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57화 (158/301)

157. 폭풍전야

사예린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어떻게……?

말이 안 된다.

분명 적 가주는 사파 영역에서 돌아다니고 있지 않았던가?

한데 이렇게 기막힌 순간에 나타난다고?

마치 자신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봐 온 것처럼?

그럴 수가 있나?

없다.

자신들이 이곳으로 온다는 것은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다.

물론 사절단이라는 명목으로 공식 방문이긴 했지만, 이 사실을 공표한 것도 불과 며칠 전이다.

거의 출발과 동시에 알렸으니까.

그런데 적 가주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혹시 정보가 잘못된 건가?

사예린의 시선이 혈조야귀에게 향했다.

뭔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는 눈빛이다.

하지만 혈조야귀라고 알 리가 없다.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예린은 적비연을 빤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이곳의 주인이 나타났군요.”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늦었소. 한데 내 집에서 망측한 짓을 벌이려고 하는군.”

“어질러진 마당은 깔끔하게 치워 드리죠.”

“불가.”

적비연이 단호하게 대꾸하자 사예린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불가라. 어째서? 혹 가주께선 이 두 사람을 알고 있는 건지?”

적비연이 사예린의 두 눈을 빤히 응시했다.

‘확실히 이 여자, 정말 무섭네.’

-그래, 정말 지긋지긋한 년이다. 저 여자야말로 거머리다.

옆에서 부유하고 있는 극마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적비연은 이런 식으로 나설 생각이 없었다.

한데 몰래 지켜보던 중 사예린이 대뜸 단휘와 예홍을 끌고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여기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확실히 미친년이야.

극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뭐랄까?

종잡을 수 없는 제멋대로인 성격인데 칼 같은 예리함을 지녔달까?

겉으로 보기에는 대충대충 감각만 믿고 쉽게 말을 뱉는 것 같은데, 그녀가 몰고 가는 상황을 보면 치밀하기 짝이 없다.

적비연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답했다.

“알고 있소.”

그러자 장내 무인들이 술렁이며 적비연과 사예린을 번갈아 보았다.

가후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그 역시 적비연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사예린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다시 물었다.

“이자들을 알고 있다고요?”

“그렇소.”

“어떻게 알고 있죠? 이들이 누구죠?”

순간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 숨을 죽이고는 적비연의 대답만 기다렸다.

마침내 적비연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이자들은 내 수하요.”

“적 가주!”

가후가 깜짝 놀라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묵검 역시 적비연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기에 흠칫거리고는 보았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 사실을 이실직고한단 말인가?

이래서야 흑천련에게 빌미를 주는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적비연은 손을 들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들은 내 수하요. 더 궁금한 것이 있소?”

사예린은 멍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이건 뭐지?

그녀 역시 적비연이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이들이 적 가장의 무인이라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애초에 이자들을 끌고 나와 목을 베려고 했을 때는 단순히 미심쩍은 첩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저 무림맹에서 심어놓은 자들이 아닐까 짐작만 했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에 혈조야귀와 대충 말을 맞췄다.

만약 무림맹 측에서 증거를 대라고 하면 자신에게 일단 맡겨달라고.

복안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그저 ‘육감’이라고만 대답했다.

한데 이들이 적 가장의 무인이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도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사예린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확실히 무림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눈앞에서 첩자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정체까지 밝혀냈으니, 총군사 가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리라.

하지만 뭔지 모를 찝찝함.

왜?

왜 이런 사실들을 순순히 밝히는 거지?

단순히 자신의 수하들을 살리려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갑자기 나타난 벽력적가주도 미심쩍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매끄럽지 못한 흐름.

정말이지 그녀가 딱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사예린이 차갑게 웃으며 가후를 돌아보았다.

“이런.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군요. 이 상황에 대해서 가 군사께서는 어찌 해명하고 싶으신지?”

가후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이제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나?

그때 적비연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가 군사께서는 이들에 대해 모를 것이오.”

“모른다?”

사예린이 미간을 좁히고는 되묻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 첩자를 심어놓은 당사자가 모르면 대체 누가…….”

“가 군사께서 하신 일이 아니니까.”

“뭣이?”

“내가 한 일이오.”

“그런……!”

“무림맹과 상관없이 내가 독단적으로 지시한 일이오.”

사예린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계속해서 상황이 꼬이고 있다.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마침내 혈조야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적 가주. 말씀을 잘 가려야 할 거요. 자칫 맹에 대한 충성심이 지나치다 보면 패가망신하는 수가 있소.”

“내가 저지른 일을 어찌 맹에 덮어씌울 수 있겠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뿐이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보태자면…….”

적비연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서 식사하고 있는 하천웅을 보았다.

기억을 잃은 하천웅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관심도 없는 듯 연신 음식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기 있는 만검세가주를 다시 흑천련으로 돌려보낸 것도 나였소. 그리고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주고 본 가로 돌려보낸 것 역시 나요.”

그야말로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사예린이 뺨을 씰룩였다.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잘도 얘기하는군요. 그런 얘기를 당당히 한다는 건 그만큼 책임을 질 각오도 되어 있다는 뜻일 텐데?”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래야지.”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 건지?”

“내가 흑천련으로 가겠소. 교 선생께서 책임을 졌던 그 방식으로 말이오.”

그러자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가주님!”

“너무 위험합니다!”

“어찌 그런 악의 소굴로 가려고 하십니까?”

특히 적 가장의 수뇌인사들이 앞다투어 나서며 만류했다.

하지만 적비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 일에 책임을 질 것이니 더 이상 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 표정이 워낙 확고했기에 수뇌인사들도 더 이상은 말을 붙이지 못했다.

가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괜히 제가 저지른 일로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끄음.”

가후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적비연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적 가주가 원래 이런 인물이었나?’

말로만 들었다.

대단한 자라고.

그 대단했던 하천웅이 하늘처럼 떠받들 정도이지 않았던가?

한데 이런 돌발 행동까지 할 줄은 몰랐다.

한편 사예린은 사예린대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적비연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벽력적가를 멸문시켰어야 했는데.

난데없이 가주가 등장하다니!

적비연이 사예린을 빤히 보며 물었다.

“어떻소? 이 정도면 사절단의 임무는 해결된 것 같은데.”

사예린이 고개를 돌리고는 혈조야귀와 투혈권왕을 보았다.

두 사람도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희미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사예린이 말했다.

“좋아요. 당신은 본 사절단과 함께 항주로 가게 될 겁니다.”

“알겠소. 언제쯤 출발하시겠소?”

사예린이 형식상 혈조야귀를 보았다.

혈조야귀가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으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겠소.”

“그럼 준비하겠소.”

“설마 명문정파에서 말을 뒤집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오.”

“물론이오. 그랬다간 세상이 무림맹과 본 가를 비웃을 거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그럼 나는 이만 준비하러.”

대답을 마친 적비연이 몸을 돌렸다.

극마가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과연 이런 식으로 흑천련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다니.

‘임시방편이야.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이리 되면 혈조야귀를 처리하기가 애매해지겠는데?

적비연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 변경이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 밤엔 객점으로 가서 엽강호와 한사에게 사정을 설명해야겠어.’

-그놈들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구먼.

한편 적비연이 가주전으로 들어가고 나자, 장내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마침 정신을 차린 수뇌인사 한 명이 얼른 소리쳤다.

“뭐, 뭣들 하느냐? 어서 저 두 사람을 보호하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적 가장의 무인들이 단휘와 예홍에게 달려갔다.

* * *

“계획이란 틀어지게 마련이라지만.”

창가에 선 가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적 가주가 나타날 줄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듯 말을 이어갔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렀어. 이렇게 되면 저들도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

가후가 깊은숨을 내쉬더니 또 중얼거렸다.

“뭐, 오히려 잘된 건지도. 저들도 적 가주의 저의를 내심 의심하고 있을 테니까.”

그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면 계획은…….”

“그대로 가지.”

“알겠습니다.”

휘이이잉.

열린 창으로 밤바람이 소슬하니 불어왔다.

가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중얼거렸다.

“바람 냄새가 밋밋하군.”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 *

“벽력적가주가 우리와 동행하게 되면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혈조야귀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사예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쩔 수 없지. 이번 임무는 이상하리만큼 변수가 많네.”

“오늘 밤에 치는 건 어떻습니까?”

혈조야귀의 말에 사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적 가주를 볼모로 삼는 것도 나쁘진 않아. 그는 나름 골칫거리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지도 모릅니다.”

“안 돼.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이지. 괜히 무림맹에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야. 웃기긴 하네. 명분 따위는 정파 놈들이나 따질 줄 알았는데. 내가 지금 명분을 챙길 줄이야.”

사예린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뭐, 우리라고 항상 피 냄새만 맡으라는 법은 없잖아? 가끔은 밋밋하지만 신선한 바람도 쐬자고.”

“알겠습니다.”

혈조야귀가 고개를 숙였다.

* * *

“예에? 볼모라니? 주군이 그렇게 련으로 돌아가면 우린 어쩌란 말이오?”

엽강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적당히 기회를 봐가면서 합류하도록 해.”

“우리가 갑자기 나타나면 의심하진 않겠소?”

“뭐, 계속해서 은밀히 따르다가 사파 영역으로 들어섰을 때 나타난다면 딱히 의심은 하지 않겠지. 반철룡은 협곡에 떨어져서 실종된 걸로 둘러대면 될 거고.”

“뭐, 알겠소. 그럼 오늘 밤 혈조야귀를 치는 건 없는 일이 되겠군.”

“내가 볼모로 동행하는 이상 다시 돌아와 본 가를 칠 순 없을 거야. 그러니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혈조야귀를 제거하려는 것도 어디까지나 본 가장에서 피바람이 불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이었으니까.”

“뭐,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치고는 김이 샜지만 다행이기도 하오.”

엽강호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때였다.

콰당!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단휘가 뛰어 들어왔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는 온몸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헉, 헉, 헉……! 가주님!”

“무슨 일이야?”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리자, 단휘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장, 장원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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