 진중한 표정이 되어서는 두 사람을 응시했다.
여차하면 칼부림이 일어나더라도 곧장 대응을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를 지켜본 사예린이 내심 웃었다.
‘과연. 앞서 떠들썩한 분위기는 결국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 목적이었나? 제법 하는 짓이 귀엽네.’
가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교 선생과 꽤나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한마디 말씀도 없이 떠나시니 섭섭했습니다.”
“섭섭한 걸로 따지면 오히려 이쪽이 아닐지.”
말을 마친 혈조야귀가 괴독자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괴독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무상자를 들고 가후가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대략 이 장 이내로 접근하자 시커먼 그림자가 뚝 떨어져 내렸다.
스슥!
소리 없이 귀신처럼 나타난 무인들이 칼을 내밀고는 앞을 막아섰다.
가후의 호신위들이었다.
괴독자가 코웃음을 치고는 두 호신위를 노려보았다.
마침 가후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물러나게.”
잠깐 멈칫한 호신위들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탁자 앞에까지 다다른 괴독자가 나무상자의 덮개를 열더니 그 안에서 뭔가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순간 벽력적가의 수뇌인사들이 저마다 헛바람을 삼키며 인상을 찡그렸다.
“헉!”
“저, 저런……!”
괴독자의 손에 들린 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특수한 약품으로 처리가 된 것인지 부패 정도가 아주 심하진 않았지만, 특유의 악취가 장내에 가득 풍겼다.
가후가 미간을 찡그리고는 괴독자를 보았다.
“이게 뭐요?”
“가 군사께서 더 잘 아시지 않소?”
괴독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마침 찢어진 입매를 비집으면서 거머리 같은 벌레가 기어 나오더니 귓구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정말이지 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망측한 모습이었다.
가후가 대답 대신 혈조야귀에게 시선을 던졌다.
혈조야귀가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그자는 항주에서 첩자 노릇을 하다가 발각된 자요.”
일전에 적비연과 접선했던 그자였다.
가후가 모른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를 떼실 생각이오? 저기 있는 하 가주가 사절단으로 왔다가 돌아간 후, 다시 본 련에 잠입을 시도하려다가 걸렸소. 그때 본 련의 무인들 다수가 목숨을 잃었소. 가 군사께서는 이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할 거요.”
혈조야귀의 시선이 하천웅에게 향했다.
“흐음.”
가후가 침음을 흘리더니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하 가주님은 보시다시피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까? 설마 하 가주님이 귀 련에 첩자로 잠입하다가 발각되었고, 그 바람에 귀 련의 무인들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다는 말씀이신지?”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 내용은 노골적인 무시였다.
흑천련 입장에서는 인정하자니 바보가 되는 꼴이고, 부정하자니 책임을 따지기가 애매했다.
혈조야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 군사는 날 우습게 보는구려.”
“그럴 리가요. 언제나 교 선생의 혜지를 높이 사고 있습니다.”
“괴 당주. 들어오시게.”
혈조야귀가 말하자 괴독자가 가후를 빤히 노려보다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푸스스스……!
놀랍게도 그의 손에 들린 머리가 순식간에 시커멓게 부패하면서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게 아닌가?
시독(屍毒)을 흡수한 괴독자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리고는 걸어갔다.
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해가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하나 아직 풀리지 않은 오해도 있소.”
“무엇인지요?”
“벽력적가주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건…….”
“가 군사가 알 리 없을 거요. 그는 지금 본 련의 권역을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까.”
“흐음. 그런 소문은 들었습니다. 하나 그게 어떻다는 것인지요?”
“뭐요?”
“두 다리가 있는 이상 어디든 다니는 건 그 사람의 자유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소. 하지만 이런 건 어떻소? 저기 있는 하 가주가 본 련의 첩자로 잠입하다가 들켰을 때, 그를 구한 게 바로 적 가주였다면?”
“억측이십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증거라…….”
“그렇습니다. 아까부터 교 선생께서는 계속 추측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주장하고 계시지요. 사실 저로서는 귀 사절단이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한 건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좋소. 하면 증거를 보여 드리지.”
혈조야귀의 말에 가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혈조야귀가 사예린을 향해 눈짓을 했다.
이에 사예린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 투혈권왕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서는 사예린과 혈조야귀를 번갈아보았다.
여기까지는 사전에 이야기가 되지 않은 행동이었다.
[사저, 증거라는 게 있습…….]
전음을 보내던 투혈권왕은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사예린과 그녀의 수하들이 갑자기 검을 뽑아 들더니 자신의 수신위 두 명에게 검봉을 겨누는 것이 아닌가?
차차차앙!
그 두 사람은 바로 단휘와 예홍이었다.
깜짝 놀란 투혈권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저! 이게 무슨……!]
[가만있어. 사제.]
[설명해 주십시오! 제 수신위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 이러는지는 두고 보면 알 거야. 방해하면 사제라도 가만 안 둘 테니.]
[사저!]
[말했지? 난 내 육감을 믿는다고. 반 호법장에 대해서는 판단 유보였지만, 아직 내게 찜찜함을 안긴 두 사람이 더 있었거든.]
한편 단휘와 예홍도 당황한 표정으로 사예린을 보았다.
“이, 이게 무슨…….”
“닥쳐.”
사예린이 싸늘하게 말하고는 턱짓을 하자, 수하들이 두 사람을 내원 복판으로 몰아갔다.
이쯤 되자 벽력적가의 수뇌인사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서 눈을 휘둥그레 뜰 뿐이었다.
가후도 눈을 가늘게 뜨고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벗겨봐.”
사예린의 명령에 수하들이 단휘와 예홍에게 다가가더니 목 언저리를 더듬어서 살결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헉!”
“엇!”
투혈권왕은 물론 장내의 모든 무인들이 경악하며 두 사람을 보았다.
특히 벽력적가 무인들은 단휘와 예홍을 이렇게 만날 줄 꿈에도 몰랐던지라 더욱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눈치챘기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가후 역시 마찬가지.
‘저들은……?’
벽력적가에서 파견된 특임대원들이 아닌가?
정체가 발각됐단 말인가?
그런데…….
‘혈조야귀도 놀란 눈치군.’
그랬다.
우습게도 지금 이 상황을 주도한 혈조야귀조차도 놀란 눈치였다.
물론 아주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관찰력이 뛰어난 가후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하면 역시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은 저 여인인가?
가후의 시선이 인피면구를 쓴 사예린에게 향했다.
사예린이 입매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증거입니다. 이 두 사람을 모르시는지요?”
“모르겠소.”
가후가 딱 잡아떼자 사예린은 마치 그러길 바랐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무척이나 화사하면서도 섬뜩해 보였다.
“그렇군요. 그럼 이 자리에서 이 불순한 자들을 바로 죽여 버려도 괜찮은 거지요?”
그러자 이번엔 벽력적가의 수뇌인사들이 벌떡 일어났다.
“뭐, 뭣이!”
“어찌 그런 짓을!”
반사적으로 나섰던 자들이 실수를 깨닫고는 곧 헛기침을 했다.
단휘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고, 예홍은 아까부터 저주에 가까운 부정적인 말을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예린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안 될 것 있나요? 어차피 우리끼리 처리할 문제인데.”
그러자 지켜만 보던 묵검이 나섰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건 그쪽 속사정인 것 같소. 굳이 본 가에서 얼굴 붉힐 만한 일을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소만.”
“아, 여기서 목을 썰어 버리면 마당이 좀 더러워지려나?”
사예린은 일부러 자극적인 말만 골라서 했다.
이쯤 되자 벽력적가의 수뇌인사들도 술렁거리며 정신없이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까딱하다간 벽력적가의 인재 두 명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지켜만 봐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가후가 저리도 모르쇠로 일관하니 어찌 나설 수도 없는 상황.
그러는 사이 사예린이 혈조야귀를 돌아보았다.
“어쩌죠? 역시 깔끔하게 처리할까요?”
교패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물었지만, 사실은 답을 정해놓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혈조야귀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예린이 싱긋 웃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럼 시체는 깨끗하게 치워 드리도록 하죠.”
그녀가 든 검이 떨어지려는 순간.
“멈추시오.”
나직하지만 공력이 담긴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박혀들었다.
일순 장내의 무인들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원 문을 통해서 뚜벅뚜벅 들어오는 한 사람.
바로 적비연이었다.
“가, 가주님이!”
“가주님이 오셨다!”
벽력적가의 무인들은 물론, 가후와 흑천련 무인들도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적 가주……?”
“적 가주가 어떻게……?”
사예린이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데,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인사를 건넸다.
“늦어서 미안하오. 나, 벽력가주 적비연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